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30
#929.
마중하다 (4)
최연하의 눈은 노인의 등을 쫓고 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노인이 굉장한 VIP라는 것.
들은 말과 돌아가는 상황을 종합하면, 딱히 언질도 없이 무척이나 급박하게 한국으로 들어온 것 같다. 분명 어제 확인했을 때만 해도 다른 누군가가 VIP 게이트를 사용한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리 급박하게 도착한 이에게 공항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전을 베풀고 있었다. 노인을 상대하는 이들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배어 있다. 이들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가 단적으로 보이는 장면이다.
‘누굴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시사 상식이 다른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딱히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는 최연하이긴 하지만, 최소한 그녀의 기억 속에 저런 얼굴은 없다.
아니, 저런 얼굴이 없다는 말은 이상하지.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으니까.
‘저래도 돼?’
이상한 광경이었다.
VIP 게이트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입국 심사를 하는 곳이다. 입국 심사가 뭔가. 타국에서 자국으로 입국하는 이들의 신분은 확실한지, 반입이 금지된 물품은 가지고 오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아닌가.
그런 입국 심사를 가면을 쓴 채 받는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평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저 노인은 입국 심사를 받을 것도 없이 공항 경비대에 연행되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재빠른 절차와 함께 국외로 추방되었을 것이다. 밟아본 곳이라고는 공항이 전부인 채로 한국을 떠나게 되었을 게 빤하다.
그런데 이 광경은 뭔가.
검색은 하는 둥 마는 둥, 대충대충 넘어가고 있다. 짐은 검색대를 통과하기는커녕 캐리어째로 직원에게 날라지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광경이었지만, 노인을 상대하는 직원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런 걸 따질 마음이 들지 않는다.
되레 안쓰러운 기분이 들 정도다.
직원들은 ‘이분이 여기로 지나갈 분이 아니신데, 왜 여기로 와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나?’라는 말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저 당황과 황당함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절차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굳이 그런 사실을 입에 올려 저들을 더 괴롭히는 것이 물에 빠진 개를 물 안으로 밀어 넣는 일처럼 느껴지니까.
마치 일국의 대통령이라도 방문한 것 같았다. 그것도 매우 강대국의 대통령이.
그런 이들이 의전을 받고 차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평범하게 검색대를 통과한다면 다들 저런 얼굴을 하지 않을까?
‘가면이라도 안 썼으면 좀 덜 이상하겠지.’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눈에 필터라도 꼈는지 노인의 가면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 모습에서 최연하는 한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사람들도 저 노인이 누군지 모르는 거야.’
그녀의 눈치가 어디 보통 눈치인가.
말 하나 통하지 않는 중국에서도 눈치 하나로 촬영을 완벽하게 마친 그녀다.
그녀의 비상한 눈치로 분석하기로는 지금 노인을 상대하는 이들 중에서도 노인이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이는 없다. 대응 자체가 스탠다드한데다, 노인이 뭔가를 말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슬쩍 좌우의 눈치를 살핀다.
내가 이렇게 대응하는 것이 맞는가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저들이 알고 있는 것은 노인이 절대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되는 특급 VIP라는 사실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마 위에서 내려왔을 것이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우스꽝스러운 노인.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공항 직원들. 사실상 저들이 준공무원이나 다름없는 위치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저 노인이 얼마나 높은 위치인지를 간접적이나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최연하가 노인과 함께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기다렸을지 알 수 없다. 저만한 이를 맞이한다는 건 준비만큼이나 뒤처리가 긴 일이니까.
“누나.”
“응?”
“모른다는데요?”
“그렇겠지.”
최연하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한은솔에게 저 노인이 누군지 물어보라고 했지만, 제대로 된 답을 가지고 올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모르는 사실을 대답할 수는 없으니까.
공항 직원들이 노인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조금만 일찍 눈치챘어도 헛고생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냅 두자. 우리가 알면 뭐 달라질 게 있겠어? 여기 지나면 안 볼 사람인데.”
“그건 그렇죠.”
그때였다.
검은 정장을 입은 한 사내가 최연하와 한은솔 앞으로 다가왔다.
최연하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딱히 뭔가를 한 것은 아니다. 적의를 보인 것도 아니고, 강압적으로 움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최연하는 이 사내의 움직임에 불쾌함을 느꼈다.
은근슬쩍 시야를 가로막는 위치 선정.
사내가 앞을 가로막은 덕분에 노인과 검색대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보통 사람에게 다가올 때는 이런 식으로 시야를 가로막지 않는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최연하가 눈을 빤히 뜨고 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최연하 씨.”
“네.”
“중국에서 돌아오셨다구요?”
“네, 그렇겠죠. 제가 타고 온 비행기가 중국에서 왔다면 말이에요. 하지만 혹시 모르죠. 제가 중국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사실 대만이라거나 인도라거나……. 세상에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으니까요.”
사내가 선글라스를 쓱 밀어 올렸다.
삐딱하게 돌아온 최연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치다.
