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48
#947.
호응하다 (2)
아이가 있다.
작은 아이.
그는 가만히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한 속에는 작은 목검이 들려 있었고, 반대편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그건 무리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누군가가 아이의 손에 들린 목검과 지팡이를 뺏으려 들었다. 하지만 아이는 조막만 한 손을 휘저으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아이의 손에 들린 무기를 뺏으려던 이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
마지막으로 남은 형체가 아이에게 물었다.
―어려울 텐데.
―네가 가야할 길은 너무도 험난하다.
―쉬운 길도 있다. 그런데 왜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는 거냐?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너무도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웃는다.
“그게 멋져 보이니까.”
눈이 따끔하다.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천천히 돌아오는 의식.
처음으로 느낀 것은 뻐근함이었다. 몸의 관절 하나하나가 어긋나 있는 듯한 느낌.
‘끔찍하군.’
아직 살아 있다는 기쁨보다 육체가 내지르는 비명이 더욱 명확하게 그의 의식으로 침투했다.
“깨어나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다.
“……깨어난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군.”
“그렇게까지 말할 거리도 아닙니다. 그저 의식을 잠시 잃었을 분이니까요.”
“그런 것 치고는……. 몸이 산산이 부서진 느낌인데.”
눈가를 두어 번 주무른 마스터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조금의 익숙함.
‘호텔인가?’
그가 묵었던 호텔 방인 모양이다.
병실이나 총회에서 깨어나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런 몰골을 여기저기에 내보인다는 것은 꽤나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니까.
‘확실히 이런 일 처리를 보면 아깝다는 말이야.’
마스터의 시선이 위긴스를 쫓았다.
“조심하십시오. 아직은 몸이 멀쩡하지 않으실 테니까.”
“의식을 잠깐 잃은 것뿐이라더니, 말이 달라지는군,”
“마공이라는 게 그렇다더군요. 마기가 육체를 파고들게 되면 외상이 아니라 내상이 남는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한다고 해도 딱히 이상이 발생하지는 않지만, 기운이 쇠해서 죽어가게 되는 법이죠.”
“……내가 지금 죽어가는 중이라는 뜻인가?”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마기가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로드께서는 그렇게 느긋하게 사람을 죽일 성격은 못 되시는 분이라.”
죽일 마음이었으면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깨버렸겠지.
위긴스는 이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굳이 할 필요는 없는 말이다.
마스터 역시 자신이 강진호의 자비로 살아났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그런 점을 지적하는 것은 좋지 못했다.
“그렇군. 그래, 그럼 내가 졌다는 말이군.”
“새삼스러운 말이군요.”
위긴스가 빙그레 웃었다.
“마스터께서도 승리를 예상하지는 않으셨잖습니까?”
“모르는 소리.”
마스터가 이불을 들쳐 내었다. 조금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 마스터가 소파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승부라는 건 어찌될지 모르는 걸세.”
“음.”
“천 번을 싸워 단 한 번을 이길 확률. 그게 아니라면 일억 번을 싸워 단 한 번 이길 확률. 그 미약한 확률이 바로 오늘, 바로 이 순간 벌어질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세상에는 기적이 종종 일어나지. 그 기적의 순간이 이번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위긴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 같지만 억지가 아니다.
“전력에서 뒤진다고 패배부터 바라보는 것은 무인의 자세로는 바르지 못하지. 거꾸로 말하자면 천 번을 싸워 구백구십아홉 번을 이길 수 있는 상대와 싸우더라도 한 치의 방심조차 하지 않아야 무인이라 할 수 있는 걸세.”
위긴스는 진정으로 감탄했다.
뻔한 말이다.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이는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을 자신의 행동을 행할 수 있는 이는 세상을 다 뒤져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럼 승리할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그건 아니야.”
“……예?”
마스터가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조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 백 번 싸우면 한 번은 이길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했으니까. 백 번 중의 한 번이라면 기합으로 어떻게 할 수 있지 않겠나……. 뭐 그런 느낌?”
“기합이요?”
멍한 위긴스의 물음에 마스터가 고소를 머금었다.
“사람이란 한 번씩 변덕을 부려보고 싶어지는 법이지.”
“다른 사람들이야 그렇지만, 마스터만은 그렇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나는 뭐 사람이 아니던가?”
그 말도 맞다.
하지만 뭐라고 할까.
위긴스에게 있어서 마스터는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 마스터의 이런 발언을 그에 대한 새로운 면을 보았다는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게 아니라면 원치 않는 모습을 보게 된 실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결론은 그의 안이 아니라, 마스터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마스터의 얼굴에서는 한 점의 의혹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개운해 보이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스터의 행동에서 의혹을 찾으려 하던 위긴스가 되레 부끄러워진다.
“패배를 매우 편히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나?”
“예.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전히 자네는 사람을 보는 눈이 없구만.”
“……예?”
위긴스가 커피를 따라 마스터의 앞에 내려놓았다.
