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34
#933.
증언하다 (3)
공항을 빠져나온 위긴스와 마스터는 차를 타고 이동했다.
정부 쪽에서 준비한 차가 있지만, 마스터는 위긴스가 가져온 총회의 차를 탔다. 그 문제 때문에 박학기가 한 번 더 깨졌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날 어디로 데려갈 셈인가?”
보조석에 앉은 위긴스에게 마스터가 말을 건넸다.
그러자 위긴스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한적한 곳을 준비해 뒀습니다.”
“그것참, 무서운 이야기로군. 검은 세단을 타고 한적한 곳으로 이동한다니, 마치 느와르 영화 같군. 거기에는 뭐가 준비되어 있나? 드럼통? 시멘트?”
위긴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느와르 영화도 보십니까?”
“사람들이 노인을 바라볼 때 잊는 것이 있지. 노인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 말이네. 나라고 취미가 없었겠는가?”
“어쩌면 저희는 대화가 적었던 건지도 모르겠군요.”
“이제 나누면 되겠지.”
위긴스가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니 가슴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한참을 달린 끝에 차가 해변의 카페에 도착했다.
이현수가 손을 써 전세를 내둔 덕분에 카페 안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카페 안으로는 위긴스와 마스터만이 들어갔다. 마스터의 수행원들은 입구에 서서 다른 이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지켰다.
“커피 괜찮으시겠습니까?”
“밀크티 되는지 모르겠군.”
“그럼 밀크티로 하겠습니다.”
주문을 마친 위긴스는 마스터의 건너편에 앉아 가만히 기다렸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고 바리스타마저 카페에서 나가자, 카페 안에는 그들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제야 위긴스가 입을 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긴 여행이었지.”
“원탁에서 연락이 올 거라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지만, 설마 마스터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나이가 들면 때로는 사람을 놀래키고 싶어지는 법이거든.”
마스터가 가만히 밀크티를 마셨다.
살짝 달달한 맛이 혀끝에 감돌자 몸에 활력이 조금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여행의 피로 따위가 무인의 육체를 가라앉게 만들 수는 없지만, 정신적인 피로마저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정신적 피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잠과 당분이다.
위긴스는 가만히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밀크티를 홀짝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곳이 영국의 어느 해안가같이 느껴진다.
인적이 드믄 영국 해안가의 카페, 그리고 그곳에서 밀크티를 마시며 지나온 인생을 회상하는 노인.
지극히 평화로운 광경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영국이 아니고, 눈앞의 노인도 평범한 노인이 아니다.
마스터는 명백히 세계를 움직이는 인물 중 하나다.
이 작은 노인의 말 한마디가 세상을 뒤흔든다. 어쩌면 드러난 세계의 지배자들보다 더.
“그래.”
잔을 내려놓은 마스터가 고개를 들어 위긴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투명한 눈동자를 마주하니 괜히 움츠러든다.
“괜찮아 보이는군.”
“나쁘지 않습니다.”
“팔은 어디에 팔아먹었나?”
“하하…….”
위긴스의 의수가 끼긱대며 움직였다. 자유로이 움직이는 손가락을 본 마스터가 흥미롭다는 듯 콧소리를 냈다.
“재미있어 보이는군.”
“회로를 짜 넣는다고 고생하기는 했지만, 원래 팔보다 나은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귀찮게 도구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측면도 있고.”
“회로 공유 좀 해주게.”
“연구를 날로 먹을 생각이십니까?”
“날로 먹지 않으면 뭔가를 해주면 되겠지. 하지만 지금의 내가 자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미묘한 거리감이었다.
위긴스는 살짝 감회에 젖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마스터는 그에게 은사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다. 직접 무학을 가르쳐 준 스승은 아니지만, 무학보다 더 많은 것을 마스터에게 배웠다.
하지만 이제는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감이 생겨 버렸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군.’
거리감이 생기고서야 깨달았다.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딱히 그럴 의도가 없음에도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 신경이 갉아 먹히는 느낌이다. 탐색하듯 툭툭 던지는 말이 심력을 뽑아낸다.
“위긴스.”
“예, 마스터.”
“그래도 얼굴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예.”
마스터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갑자기 한국으로 떠나갔을 때, 나는 무척이나 상심했지. 세상의 반을 잃은 것 같은 심정이었어.”
“죄송합니다.”
위긴스가 고개를 숙였다.
“사정을 모두 설명드리는 쪽이 예의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모든 사정을 설명하려 했다면, 저는 결코 원탁을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겠지.”
놓아주지 않았을 테니까.
잡고 사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이트는 원탁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원탁을 떠난 나이트는 제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탁에 대한 정보가 타국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
“슈발리에들을 보낸 것은 내 의도가 아니었네.”
“괘념치 마십시오. 마스터께서 원한 것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설사 마스터께서 그것을 원했다 하더라도 제가 불만을 가질 수는 없지요.”
위긴스가 한숨을 쉬었다.
잊고 살고 싶은 일이지만, 그는 참 마스터에게 못할 짓을 저질렀다.
