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40
#939.
내리밟다 (4)
강진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현수가 슬쩍 강진호의 눈치를 봤다. 강진호는 여러 상황에서 미소를 짓는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흥미가 있을 때, 그리고 상대에 대한 살의를 강하게 느낄 때다.
‘어느 쪽이지?’
그럼 이번에는 어느 쪽일까?
강진호의 표정을 자세히 살핀 이현수가 조금 안심했다.
다른 사람은 구분할 수 없는 미묘한 차이겠지만, 이현수는 이제 강진호의 표정을 구분할 줄 안다. 지금 강진호는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다행이다.’
여기서 강진호가 화가 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너무도 뻔했다. 그나마 강진호가 화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 이현수였다.
강진호가 조금 앞으로 당겨 앉는다.
“그래서.”
강진호가 마스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직접 본 소감은 어떻지? 죽여야 할 것 같나?”
마스터 역시 지지 않았다.
“고민 중입니다.”
“마음먹으면 죽일 수는 있고?”
“그것 역시 고민 중입니다.
강진호의 미소가 짙어진다.
“재미있군.”
의자에 등을 기댄 강진호가 담배를 비벼 끄고는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판단을 하려면 근거가 있어야겠지. 그럼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마스터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몰아붙이는 강진호를 밀어내기 위해 그도 도발을 했다. 하지만 그의 도발은 강진호를 조금도 격동시키지 못했다.
‘생각한 것과 또 다르군.’
강진호는 패왕이다.
기본적으로 저런 타입은 자신에 대한 도발을 참지 않는다. 하지만 강진호는 지금 마스터의 도발을 부드럽게 받아 넘기고 있었다.
이유가 있으면 두 가지 중 하나다.
하나는 강진호가 지금까지 마스터가 알고 있던 독재자들의 유형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던가, 그게 아니면…….
‘같잖다는 거겠지.’
토끼가 도발을 한다고 화를 내는 범은 없다. 짜증은 낼 수 있을지언정 진심으로 분노하지는 않는다. 지금 강진호가 마스터를 자신의 앞에서 뛰노는 토끼처럼 여긴다면 화를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스터는 지금 강진호는 후자 쪽에 가깝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헛웃음이 난다.
그가 누구인가?
원탁의 마스터다.
그가 가진 지위를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유럽에서 그 이상 가는 무인은 셋을 넘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런데 안중에도 없다는 말인가.
오만하다.
더없이 오만하다.
다른 이가 이런 반응을 보였다면 마스터는 참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원탁을 무시하고, 그를 무시한 대가를 철저히 치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마스터는 딱히 반발하고 있지 않았다.
힘이 없어서?
아니다.
‘묘하게 거슬리지가 않는군.’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이었다.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습격한다고 해서 그게 잘못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처럼 이 사내의 오만도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렇기에 딱히 모욕을 받았다던가, 치욕스럽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라.”
마스터도 자세를 조금 편안히 바꿨다.
이 회담이 그가 예상했던 그런 회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이건 국가와 국가의 회담이 아니다. 수장과 수장의 회담도 아니었다.
이건 강진호라는 인간과 마스터가 부딪히는 자리였다.
“조금 돌아가 보고 싶은 생각이었지만, 그리 나오시니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나가겠습니다.”
“좋지.”
강진호가 씨익 웃는다.
그 미소를 본 마스터는 강진호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단순히 강압적인 사람은 아니다.
자신이 예의를 차리지 않는 만큼 다른 이들에게 예의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권위적이진 않다는 뜻이었다.
‘참 기묘한 타입이군.’
가지고 있는 압력과 존재감이라면 일방적인 예의를 요구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데, 상대에게는 예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가만히 대화를 돌이켜 보면 심각할 정도로 담백한 타입이었다.
‘과연.’
조금 전부터 대화가 과열되고 있음에도 위긴스가 전혀 말릴 생각이 없는 점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지금 시비를 걸고 있는 게 아니다.
원래 대화하는 방식이 이런 사람이다.
군더더기를 모두 뺀 핵심을 지르는 타입.
평범한 대화에 익숙해진 사람은 이런 대화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스터는 오히려 시원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군.’
회담이라는 건 칼을 들지 않은 전쟁터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짐작하며 최대한의 이득을 만들기 위해 온갖 수작질을 하고, 계략을 부린다.
그가 해온 회담이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아니, 회담뿐이 아니다.
원탁 역시 마찬가지다.
원탁이 아무리 대표성을 가지는 의결기관이라고는 하지만, 그 안에 각 국가와 무인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서로 체면을 차리면서도 자신의 국가에 최대한의 이득을 가져올 방법으로 결론짓기 위해 치열하게 맞붙는다.
원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결국 회담과 회의라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 회담은 달랐다.
강진호가 이리 나오자 마스터도 방법을 조금은 달리하고 싶어졌다.
“묻기 전에 먼저 몇 가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해봐.”
“지금 총회와 회주님의 존재 때문에 동아시아가 뒤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강진호는 대답하지 않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부정이 아니다.
