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37
#936.
내리밟다 (1)
숨결이 피부에 닿는다.
은근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일만의 대군을 앞에 두고도 여유만만하던 강진호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네?”
“흐으응?”
할 말이 없어 되묻자, 콧소리가 돌아왔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나 안 보고 싶었냐구요.”
“보, 보…….”
참 이상한 일이다.
‘보고 싶었다’와 ‘니 대가리를 쪼개서 뇌를 뽑아버리겠다’를 다른 이에게 말해야 한다면, 명백하게 후자 쪽이 난이도가 높을 것이다. 누구라도 말이다.
하지만 강진호의 경우는 후자 쪽이 백배는 더 편했다.
“보 뭐요?”
“보…….”
입술이 안 떨어진다.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한동안 최연하와 있으면서 면역이 좀 생겼는데, 최근 들어 잘 못 보다 보니 겨우 생긴 경험치가 싸그리 리셋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자자.”
최연하가 손을 들어 귀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한다.
“자자, 말해봐요. 이 누나가 들어줄 테니.”
“…….”
“거,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한 번 하려고 했으면 해야지!”
“…….”
“어서!”
강진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운전 중에 눈을 감는 짓은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지금 강진호에게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보고 싶었죠.”
“흐으으응.”
최연하가 미묘한 미소를 담고는 시트에 몸을 꾹꾹 민다.
“아닌데? 진정성이 없는데? 억지로 말하는 것 같은데?”
“…….”
강진호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최연하는 그런 강진호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요, 됐어. 그만하면 노력했어요.”
등에서 식은땀이 배어난다.
강진호는 마스터가 그리워졌다.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차라리 그를 앞에 앉히고 서로 욕을 해 대는 쪽이 훨씬 마음 편할 것 같다.
이건 그에게 고역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고역이고 힘들면 안 하면 된다. 사람이 굳이 고통을 자처할 필요는 없잖은가.
하지만 문제는 이 상황이 싫지는 않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뭔가 간질간질한 것이…….
“크흐흐흠.”
강진호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생각해 보니 최연하도 이리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가 적극적인 척하려다가 제풀에 터져서는 어색해하는 타입 아니었던가.
“그럼 가까운 카페라도?”
“아뇨. 집에 갈래요.”
“네?”
“얼굴 봤으니 됐죠. 밥도 같이 먹었고.”
최연하가 기지개를 켰다.
“비행을 오래했거든요.”
“아, 피곤하시겠죠.”
“그게 아니라…….”
최연하가 딱 잘라 말했다.
“사람이 살짝 피곤하거나 예민해져 있으면 주변에 괜히 짜증을 부리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안 그래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안 그럴 수 있는데, 아시다시피 제 성격이…….”
“아, 그렇죠.”
“……뭐가 그런데?”
강진호가 입을 조개처럼 합 다물었다.
추임새도 넣을 때 넣어야지, 덮어놓고 추임새를 넣다가는 거지꼴을 못 면하는 법이다.
최연하가 날카로운 눈으로 강진호를 노려보았다. 강진호는 절대 눈을 옆으로 돌리지 않았다. 도로 앞에 사고라도 난 것처럼 시선을 완벽하게 앞으로 고정했다.
“긴장 안 하지?”
“오랜만이라…….”
최연하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에요. 그런데 정말 성격이 좀 날카로울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괜히 짜증 내고 싶지 않아요.”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그런 것에 반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본인이 그리 원한다면 따라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맛있는 것도 먹고, 내 침대에서 푹 자고. 그러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피부도 좋아지겠죠. 지금도 기분이 좋은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더 좋아질 거예요. 그러고 나서 다시 만날래요.”
“네.”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집으로 가겠습니다.”
“네.”
차가 부드럽게 달려 나갔다.
평소 타던 스포츠카가 아니어서 속도감은 나지 않지만, 승차감이 부드럽다. 붕붕이를 탈 때면 도로에 얼마만 한 크기의 자갈이 떨어져 있었는지까지 엉덩이로 스캔하고 다니는 기분이다. 그에 비하면 차를 잘 선택한 것 같았다.
해안도로를 벗어나 차가 서울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차가 최연하의 집 근처에 도달했다.
“그리고 강진호 씨.”
“네.”
강진호가 살짝 긴장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이상하게 살짝 긴장하게 된다.
“내가 이번에 생각을 많이 해봤거든요.”
“……네?”
“중국 호텔방에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으면 별생각이 다 떠올라요. 그래서 생각을 진짜 많이 했는데, 결론이 하나 나왔어요.”
“결론이요?”
최연하가 어깨를 으쓱한다.
“사실 그동안 제가 체면을 엄청 차렸거든요?”
“네?”
체면?
무슨 체면?
체면이라고는 다 날려놓고 날뛰던 사람 아니던가? 이 사람이 언제 체면이라는 것을 차렸지?
“많이 차렸어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제 나름으로는 여자가 너무 매달리고 만나자고 하는 것도 좀 그랬고, 또 하나는…….”
최연하가 한숨을 쉬었다.
“결국 자주 보다 보면 스캔들이라는 게 안 날 수가 없거든요.”
강진호도 그 사실에 동의했다.
강진호는 평범한 사람보다 감각이 예민하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충 다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 카메라를 드는 것을 완전히 파악하는 건 쉽지 않다.
그나마 전문가용 카메라라면 어떻게 알아챌 수 있겠지만,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을 한다면 도리가 없다. 주변에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일일이 확인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사실 제가 일부러 외곽으로 돌고, 얼굴도 최대한 가리고 다니고, 만나는 것도 최대한 자제를 했는데…….”
최연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부질없더라구요.”
“예?”
왜 뜬금없이 그런 결론이 나오지?