손을 뻗어 커피를 든 마스터가 천천히 그 향을 음미한다. 흐릿한 의식을 깨우는 데는 커피 향만 한 게 없다.
“담담히?”
마스터가 빙그레 웃었다.
“나는 지금 속이 불타는 중이라네.”
“…….”
“패배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건 무인이 아니겠지. 이보게, 위긴스.”
“예, 마스터.”
“내 생애에 패배가 몇 번이나 있었을 것 같나?”
“…….”
거의 없었을 것이다.
마스터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가장 위대한 무인 중 하나였다.
“몇 번은 있었지. 그래, 몇 번이나 있었어. 하지만 그 몇 번의 패배는 나를 패배에 익숙해지게 만들지 못했다네. 지금 나는 여전히 생소한 분노와 마주하고 있다는 말이지.”
마스터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즐겁다네. 내게도 아직 이런 열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패배하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 나는 되레 실망했을 거야.”
“마스터.”
위긴스가 마스터의 건너편에 앉았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 나직한 목소리에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든지.”
살짝 심호흡을 한 위긴스가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신 겁니까?”
“…….”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마스터는 위긴스의 질문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글쎄. 왜 그랬을까.”
하지만 질문을 이해했다고 답변이 바로 나오는 건 아니다.
“모르겠군.”
그리 길지 않은 고민 끝에 나온 대답은 위긴스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대답할 거리는 여러 가지가 있지.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완벽한 답변이 될 수는 없을 것 같군.”
“…….”
“이보게, 위긴스.”
“예, 마스터.”
“자네도, 나도 잊고 있었던 것 같군.”
“무엇을?”
“내가 사람이라는 걸 말이야.”
“…….”
위긴스가 입을 닫았다.
그 말이 위긴스를 명확하게 찔러온다.
“사람이란 그런 것이지. 그 누구도 사람의 선택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지.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를 분석하는 학문이 존재하지 않는가. 세계의 석학들이 수백 년간을 노력해도 아직 인간의 선택과 사고는 전혀 밝혀진 바가 없지.”
“예.”
“그런데 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지.”
마스터가 쿡쿡 웃었다.
“사실은 모르는 거지. 다른 이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전혀 몰라. 심지어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는 게 사람이란 말이야.”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왜 그러셨는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도 알고 싶네.”
마스터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가 강진호와 맞붙은 것은 꽤나 성급한 일이었다. 원탁의 마스터라는 지위에서는 결코 나와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하지만 마스터는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면서도 강진호와 맞붙은 쪽을 택했다.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호승심, 이해득실, 그리고…….
‘질투.’
떠오르는 젊은 태양에게는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그런 이들에게 질투를 느끼기에 마스터는 이미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젊은 태양이 떠오른다면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강진호는 다르다.
그는 젊지 않다. 마스터 역시 한때는 강진호처럼 하늘에 찬란히 빛나던 태양이었다. 그때였다면 마스터는 강진호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마스터는 지고 있다. 하지만 강진호는 여전히 하늘에서 찬란히 빛난다.
그렇기에 질투가 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질투조차도 그의 행동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어쩌면 나는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을 바꿔줄 탈출구를 말이다.
“그래서…….”
위긴스가 가만히 물었다.
“마음은 좀 편해지셨습니까?”
마스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이래서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마스터가 왜 그랬는지 위긴스는 모른다. 아마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은 명확하게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얻어터진 놈에게 편해졌냐고 묻다니, 자네도 좀 심한 면이 있군.”
“살다보니 알게 된 겁니다만.”
“음?”
“때로는 어설픈 승리보다 완벽한 패배가 속 시원할 때도 있더군요.”
“하…….”
마스터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위긴스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래. 그럴 수도 있겠어.”
마스터의 손가락이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위긴스는 마스터가 생각을 정리할 동안 가만히 기다렸다.
“자, 그럼.”
“예.”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보게나.”
“…….”
마스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안부나 나누자고 지금까지 기다린 건 아닐 테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
“마스터, 저는…….”
“이보게, 위긴스.”
위긴스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며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나를 너무 잘 알지. 그리고 나도 자네를 너무 잘 아네. 그러니 서로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끌지 말자고. 서로 바쁜 몸이 아닌가?”
“……예, 마스터.”
낮게 한숨을 쉰 위긴스가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건 하나입니다.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어쩐다라…….”
모호한 질문이다.
하지만 모호함 속에 핵심이 있다. 이 질문은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한국을 어찌 대할 것인지를 대답하란 뜻이다.
“혹여 내가 부정적인 답변을 하게 되면 어쩔 셈인가?”
“마스터.”
위긴스가 가만히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셨듯이 저는 마스터를 너무 잘 압니다. 마스터가 개인으로 움직이는 것과 원탁을 움직이는 건 전혀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흠.”
“원탁을 움직인다면 마스터께서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동원하시겠죠.”
“그렇겠지.”
“마스터가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딱히 다를 것은 없지요. 저는…….”
위긴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마스터가 없는 원탁을 상대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공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