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54
#953.
협의하다 (3)
“로, 로드!”
강진호가 마스터를 압박하는 모습을 본 위긴스가 기겁을 하여 소리쳤다.
마스터는 지금 마나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다. 기를 다루지 못하는 무인은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다. 노쇠한 마스터가 강진호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는다면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위긴스의 다급한 외침을 들은 강진호가 살기를 거뒀다.
“흠.”
강진호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미안하군. 고려하지 못했다.”
“아니, 아닙니다.”
마스터가 헛기침을 하면서도 고개를 젓는다.
무인이 결투에서 패배하여 상처를 입었다면 그 후유증마저 감내해야 한다. 내가 패해서 부상을 입었으니 나를 배려해 달라고 하는 건 꼴사납기 그지없는 짓이다.
“쿨럭! 쿨럭!”
마스터가 연신 헛기침을 하자 위긴스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스터에게 내밀었다.
“고맙군.”
“아닙니다.”
겉으로 보면 노인 학대나 다름없는 짓이다. 실제로는 강진호가 마스터보다 연상이기는 하지만.
물을 들이켠 마스터가 테이블 위에 물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입가를 쓱 문질러 닦고 다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강진호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런 마스터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
“저는 제가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이 이상의 조건은 어디에서도 제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조건이라고 했나?”
“예.”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강진호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그 조건을 받아들이고 지키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무인계의 거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법이지요.”
마스터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한 번 강진호의 기세에 무방비로 눌리는 경험을 했음에도 그는 조금도 겁을 먹지 않은 듯했다.
‘과연 마스터시군.’
위긴스는 그런 마스터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진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마스터를 죽일 수 있다곤 해도, 그걸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다.
마스터는 지금 몸으로 그 사실을 경험하고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위긴스는 결코 닿을 수 없는 평정심. 이러니 마스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신뢰라고 했나?”
“예. 신뢰입니다.”
“나를 신뢰할 수 있다는 건가?”
“예. 저는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어째서?”
마스터가 빙그레 웃었다.
“회주님에게는 확고한 의지가 있기 때문이죠.”
“…….”
“정확하게 말하자면 회주님을 신뢰하는 게 아닙니다. 회주님이 가려 하는 방향과 원탁이 가려 하는 방향이 일치한다면 굳이 서로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나와는 관계없이?”
“관계가 없다고는 못하겠군요.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회주님에게 가지는 신뢰란 건 조금은 감정적인 부분이라 설명 드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든다.
“신뢰, 신뢰라. 그건 좋은 말이지.”
강진호의 입가에 웃음이 맺힌다. 하지만 위긴스는 저 웃음이 절대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잘도 지껄인단 말이야.”
“……예?”
“오만하기 짝이 없군. 나보다 더 오만한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위긴스는 여기에서 강진호가 스스로 오만하다는 자각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하필 이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제가 뭔가 실수한 게 있습니까?”
마스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조금 전부터 강진호의 반응을 도무지 짐작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 신뢰라는 게, 왜 네 쪽에서만 충족되어야 하지?”
“…….”
마스터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너를 신뢰할 어떤 이유도 없는데 말이야. 거래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닌가? 제시하는 쪽에서 자신의 신뢰를 입증해야 하는 법이지. 그런데 너는 내가 너를 믿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굴고 있군.”
마스터의 눈이 떨렸다.
그리고 위긴스조차 아차 했다.
맞는 말이다.
이 대화가 시작된 이후로 마스터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그 약속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를 증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원탁의 마스터인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를 의심하려 들지 않았다. 원탁이란, 그리고 마스터란 그런 존재니까.
강진호는 지금 그것을 지적하는 중이었다.
이건 그저 지적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원탁이, 그리고 마스터가 가지는 권위가 여기에서는 먹히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그 선언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마스터를 찌른다.
서로를 증명한다.
그건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마스터는 강진호를 인정했음에도, 스스로 강진호와 대등한 위치까지 내려오지는 못했다. 강진호는 그 사실을 지적하고, 지금 마스터에게 눈높이를 맞추라 말하는 중이다.
“조금 무례했습니다.”
그리고 마스터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은연중에 강진호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그는 원탁이 가지는 권위에 너무 젖어 있었을 뿐이다.
강진호가 가만히 마스터를 바라본다.
그 눈빛이 주는 무거움에 마스터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렇게까지 긴장되는 협의가 있었던가?’
