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33
#932.
증언하다 (2)
남겨진 이들은 어색하게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게 뭔 상황이냐.’
박학기는 터진 멘탈을 어찌어찌 수습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줄을 잡았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지옥 같은 어색함이 라운지를 채우고 있었으니까.
‘아, 아니.’
뭐냐, 저 인간?
그렇게 가버리면 어쩌자는 거냐?
황당하다.
너무 황당해서 이제부터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마스터가 왔잖아.’
마스터가 한국에 왜 왔겠는가? 강진호를 만나러 온 게 아닌가? 그런데 라운지까지 같이 와놓고는 그냥 가버리면 어떻게 하나?
박학기가 고개를 쭉 뺐다.
혹시 강진호가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닌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빼고 기다려도 강진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게 뭐하는 거냐고?’
대책이 없다.
세상일에는 상식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상식이라는 것을 서로 지켜야 모두가 편해지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강진호는 그 상식이라는 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어…….”
머릿속에 수십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어디로 가는 걸까?
왜 최연하랑 같이 가는가?
마스터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기분이 더럽게 나쁘지 않을까?
그럼 이제 박학기는 무엇을 해야 하지?
이 사태를 수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지금이라도 뛰어 나가서 강진호를 다시 데리고 와야 하나?
아니, 강진호가 지금 박학기를 안 좋게 본 것 같은데, 어떻게 그것부터 먼저 풀어야 하지 않나?
머리가 터져 버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런 박학기의 시선에 한은솔이 들어왔다. 한은솔은 최연하가 두고 간 짐까지 척척 챙기더니 박학기를 슬쩍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가도 되죠?”
“……예.”
“안녕히.”
상큼하게 웃고 걸어 나가는 한은솔의 발걸음이 더없이 가벼워 보인다.
생각 같아서는 한은솔을 잡아다 놓고 강진호와 최연하의 관계를 정확하게 듣고 싶었지만, 지금 박학기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강진호가 가버린 이상 마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그의 몫이니까.
한은솔이 나가 버리자 마스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버렸나?”
위긴스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죄송합니다. 워낙 관심이 한정되는 분이시라.”
“아니, 아니지.”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을 하면 좀 이상하겠지만, 나는 차라리 저 사람이 자리를 비워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얼굴을 마주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
“이해합니다.”
위긴스가 가볍게 웃었다.
위긴스는 지금 마스터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역시 과거에 똑같이 느꼈으니까.
강진호는 일반적인 무인이 아니다.
강하기에 다른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 궤를 달리한다. 과거에는 마인들이 무인계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현대에는 저런 존재가 없다.
그러니 마인. 그 마인 중에서도 극마에 올라 있는 강진호의 존재는 모두에게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위긴스도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지만, 한 번씩 강진호가 화를 내거나 심각해질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충격을 받는다.
그러니 마스터는 오죽하겠는가?
‘더구나 로드께서는 과거에 내가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수준으로 강해지셨지.’
그러니 어쩌면 마스터는 위긴스가 받았던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할 말이 굉장히 많을 줄 알았는데.”
마스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위긴스에게도, 강진호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대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고민이다.
“제 일정은 완전히 비워두었습니다. 천천히 시작하시지요, 마스터.”
“음.”
“할 말이 많은 것은 서로가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위긴스가 싱긋 웃는다.
그 미소를 본 마스터는 한 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성장했구나.’
여유가 느껴진다.
과거의 위긴스는 뭔가 빠져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빠진 부분을 찾기 위해서인지 항상 다급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위긴스에게서는 과거에 없었던 여유가 있다.
“많은 말을 해야겠지.”
“안내하겠습니다. 이 나라의 커피도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 더 좋은 것을 준비해 왔지. 본토의 맥주라면 선물로는 충분하지 않겠나?”
“……이거 참.”
위긴스가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그 값어치를 하려면 대체 뭘 대접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가시죠. 일단 긴 여행의 피로를 맥주로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건 마음에 드는 말이군. 가세.”
위긴스와 마스터가 라운지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마스터의 수행원들이 뒤따랐다.
순식간에 모두가 빠져나가 텅 비어버린 라운지에 박학기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아니.”
박학기가 멍하게 서 있자 안으로 들어온 부하 요원들이 박학기의 눈치를 살폈다.
“어, 어떻게 할까요?”
“뭘?”
“누, 누구를 쫓습니까? 일행이 둘로 나뉜다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라.”
“끄응.”
박학기가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마른세수를 한 박학기가 짜증을 한껏 담아 소리쳤다.
“강진호부터 쫓아!”
“예!”
“아, 아니다! 쫓지 마!”
“예?”
“쫓지 말라고.”
박학기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미 그들은 실수를 저질렀다.
애초에 그들의 미행이라는 것은 미행이 아니다. 그들이 무슨 수를 써도 무인들의 감각을 피할 수는 없다. 그들의 미행이라는 건 서로가 알고 있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저희도 위에서 시킨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미행을 하는 겁니다. 대신에 이 정도 영역 이상으로는 절대 접근하지 않을 것이고, 민감한 장소에는 절대 발을 들이지 않을 테니까 이 정도 거리에서 쫓는 걸 이해해 주십시오’라는 의미를 필사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무인에 대한 미행이었다.
하지만 지금 강진호는 그들의 존재에 이미 민감해진 상태가 아닌가.
이럴 때 어설프게 미행을 붙였다가는 상황이 어디까지 악화될지 모른다.
“다 놓으라고 해. 기본으로 붙어 있던 미행도 다 철수시켜.”
“하,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하라고 새끼야! 너는 몇 달 만에 여자 친구랑 데이트하는 걸 남 앞에 보이고 싶겠냐?”
