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53
#952.
협의하다 (2)
마스터의 표정이 묘해진다.
‘같은 사람인가?’
지금까지 마스터는 강진호를 세 번 보았다.
한번은 공항의 라운지에서, 그리도 또 한 번은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리고 마지막은 이전의 회담에서였다.
세 번 강진호를 만났지만, 세 번 다 느낌이 달랐다.
첫 번째로 강진호를 봤을 때는, 그 무지막지한 기운과 어울리지 않는 겉모습에 놀랐고, 두 번째로 강진호를 스쳤을 때는 그의 한없는 자유로움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강진호를 보았을 때는 지금까지 그가 생각하고 예측한 것을 모두 부숴 버리는 강진호의 힘과 과감성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호록.
커피를 입에 댄 강진호가 살짝 눈을 찌푸린다.
“커피가 영 별로군.”
“호텔에 비치된 메이커로 내린 커피라…….”
변명하듯 말하는 위긴스를 보며 강진호가 미간을 좁혔다.
“총회로 한 번 초대를 해드려야겠군. 이게 한국의 커피 맛이라 생각하고 돌아가면 조금 억울하니까.”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로드.”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강진호를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그가 봤던 강진호는 대체 뭐였는가 싶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모습이 공존할 수 있나?’
위긴스가 강진호를 설명하기 어려워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마스터만 해도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누군가가 강진호가 어떤 이였는지를 묻는다면 설명하기가 난해할 테니까.
다중인격자 같은 건 아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상대하는 데는 좀 더 난감하다. 그날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서 성격이 휙휙 바뀌는 느낌이니까.
“그래서.”
커피 잔을 내려놓은 강진호가 마스터를 정확하게 응시했다.
“부른 이유는?”
말투 자체는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감에서 전과 같은 날카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변화를 확인한 마스터가 살짝 눈을 돌려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위긴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느낀 게 맞다는 뜻.
그렇다면…….
“회담을 마무리 짓고 싶어서입니다.”
“회담이라. 더 논의할 내용이 있나?”
“무인 강진호와 제가 해야 할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검을 나눠보면 알 수 있는 법이죠. 상대가 어떤 이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강진호는 딱히 대답 없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 강진호라면 여기서 살짝 비틀린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위긴스는 상대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유지하는 게 친인이 아닌 사람과 대화할 때 강진호가 가지는 버릇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강진호의 미소에서는 비웃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
“담배 한 대 괜찮을까?”
“얼마든지.”
강진호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천천히 연기를 뿜어내는 강진호를 보며 마스터가 살짝 말을 돌렸다.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영어가 능숙하시군요.”
“배웠으니까.”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한국에서는 영어가 필수 교과과정이지. 그러니 나름 배웠어.”
“일상적인 대화는 가능할 수준으로 보이는데, 굳이 통역을 대동할 필요가?”
“머릿속에서 딜레이되는 느낌을 선호하지 않지. 말은 직관적이어야 하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낸 강진호가 마스터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원탁과 총회의 관계라고 했나?”
“예.”
“말해봐. 원하는 게 뭐지?”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렇다고 강진호가 크게 변한 것은 아니다. 조금 더 전향적일 뿐,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그의 스타일은 바뀌지 않았다.
“회주께서는 제게 힘을 가지고 있어야 평화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는 변함이 없습니까?”
“그렇지.”
“확신하십니까?”
“네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
강진호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이 미소는 확실한 비웃음이었다.
“내가 네게 패했다면 이런 자리는 만들어지지 않았겠지. 너는 좋을 대로 한국을 재단하고,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 했을 거야. 그렇지 않나?”
“……부정하기 힘들군요.”
“그래서 힘이 필요하지. 어때? 이 자리는 대화를 하는 자리지만, 이 대화의 자리를 만들어낸 것은 내가 가진 힘이지.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부정한다면 더 할 말이 없지.”
마스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강진호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은 그도 인정한다. 다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할 뿐.
“그렇다면 좋습니다. 회주님의 의지 역시 틀리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겠습니다.”
“흠.”
강진호가 가라앉은 눈으로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위긴스도 살짝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나쁘지 않아.’
생각 이상으로 분위기가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 회담이 좋은 결과를 내기를 바라는 건, 단순히 마스터에게 가지는 호감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 총회는 고립되어 있다. 거리가 있어 실질적인 전력이 되기가 어렵다고 해도, 외부에 우방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 차이다.
총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여기서는 좋은 결론을 끌어내야 한다.
“대한민국, 그리고 총회가 나름의 지론을 가지고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총회의 발전이 동아시아의 균형을 흔들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역시 인정합니다.”
마스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어렵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총회가 좀 더 성장해서 일본과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상황이 최선이라는 것 역시 인정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위긴스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여기까지 인정한다는 것은 마스터가 총회의 성장을 더 이상 견제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말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해서 한국의 성장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지원이 이어질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파격적인데?’
