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4
#93.
자대 가다 (3)
강진호가 자대에 온 지 채 3일이 지나기도 전에 슬슬 이상함을 발견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막내야, 이거 다 외웠냐?”
“예.”
“다 외웠다고?”
“예.”
전혁수는 띠껍다는 표정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하, 이 새끼 보게?”
강진호의 손에 들려 있는 수첩은 그의 부대에서 생활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들과 제원들을 모아놓은 수첩이었다.
암기를 강요하는 것이 내무 부조리랍시고 금지되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암기를 강요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대기 기간 2주가 지나고 나면 근무에 투입되어야 하는데, 차량 번호도 모르고 위병으로서의 기초적인 정보도 없는 신병을 어떻게 근무에 투입하란 말인가.
인원의 부족과 신병의 근무 투입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요소를 배재하고 무작정 신병에게 암기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은 총을 쓰지 말고 사자를 잡아 오라는 말과 같은 소리였다.
그럼 책임이라도 지든가. 정책은 이리 결정해 놓고 신병 때문에 사고가 나면 제대로 교육을 못 시켜서 벌어진 일이랍시고 윗선부터 싸그리 털어버리니 버틸 재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현재 부대들은 암암리에 대기 기간 동안 신병에 대한 암기 강요를 묵인하고 있었다.
“진짜 다 외웠냐?”
“예.”
2주는 꼬박 들여다보고 있어야 다 외우는 게 가능할까 말까 한 수첩의 정보를 그새 다 외웠다고 하니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야, 2354부대가 어디야?”
“56연대입니다.”
“어?”
전혁수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그럼 57연대는?”
“2369부대입니다.”
“헐?”
전혁수가 몇 가지를 더 묻고 나서야 멍한 얼굴로 인정을 했다.
이놈은 정말 이 수첩 안에 있는 내용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싸그리 다 외워 버린 것이다.
“너, 학교 어디라고?”
“재경대학교입니다.”
“……머리 좋은 놈이구나.”
전혁수는 간만에 제대로 된 신병이 왔다는 생각에 드는 안도감과 그래도 신병 주제에 너무 쉽게 자기 할 일을 해버린다는 짜증을 동시에 느꼈다.
“야, 너 관물대 열어봐.”
“예.”
“신병이고 개뿔이고, 군인이면 정리 정돈…….”
벌컥.
서슴없이 열리는 강진호의 관물대를 보고 전혁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막내야.”
“이병, 강진호.”
“너 세탁소집 아들이니?”
“아버지는 카페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투복에 칼이 잡혀 있지? 저거, 다리미가 없어도 할 수 있는 거였나?”
“꽉 접으면 됩니다.”
“그래?”
그럴 리가 있나!
그래도 옷인데 사람 손으로 누른다고 저렇게 칼 각이 잡힐 수는 없다! 일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전투복을 입고 살아온 전혁수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세상에…….”
하지만 눈앞에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갈같이 각이 서서 1㎜의 오차도 없이 접혀 있는 옷들과 완벽하게 줄 지어 걸려 있는 상의들.
그리고 서랍 안의 양말과 속옷들은 마치 브랜드 전시장의 그것들처럼 완벽히 오와 열을 맞추고 있었다.
“……너, 어디 입대했다가 재입대한 거냐?”
“아닙니다.”
“그렇지? 나도 그런 말은 못 들었으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 그게 맞는데…….”
그럼 신병다운 맛이 있어야지!
저게 어딜 봐서 신병의 관물대란 말인가!
부대에 비상이 걸려서 사단장이 나온다고 해도 저런 식으로 관물대는 정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사단장님이 저 관물대를 본다면 이 부대는 내무 부조리가 판을 친답시고 다 뒤집어엎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저렇게까지 과하게 정리할 필요는 없어.”
“습관입니다.”
“그래도 너무 과한데…….”
“적당히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 그래.”
전혁수는 이마에서 배어 나오는 식은땀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 성격이 저런 정도면 결벽증 아닌가?
요즘 TV에 결벽증으로 유명한 연예인들이 나와서 집을 인증하고는 하던데, 그 사람들이 정리해 놓은 게 애교로 보일 정도였다.
‘뭔 양말이 각이 서 있어.’
옷이야 이해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두껍고 긴 군용 양말조차 각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이쪽으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괜히 시범을 보인답시고 정리해 놓은 그의 관물대를 열었다가는 ‘이리 더러운데 벌레는 안 나옵니까?’라는 말을 들을까 봐 무섭다.
“마, 막내야.”
“이병, 강진호.”
“저 담요 말인데…….”
“예.”
“너무 각을 잡아놓지 않았니?”
베이겠다.
손이 닿으면 베일 것 같아.
“입대 전에 군대 물품들은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다고 배웠습니다.”
“요즘은 그런 시대가 아냐.”
전혁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괜히 이럴 때 간부라도 내무반 안에 들어오면 그가 애를 갈궈서 저리 각을 잡았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내무 부조리 때문에 군화도 무광으로 바뀌고 각 잡는 것도 금지되는 판에 이런 모습이 걸린다면 군장 하루 도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른 저거 좀 풀어라.”
“풀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저거 너무 심하잖아.”
강진호는 영 불만 어린 얼굴로 다가가 모포를 두어 번 두드렸다.
“으으.”
주변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그제야 숨이 좀 트인다는 듯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뭔 모포 보고 있는데 숨이 막히냐?”
“혁수야, 쟤 좀 어떻게 해봐라. 너 들어오기 전까지 허리 펴고 앉아 있는데…… 한 시간 동안 전면 보고 움직이지도 않더라. 나는 자는 줄 알았어.”