둘 사이에 낀 한은솔만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 누나, 왜 이래, 또!’
물론 이유야 짐작이 간다.
최연하는 상대가 세게 나오면 더 세게 나가는 사람이다.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부드럽…… 아니, 가차 없는 사람이지만, 자신보다 세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더 가차 없다.
생각해 보니 무척 막장인 것 같지만…… 아니, 실제로도 막장이긴 하지만, 여하튼 그런 면이 있는 여자다. 그런 최연하가 삐딱한 미소를 짓는 자신만만한 사내를 봤으니 당연히 울컥하는 거겠지.
그런데 사람을 봐가면서 그래야 할 것 아닌가.
보이는 포스라든가……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는 이 VIP게이트에 당당히 들어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누가 봐도 정부 인사 아닌가.
공항 직원들과는 그 복장부터 다르니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잖아! 그런데 왜 시비를 거냐고! 왜!
‘미치겠네, 진짜.’
아니나 다를까, 사내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국정원에서 나왔습니다.”
사내가 내민 지갑 안에는 NIS라는 이니셜이 선명하게 찍힌 신분증이 보였다.
‘국정원!’
한은솔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물론 국정원이라고 해도 정부 기관일 뿐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국정원이 뭐 그리 특별한 곳일 리는 없다. 기껏해야 은밀한 경찰이다.
하지만 국정원이라는 어감이 주는 힘은 대단했다. 절대로 그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해 온 한은솔조차 국정원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몸을 움츠리고 말았으니까.
“그래서 뭐요?”
하지만 최연하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턱을 치켜들고 되묻는 최연하를 보니 존경심마저 든다.
‘역시 우리 누나야.’
보통 미친 게 아니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한 한은솔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봤냐! 세상 놈들아!
이 사람이 내 배우다!
죽겠네, 진짜…….
국정원에서 나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헛웃음을 지었다.
“딱히 뭔가를 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제가 요구할 사항은 이제부터 설명드릴 겁니다.”
선글라스를 다시 치켜올린 사내가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본 건 모두 잊으십시오.”
“네?”
“누군가 입국했다는 사실도, 그분과 함께 검색대를 통과했다는 사실도, 눈으로 본 저분의 모습까지도 모두 잊으십시오.”
“저기요.”
최연하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본 걸 어떻게 잊어요? 내가 바보도 아니고.”
“잊기 힘들어도 잊으셔야 합니다.”
“못 잊으면요?”
“그럼 잊게 해드려야겠죠.”
“…….”
최연하가 입을 다물었다.
잊게 해준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너무 빤하다. 잊을 수 없는 것을 잊는 방법은 하나뿐이니까.
“최연하 씨.”
사내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저 오늘 있던 일에 대해서 언급을 피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만 해주신다면 저희는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을 겁니다.”
최연하가 차가운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선글라스 뒤에 숨겨진 사내의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인지는 모르겠네요. 요즘 세상에도 공무원들이 이런 말을 하고 다니는지는 몰랐어요.”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목적은 변하지 않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니까요.”
“그 국가의 이익이라는 게 당신들의 입에서 나오면 어떤 느낌인지 아셔야 할 것 같은데?”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들이 그 느낌을 받으시길 원합니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최연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를 응시했다. 빙글빙글 웃는 사내의 얼굴이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흥.”
최연하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사내도 더 이상은 최연하를 압박하지 않았다. 최연하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누, 누나!”
“잠시.”
사내가 서둘러 최연하를 쫓으려던 한은솔을 제지했다.
“매니저이시죠?”
“예? 아…… 예. 제가 매니저입니다.”
“관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예?”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건 국가의 문제입니다. 쓸데없는 말이 새어 나간다면 저희는 소문을 제지하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강구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절대 협박이 아닙니다.”
“협박이 아니라뇨. 이건 협박…….”
“협박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한은솔이 입을 닫았다.
“VIP의 쓸데없는 변덕 때문에 피해가 가게 된 점 죄송합니다. 만일 이 일에 잘 협조해 주신다면 아무런 피해가 없음은 물론이고, 국가 차원에서 소정의 지원도 약속드립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당부하건대,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은 모두 잊으십시오. 여기에는 아무도 없던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그것만 명심하시면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협박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다.
손짓 하나, 그리고 선글라스로 가려진 눈빛과 무표정한 얼굴만으로도 한은솔은 이 협박이 절대로 말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제대로 단속하겠습니다.”
“이해가 빨라서 좋군요.”
사내가 싱긋 웃고는 한은솔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제가 아까 드린 말도 사실입니다. 이 부분을 잘 지켜주신다면 소정의 사례가 있을 겁니다. 편의를 봐드리는 쪽이 될지, 그게 아니면 지원이 주어질지는 모르겠네요. 그럼.”
사내가 몸을 돌려 멀어져 가자 한은솔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열심히 단속을 할 건데 말이죠.’
문제는 최연하는 단속이 안 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한은솔이 지끈거리는 옆머리를 누르면서 최연하를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