형식적인 불가침을 맺고 은연중에 도움을 주는 수준이어도 대만족이다. 그런데 마스터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고 있었다. 이건 동맹의 신호다.
‘이리 급격하게 풀린다고?’
그럴 리가 없다.
위긴스의 냉철한 이성이 마스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가 아는 마스터는 절대로 이리 멍청한 딜을 할 사람이 아니다. 진짜는 이제 나온다.
“동아시아의 안정과 양 회의 관계를 위해서 총회를 지원할 의사도 있습니다. 그 지원은 경제적인 지원과 인력적 지원, 그리고 정보적 지원을 포함할 것입니다. 물론, 동맹이 성사된다면 말이지요.”
거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이제 위긴스는 더 이상 웃지 못했다.
내놓은 매물이 크다면 그 값은 당연히 비싸기 마련이다. 마스터가 이 매물의 대가로 대체 뭘 가져가려 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다했으면 본론을 말하지.”
그리고 강진호도 이 모든 게 그냥 주어질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조건은 아주 간단합니다.”
마스터가 강진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회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지켜주시면 됩니다. 그 하나면 충분하죠.”
“내가 한 말?”
“예. 평화를 원하신다는 말.”
마스터가 빙그레 웃었다.
“평화를 위해서 힘을 원하신다면 굳이 그 힘을 외부로 돌릴 필요가 없지요. 힘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평화는 자연히 따라올 테니까요.”
강진호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을 말해.”
“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여기서 회주님이 타국을 침공하지 않겠다는 서약만 해주시면 원탁은 전력을 다해 한국을 지원할 것이라 약속드립니다.”
위긴스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거?’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찔러들어 올 줄이야.
듣고 나니 알 수 있다. 이건 원탁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한 수다. 아니, 어쩌면 최고의 한 수일지도 모른다.
설사 원탁이 한국을 정화하고, 공동으로 만든다고 해도 동아시아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비어버린 한국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어설픈 공동화가 일본과 중국을 모두 한반도로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
그럼 원탁은 어쩔 수 없이 막대한 전력을 한국에 주둔시켜야 한다. 어설픈 각오로는 중국도, 일본도 한국으로 밀고 들어올 수 없을 만한 전력을.
그건 어마어마한 비용과 전력이 소모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 효용성도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한국이 이대로 성장한다면, 원탁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성장한다면 전력을 조금도 소모하지 않고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다.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으로 쳐들어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렇게 되면 동아시아 삼국은 한동안은 강제적인 평화에 돌입한다. 한국이 얼마나 강해지느냐에 따라서 그 기간이 더 길어진다.
‘처음부터 이걸 생각하고 오신 건가?’
위긴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좋은 한 수다.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한 수다. 마스터가 그 자리를 포커로 따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금 여기서 증명하고 있었다.
총회는 이걸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총회는 애초에 타국을 침공할 생각이 딱히 없다. 선제공격은 언제나 고려의 대상이지만, 그 이유는 과하게 팽창한 타국에서 쳐들어올 확률을 줄이고 전장을 한국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지, 타국을 손에 넣어 이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선제공격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원탁의 지원이 크다면 굳이 선제공격을 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 하나만 더해진다면…….
“물론 거기까지 하고 손을 떼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원탁은 앞으로 타국이 한국을 침공하는 순간 동맹으로 참전할 것입니다. 그 상대가 어떤 나라든!”
그 하나가 더해졌다.
원탁의 참전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게다가 마스터의 성향상 생색만 내는 수준의 참전은 없다. 필요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의 전력이 한반도에 투입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이다.
이런 조건을 내밀 이유가 과연 있는가, 의심이 될 정도의 조건이었다.
위긴스라면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이 조건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마스터가 발을 빼지 못하게 만드는데 할애할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무리 강진호라고 해도 이만한 조건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상식적으로 보기에.
“후우…….”
강진호가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그리고는 마스터를 가만히 보며 빙그레 웃었다.
“혹시 영국에 한국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이 있나?”
“……예?”
“잘 모른다면 비서라도 시켜서 하나 알아보지. 선물해야 할 테니까.”
영문을 모른 마스터와 위긴스가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입에 담배를 문 강진호가 소파에 등을 기댄다.
그리고 위긴스는 그 순간 알아챘다.
서늘함.
조금 전까지는 강진호에게 없었던 서늘함이 느껴진다.
입에 문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강진호가 살짝 숙인 자세 그대로 마스터를 노려보았다.
“내가 오늘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지금쯤 너는 살아있는 목숨이 아닐 테니까. 목숨을 살려준 대가로 선물 하나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지 않아?”
“…….”
할 말을 잃은 마스터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순간 강진호가 이를 드러냈다.
“좋게 봐주니 끝을 모르는군. 어디 한 번 더 지껄여 봐. 차라리 죽는 게 났다는 생각을 하게 해줄 테니까.”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의 살기가 마스터의 심장을 틀어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