“……그렇습니까?”
전혁수는 눈앞에 보이는 노란 견장의 이등병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등병은 이등병.’
선임으로서 이등병의 군기를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 잘하니 체력도 자신 있겠지?”
“그렇습니다.”
“자신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전혁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비록 그가 프로 선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육상부로서 아마추어 대회까지 다니던 몸이다. 체력이라면 웬만한 운동선수급은 토가 나올 때까지 굴려줄 수 있었다.
“그래. 그럼 형이랑 연병장에 운동 좀 하러 갈까?”
“그래도 됩니까?”
강진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자대에 온 지 벌써 3일째건만 제대로 운동을 하지 못해서 그도 찌뿌드드하던 참이었다. 운공으로 몸을 유지, 단련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갑갑함은 해소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이리 운동을 시켜준다니, 불감청일지언정 고소원이었다.
“따라 나와. 형이 운동시켜 줄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전혁수는 빙긋 미소를 짓고는 밖으로 나갔다.
‘토하지나 마라.’
하지만 전혁수는 곧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흐어어어어.”
숨이 찬다.
숨이 너무 찬다.
숨이 턱 끝까지 올라와서 금방이라도 폐가 입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그만…….”
전혁수는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힘내십시오.”
빌어먹을 신병 놈이 어느새 또 한 바퀴를 추월해 그를 슬쩍 보고는 등을 두드려 주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저 미친놈.’
전혁수는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끄윽!”
결국 다리에 힘이 풀린 전혁수가 그 자리에 넘어졌다.
“혁수야, 괜찮냐!”
어느새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전혁수를 부축했다.
“물 마셔라! 물!”
“으아, 얘 손 떨리는 것 좀 봐.”
상황은 간단했다.
연병장으로 강진호를 데리고 나온 전혁수는 아주 간단한 제안을 했다.
그냥 운동을 하면 재미가 없으니 내기를 하자는, 어찌 보면 평범하고 어찌 보면 비겁한 제안이었다.
어리숙한 신병 놈은 숨겨진 전혁수의 의도를 알지도 못한 채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전혁수는 운동장 50바퀴를 먼저 도는 쪽이 이기는 걸로 하는 내기를 성립시켰다.
벌칙은 지는 쪽이 오늘 밤에 팔굽혀펴기 천 개를 하고 자는 것.
강진호는 두말없이 찬성을 했고, 전혁수는 그 광경을 보며 흐뭇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팔굽혀펴기를 하는 강진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다들 그렇게 선임들의 위엄을 느끼며 군대에 적응해 가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상황은 그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열 바퀴쯤 느긋하게 같이 달려준 그가 서서히 속도를 내는데도 강진호는 뒤처지지 않았다.
스무 바퀴가 지나서 속도를 많이 올렸는데도 강진호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이 새끼, 어디서 운동 좀 했나?’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강진호가 나직하게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 좀 달려도 되겠습니까?”
“뭐?”
동공에 지진이 난 전혁수가 신체 각지로 지진 문자를 보내기도 전에 강진호가 속도를 내더니, 저 앞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독립 중대라 연병장이 작은 편이라고는 해도 이 연병장을 한 바퀴 돌면 300m 가까이 된다.
300m가 20바퀴면 그것만으로도 6,000m다. 6킬로란 말이다.
육상 선수였던 전혁수와 같은 속도로 6㎞를 달리고도 지금껏 맞춰줬다는 양 갑자기 속도를 내며 앞으로 뛰쳐나가는 신병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전혁수는 어쩌면 강진호와 내기를 한 것이 실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익!”
하지만 사람에게는 자존심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동기와 뛰면서 이런 꼴을 당했어도 자존심이 상할 텐데, 동기가 아닌 후임과, 그것도 신병과 달리면서 이런 꼴을 당하는데 선임으로서 페이스를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게 두 번째 실수였다.
전력으로 달려 강진호를 따라잡았지만, 강진호는 전혁수를 힐끗 바라보더니 다시 속도를 내 달리기 시작했다.
잡으려고 하면 멀어지고, 잡으려고 하면 또 멀어지는 강진호의 페이스 조절에 전혁수는 속수무책이었다.
“으아아아.”
죽도록 달려서 어떻게, 어떻게 따라가기는 했지만 30바퀴가 넘는 순간 하늘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강진호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전혁수를 세 번 정도 추월하고야 말았다.
결국 바닥에 쓰러진 전혁수는 선임들이 흘려 넣어주는 물을 마시면서 거친 숨을 토해냈다.
“저, 저 미친…….”
“와, 저 신병 장난 아니네.”
“나는 무슨 터미네이터가 달리는 줄 알았어.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 변화도 없어.”
“저 봐, 저. 힘들지도 않나 봐. 뛰어오는 거 봐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한 바퀴를 더 돈 강진호가 전혁수가 쓰러져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
눈이 있으면 안 괜찮다는 것을 알지 않나?
전혁수는 소리라도 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목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입을 떼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괘, 괜찮다.”
당장에라도 의무실로 가고 싶었지만, 선임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오늘…… 컨디션이 나빴던 모양이다. 감기 기운이 있다 싶더니.”
“아, 그렇군요.”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기는 없던 걸로 하시고, 다음에 다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공정하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그, 그럴래?”
“예. 그럼 저는 마저 뛰고 오겠습니다.”
“응?”
말을 마친 강진호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전혁수는 힘없이 뇌까렸다.
“내기는 얼어 죽을.”
다시는 강진호와 내기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전혁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