“당장 철수시키겠습니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토해낸 박학기가 머리를 움켜잡았다.
“으아아아! 빌어먹을! 이 개 같은 새끼들은 최연하와 강진호가 관계가 있다는 걸 왜 빼먹은 거야! 이 식충이 같은 것들!”
물론 보고는 몇 번 봤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정도의 관계일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니, 아니야. 설마. 그래도 급이란 게 있는데. 강진호가…….”
그 때였다.
“저……. 부장님.”
“어?”
“총회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누군데.”
“이현수 실장이랍니다.”
박학기의 눈이 흔들렸다.
이현수.
‘그, 그 새끼가 왜?’
직업의 특성상 박학기는 어쩔 수 없이 총회를 상대해야 한다.
그가 맡은 일은 총회와 무인계에 대한 감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완전히 척을 지고 살 수 없었다.
조직폭력배를 담당하는 형사가 어쩔 수 없이 조직폭력배와 대화를 해야 하듯이, 총회를 담당하는 그는 이현수와 연락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으, 이 거머리 같은 새끼.’
역설적으로 박학기가 가장 연락하고 싶지 않은 무인도 바로 이현수였다.
그 뱀 같은 놈이랑 전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박학기의 오금이 저려온다.
“왜 전화했대?”
“모릅니다. 그냥 부장님 바꾸라는데요?”
박학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리 줘.”
“예.”
휴대폰을 받아든 박학기가 라운지를 벗어나 복도로 갔다. 접근하려는 부하직원을 손짓으로 밀어낸 박학기가 휴대폰을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박학기입니다.”
[너 뭐하는 놈이야?]“……예?”
[뭐하는 놈이냐고!]박학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갑과 을로 나뉜다.
자신이 갑인가, 을인가를 먼저 알아야 상대를 어찌 대할 것인가를 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현수와 박학기 중 누가 갑인가는 너무도 명확하다.
이현수는 총회의 이인자다.
사실 이인자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그 외에도 나름 힘을 더 가지고 있는 이는 있으니까. 하지만 외부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외국인을 제외하고, 토종 한국인 중 권력 서열을 나누자면 이현수는 방진훈과 더불어 강진호의 오른팔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정부로 따지자면 국무총리?
아니, 비서실장 쯤 되겠지.
총회가 정부와 비등한 대접을 받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밸런스를 조정한 권력 체계를 감안해도 이현수는 감히 박학기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현수와 대등하려면 국정원의 팀장급 이상은 되어야 한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무슨 문제? 너 어디야, 새끼야!]“…….”
어딘지 몰라서 묻나?
공항에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뭘…….
“말씀을 해주시면.”
[말을 해? 말을? 와 이거 완전 미친 새끼네. 너 대체 뭐하는 새낀데, 회주님이 마중 나가신 자리에 깽판을 놓냐?]“…….”
[내가 너희 쪽에 회주님이 공항으로 가시니까 문제 일으키지 말라고 미리 말 안했냐? 너 뭐하는 새끼냐고?]‘야. 이 미친 새끼야.’
그렇게 말하면 당연히 마스터를 마중 나온 줄 알지. 같은 시간에 VIP가 입국하는데, 한낱 여자 마중 나올 줄 누가 상상이나 하겠냐고!
[하, 이 미친. 야……. 아오.]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여러 추임새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박학기를 푹푹 찔러 대고 있었다. 저 리액션이 지금 박학기가 얼마나 엿됐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정부 쪽에 영 인상 안 좋으신 분인데, 어떻게, 어떻게 좋게 풀려고 악을 쓰는 중인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 지랄을 해? 너 이새……. 아니다. 내가 너하고 말해서 뭐 하겠냐? 야, 내가 유명학이랑 따로 통화할 테니까, 너는 그 새끼랑 대화해라. 알았냐?]상사의 이름이 나오자 박학기의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안 돼.’
이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말이 상사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그의 출세 길을 꼬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오로지 강진호와 총회를 상대하는 것이 모든 것을 건 부서에서 강진호에게 찍힌 놈이 무슨 수로 진급을 한다는 말인가?
“이, 이 실장님!”
[왜?]“제, 제가 어떻게 잘 해결을 해보겠습니다. 전화 한 번만 참아 주십시오.”
[네가 뭘 해결해! 나도 해결이 안 되는데.]“최, 최연하 씨하고 잘 대화하면 되잖습니까! 제가 어떻게든 해볼 수 있습니다.”
[하, 이 꼴통 새끼.]잠시 침묵이 오고갔다. 그리고 이현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 부장님.]“예!”
[24시간 줍니다. 24시간 내에 이거 해결 못하면 내가 찾아가서 뒤집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알아요.]“명심하겠습니다.”
[정보 단체란 새끼들이 정보 하나하나 다 떠먹여 줘야 하나. 이런 것도 모르고 뭘 하겠다고, 쯧쯧.]전화가 뚝 끊겼다.
박학기는 이마에 흐른 땀을 소매로 훔쳤다. 그리고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야!”
“예! 부장님!”
부하 요원이 뛰어오자 박학기가 단호하게 소리쳤다.
“최연하가 뭐 좋아하는지 좀 알아봐.”
“……예?”
“귀 막혔어? 최연하가 뭐 좋아하는지 알아보라고!”
“예! 알겠습니다!”
“다른 애들도 다 동원해서 빨리!”
“예!”
부리나케 뛰어나가는 요원을 보며 박학기가 벽에 등을 기댔다.
“뭔 일이 이리 꼬이냐.”
진짜 VIP는 따로 있었다.
그걸 몰랐던 게 박학기의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