그의 총애를 저버리고 한국으로 왔다. 마스터가 얼마나 곤란해질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할 수 있는 모든 사죄를 한다고 해도 그에게 죄를 갚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위긴스.”
“예, 마스터.”
“쓸데없는 이야기를 다 했으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지. 자네나 나나 그리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아니니까 말이네.”
“예.”
위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입술이 바짝 마른다. 그가 여기서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원탁과 총회의 관계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선 자네가 내게 설명해야 할 것이 있지?”
“예, 그렇습니다.”
“원탁을 버리고 총회를 선택한 이유가 뭔가?”
직설적이다.
평소 마스터의 화법과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차라리 이편이 더 낫다. 슬금슬금 몰아가는 화법은 서로를 지치게 만드니까.
“마스터.”
“음.”
“저는 명확한 것을 좋아합니다.”
“응?”
살짝 돌아 들어오는 대답에 마스터가 눈을 치켜떴다.
“어떠한 일이 있다면, 그 일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타인은 물론이고, 제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죠.”
커피로 살짝 목을 축인 위긴스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일도 그렇습니다. 제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명확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저도 이걸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겁니다.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가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데, 사실 저도 잘 모르겠거든요.”
“…….”
“인정합니다. 그건 충동적인 일이었고, 계획적이지 않았습니다. 순간의 감정에 자신을 맡겼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자신합니다. 유일하게 그때만인 충동과 감정이 제 이성을 이겼습니다. 그 결과가 이겁니다.”
마스터의 눈이 점점 가라앉는다. 그의 몸이 천천히 뒤로 기대어졌다.
“어쩌면 멍청한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그때의 제 선택에 만족합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기 때문에 과거에 그런 선택을 했다’라는 대답을 할 수는 없지요. 대답하겠습니다. 저 역시 그때 제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저…….”
“그저?”
“예, 마스터. 저는 그저 이곳에서 제가 더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명확한 플랜을 가졌다거나 확실한 루트를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안개가 잔뜩 끼어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의 시작점에서, 이 길의 끝은 세상의 끝일 거라 믿고 달려드는 어리석은 짓을 한 것뿐이지요.”
위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결과가 이겁니다.”
“허허허.”
마스터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다. 하지만 그 대답이 더없이 진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자네도 꽤나 번했구만.”
“사람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예전의 자네였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겠지. 변했어. 모든 것이 변하는구만.”
“하하…….”
마스터가 부드러운 미소를 품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보게, 위긴스.”
“예, 마스터.”
“사람은 변하네. 그래, 변하지. 같은 사람이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대답이 항상 같지는 않단 말이네. 일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지.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나아갔을 수도 있고, 아집에 쌓여 퇴보할 수도 있네. 그래, 그게 사람이지.”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게 필요하단 말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세상은 너무도 다채롭네. 그 다채로운 것들에 일일이 대응한다는 것은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지. 그렇기에…….”
마스터의 어조가 칼날처럼 변했다.
“규칙이 필요한 것일세.”
위긴스의 눈도 가라앉았다.
좋은 덕담을 나누는 일은 끝났다.
“그 규칙이 원탁이라는 겁니까?”
“그렇다네.”
“마스터.”
위긴스가 한숨을 쉬었다.
결국은 이 말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위긴스의 생각보다 빨랐다.
“원탁은 낡았습니다.”
“…….”
“시대는 변했습니다. 하루하루가 다릅니다. 몇 백 년 전에 정해진 원칙을 지금에 끼워 맞출 수는 없습니다.”
“어리석은 소리.”
마스터가 혀를 찼다.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인간이 그때그때 완벽한 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어차피 완벽한 답 따위는 없어. 그렇다면 차라리 원칙이라도 지키는 게 낫네. 그러면 적어도 억울한 이가 생기지는 않겠지.”
“그건 마스터의 착각일 뿐입니다.”
“……지금 뭐라 했는가?”
“다시 한 번 똑똑히 말씀드리지요. 그건 그저 마스터의 착각일 뿐입니다.”
마스터가 등을 등받이에서 뗐다.
어깨를 쭉 편 그가 위긴스를 노려본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푸른색의 눈동자가 위긴스를 압박해 들어갔다.
“자네, 지금 나를 능멸하는 것인가?”
“아니요. 저는 마스터를 능멸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부정하는 건 마스터가 아닙니다. 바로 원탁이지요.”
“이보게, 위긴스.”
“예, 마스터.”
“차라리 나를 능멸하지그랬나?”
“…….”
“원탁을 부정할 수는 없어. 원탁은 완전무결하니까. 자네가 원탁을 부정했다는 것은 총회 역시 원탁을 부정한다는 말이겠지?”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설명해 보게. 자네가 원탁을 부정한 이유를 말이야. 만약 그 설명이 나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마스터가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다.
살짝 테이블을 누르는 그 손길에서 그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총회는, 그리고 자네는 나와 원탁을 적으로 맞이하게 될 걸세.”
차가운 공기가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