뻔한 이야기니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눈치였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하나입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찰칵.
강진호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낸 강진호가 조금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마스터를 바라본다.
“질문이 그건가?”
“예. 조금 어려운가요?”
“아니. 너무 쉬워서 어이가 없군.”
강진호가 쿡쿡 웃고는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조금 뜸을 들인다.
분위기가 살짝 고조되고,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강진호가 서두르지 않으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평화.”
“…….”
마스터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평화.
좋은 말이다.
하지만 저 강진호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조롱인가?’
아니다.
웃음기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저 웃음은 비웃음이 아니었다. 지금 강진호는 진심으로 평화라는 대답을 내어놓은 것이다.
“평화라고 하셨습니까?”
“통역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도 아닐 테고, 평화라는 개념이 어려운 것도 아닐 텐데.”
강진호가 가만히 마스터를 보며 말했다.
“듣고도 되묻는 이유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마스터가 슬쩍 고개를 들어 위긴스와 이현수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미동이 없었다.
‘강진호의 입에서 평화라는 말이 나온 게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로군.’
그렇다면 저 대답이 그동안 강진호가 해온 일들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뜻인데…….
너무도 이상하지 않은가.
강진호의 존재 자체가 평화를 해치고 있다.
동아시아의 상황을 지켜봐 온 이라면 강진호가 행한 일련의 일들이 동아시아를 세계의 폭탄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강진호의 등장 이전까지는 동아시아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 균형을 무너뜨리고 동아시아를 긴장 상태로 몰아넣은 이가 평화를 논하다니.
“회주님께서 지금까지 한 일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그래?”
“예.”
마스터가 가라앉은 눈으로 강진호를 보며 말했다.
“회주님은 총회를 찬탈했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충돌했죠. 일본과도 충돌했습니다. 그 결과, 동아시아 삼국을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의 목적이 평화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가 잘못됐지?”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평화롭지 않은가?”
“……예?”
“지금 동아시아는 평화롭지 않냐고.”
“…….”
가면 속 마스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강진호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멍청한 말을 늘어놓는다는 말인가.
“나는 지금의 한반도가 예전에 비하면 몇 배는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하는데?”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여 강진호의 말에 동의를 표한다.
“지금 이 상태가 말입니까?”
마스터가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왜 이런 설명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한국은 조금도 평화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도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지 않았습니까? 일본과 중국이 호시탐탐 한국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마저 위에 자리하고 있잖습니까?”
마스터의 말은 타당했다.
하지만 강진호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가 다른가?”
“예?”
“그게 내가 등장하고 벌어진 일인가?”
“…….”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한국이 그런 상황이었던 것은 수십 년 동안 마찬가지였다. 너희가 말하는 그 절묘한 밸런스 덕에 지금까지는 표면화되지 않았을 뿐이지. 그런데 말이야…….”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게 누굴 위한 평화지?”
마스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호랑이와 사자의 영역 사이에 떨어진 토끼가 평화롭다고 할 수 있나? 강대국이 서로를 견제하고,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만들어둔 완충지대에 자리하고 있어서 얻어걸린 평화를 평화라 믿고 눈을 가리라는 말인가?”
“…….”
“웃기지도 않는군.”
으르렁댄다.
강진호의 목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너희는 그딴 걸 평화라고 부르는 모양이군. 하지만 나는 아니야. 그딴 걸 평화라고 하지는 않지. 평화라는 건 전쟁이 있는가, 없는가로 결정되지 않아. 진짜 평화는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을 갖췄을 때, 얻어낼 수 있는 거지.”
강진호가 마스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
가라앉아 이글대는 듯한 그 눈을 보고 있으니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종잡을 수가 없군.’
강진호가 이 곳에 들어와 앉은 지 이제 채 오 분이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새, 강진호에 대한 마스터의 평가는 몇 번이고 달라지고 있었다.
이 사람은 오만하다. 하지만 또한 소탈하다. 그리고…….
‘냉철해.’
인정해야 한다.
단순히 힘만을 내세우는 압제자가 아니다. 그가 전형적인 머리를 쓰는 모사 타입은 아닐지 모르지만, 핵심을 집고 있고, 그 핵심을 놓지 않는 눈이 있었다.
게다가 그 실행력마저 이미 증명되지 않았는가.
그 모든 사실은 단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위험해.’
이자는 너무도 위험하다.
독재자는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다. 극단적인 사상가도 세상에는 넘쳐난다.
진정한 위험이라는 것은 확고부동한 이상과 그 이상을 관철한 힘이 합쳐졌을 때 만들어진다.
강진호에게는 그 두 가지가 모두 있었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한 이상. 그리고 그 이상을 관철할 수 있는 힘.
마스터는 알고 있다. 어설픈 독재자나 광인은 작은 사고를 만든다. 하지만 힘과 이상을 동시에 갖춘 이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법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이상과 권력, 그리고 군사력이 합쳐졌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세계는 이미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자는 너무도 위험해.’
마스터가 단호한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