“타지에서 그렇게 촬영한다고 생고생하는 이유가 어떻게 보면 제 격을 올리기 위해서였잖아요?”
“그래요?”
“……말했잖아요. 내가 강진호 씨를 만나는 데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지금도 딱히 부끄럽지는 않은데요.”
“그냥 그렇기 이해해요. 이건 자격지심 같은 거니까. 이건 내 쪽에서 설명한다고 해도 강진호 씨는 이해 못할 거예요.”
“예.”
“여하튼 그렇게 격을 올리려고 생고생하다 보니까 그런 결론이 나오더라구요.”
“어떤 결론요?”
“이렇게 악을 써서 배우로 성공하려고 하는데, 스캔들이 겁나서 도둑처럼 숨어 다녀야 하나.”
“…….”
“진짜 대배우라면 스캔들도 극복해야지! 시집가서도 대배우 취급받는 여배우들이 할리우드에는 얼마나 많은데!”
“어, 음…….”
기시감이 든다.
그러고 보면 최연하는 예전에도 이랬다.
원인과 전개는 다른 이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데, 결론이 뭔가 파격적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원인과 전개에서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를 알 수가 없는 여자였다.
“그러니까, 이제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각오요?”
“네. 이제 내가 강진호 씨 괴롭힐 거니까. 심심하면 찾아가서 놀아달라고 보챌 거예요.”
“…….”
식은땀이 흐른다.
아니, 뭐, 싫은 건 아니다. 싫으면 이리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공항까지 마중을 나가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뭔가, 이 불안함은?
“걱정하지 마요. 나만 따라오면 되니까.”
“아니…….”
“누나가 다 알아서 할게. 괜찮아, 괜찮아.”
“아, 아니…….”
뭔가 꼬이고 있는 느낌인데?
그러는 와중에도 차는 계속 달려 최연하의 집 앞에 도착했다.
“여깁니다.”
“내가 집에 간다 그래놓고 막상 내리려니까 아쉽네.”
“예?”
“라면 먹고 갈래요?”
“…….”
“얼굴 빨개졌다.”
조금만 더 하면 귀로 연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다.
“이제 이런 말도 알아듣네? 강진호 씨 많이 발전했네요. 농담이에요. 대낮에 무슨. 다음에 내가 저녁에 이야기할게요.”
“네?”
“히히히히.”
최연하가 깔깔대며 웃다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강진호를 충분히 놀려서 스트레스가 풀렸다는 얼굴이다.
“그럼 다음에 연락할게요. 오늘 굳이 마중 나와주시고, 집까지 데려다 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감사는요.”
마중 나오라고 하셨는데요?
그 문자 본인이 보내신 거 아니었나요?
할 말은 많지만,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다음에 뵈어요.”
최연하가 문을 열려다가 손을 멈췄다. 그러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
강진호의 눈에 불안이 떠올랐다. 고개를 돌린 최연하의 얼굴에 홍조가 살짝 떠올라 있었다.
저 얼굴만 봐도 뭔가 불안.
최연하가 조금 전처럼 몸을 앞으로 쭉 내민다. 강진호가 고양이를 본 쥐처럼 시트로 파묻혔다.
“강진호 씨.”
“……네?”
“나도 보고 싶었어요.”
최연하가 가볍게 웃더니 강진호의 볼에 입을 가볍게 맞췄다.
그러고는 후다닥 차에서 내리더니, 문을 향해 전력 질주로 뛰어갔다.
“…….”
강진호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한 손이 올라와 볼을 가볍게 문지른다.
“저리 도망갈 거면 하지를 말든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주 이상한.
* * *
총회로 돌아온 강진호가 회주실로 바로 올라갔다.
회주실에는 위긴스와 이현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음.”
“…….”
강진호가 가볍게 대답을 했지만, 저쪽에서는 평소와 같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살짝 의혹 어린 눈으로 강진호를 주시할 뿐이었다.
“어떻게 됐지?”
“아……. 예, 로드. 마스터는 지금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피로를 풀고 내일 오전에 접견할 예정입니다.”
“그렇군.”
강진호가 상석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찰칵.
품에서 꺼낸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천천히 연기를 뿜어낸 강진호가 미간을 좁혔다.
“왜 온 거지?”
“이유야 여러…….”
“음?”
“아, 아뇨. 그러니까 이유야…….”
위긴스가 말을 하려다가 결국은 참지 못하고 이현수를 돌아보았다.
이현수가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회주님.”
“음?”
“……볼에 그거 좀 닦으셔야겠는데요?”
“응?”
“볼에…….”
고개를 갸웃한 강진호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런 후, 카메라를 켜 자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
그러고는 석상처럼 굳었다.
볼에 선명한 입술 자국이 나 있다.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알고 지웠겠지만,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 없는 백년 솔로 강진호이다 보니 미처 립스틱 자국을 지우지 못한 것이다.
“이, 이게 왜…….”
“……혹시 현관으로 오셨습니까?”
“으응.”
“거기 사람은?”
“많았지…….”
“그러셨군요.”
이현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인생의 좋은 경험이다 생각하고 받아들이셔야지, 방법이 없습니다.”
“…….”
강진호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좀.”
“네. 다녀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강진호가 밖으로 나갔다.
이현수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문밖으로부터 누군가가 앓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둘은 굳이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 들지 않았다.
“……좋을 때다.”
“부러워 보이십니다?”
“내가 부러워할 일이냐? 네가 부러워해야지, 이 한심한 놈아.”
“…….”
뜬금없이 파편을 얻어맞은 이현수도 격침되었다.
그리고 총회에는 회주 강진호가 연애 중이라는 소문이 단 하루 만에 폭발적으로 퍼져 나갔다.
강진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