적어도 그의 기억 안에서는 없다.
거물이라 불리는 이들을 수도 없이 만나보았지만, 지금의 강진호처럼 그를 몰아붙이는 이는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강진호는 어려운 상대였다.
과격하고, 제멋대로다. 그러는 와중에도 핵심을 찔러온다. 거래의 대상으로 삼기에 이보다 어려운 이는 없을 것이다.
“하나 그 무례가 회주님을 무시해서는 아니라는 걸 알아주십시오. 조금 안일했을 뿐입니다.”
“조금이 아니겠지.”
“…….”
강진호가 고개를 돌려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에게 듣기로는 원탁이라는 곳은 결국 마스터와 나이트가 동등함을 가지고 함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곳이다.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로드.”
강진호가 다시 마스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여기서 묻지. 네게 그 모든 것을 결정할 권한이 있나?”
“…….”
마스터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물론, 원탁은…….”
마스터가 말을 더듬는다. 웬만해서는 없었던 일이다. 마스터의 침묵이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물론, 저에게는 그 모든 것을 직권으로 처리할 만한 권한은 없습니다. 하지만 원탁에서 제 발언력은 그 어떤 나이트보다 높습니다. 회주님께서 제게 동의해 주신다면……. 저는 마스터의 권한으로 이 안건을 반드시 통과시키겠습니다.”
강진호는 대답 없이 담배 한 대를 더 빼물었다.
그리고는 불을 붙이고 천천히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낮게 흩어진다.
“그게 너희가 거래를 하는 방식인가?”
“…….”
“좋을 대로 지껄이고, 보장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이쪽에서 모든 것을 양보한다면 나름의 노력은 해보겠다?”
“저는…….”
“그게 실패하면?”
마스터가 입을 닫았다.
“‘노력은 했지만 실패해 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를 면피로 사용할 셈인가?”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마스터가 가만히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이 일이 세계와 동아시아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제 생명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넌 네 목숨 값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
“하지만 난 아니야.”
강진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위긴스가 앞 쪽으로 바짝 붙었다.
“위긴스.”
“예, 로드.”
“이자가 원탁으로 돌아갈 시 자신이 공언한 일을 성공시킬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위긴스가 마스터를 살짝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조금 고민의 시간이 지나가고 위긴스가 입을 열었다.
“저는 10% 이하로 봅니다.”
“위긴스!”
마스터가 위긴스를 불렀지만, 위긴스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과거의 마스터라면 가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의 마스터는 과거만큼의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유는?”
“저 때문이겠죠.”
위긴스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마스터는 저를 총애했습니다. 스스로는 중도를 지키는 선에서 살짝 밀어줬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이트들은 민감합니다. 모든 것이 평등하고 공평해야 하는 원탁에서는 그 작은 차이가 큰 위화감을 나을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겠지.”
“마스터가 거래하려는 상대가 총회가 아니었다면 또 달랐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몸을 담은 총회를 전적으로 밀어주는 거래를 시도한다면 나이트들은 마스터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것입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긴스는 배신자다.
누군가 먼저 나서서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을 뿐, 그 어떤 조직에서도 배신자를 내버려 두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내버려 두는 것도 아니고, 그 죄를 묻어주고, 지원까지 한다?
아무리 그 지원이 위긴스가 아닌 총회를 향한 지원이라고 해도 반발하는 이가 나올 것이다. 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이니까.
“어렵다는 거로군.”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강진호가 마스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생각하지?”
마스터는 선뜻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고 싶지만, 위긴스의 말을 듣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머릿속에서 재생이 된다.
특히나 최근 원탁에서 발언권이 급격하게 높아진 나이트 르보가 결코 이 사태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나름 협의를 하려 들지만, 위긴스가 엮인 일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하지 않는 이가 나이트 르보였다.
게다가 자신의 슈발리에들조차 과감하게 희생양으로 삼는 그가 마스터의 사정을 봐줄 거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공수표로군.”
강진호가 담배를 비벼 껐다.
“돌아가라.”
강진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시!”
“들을 만큼 들어줬다.”
“하나 회주님!”
“이해를 못하는군.”
강진호가 차가운 눈으로 마스터를 노려본다.
“내가 지금까지 너를 살려둔 이유는 너에 대한 경의 때문이다. 나와는 다른 길을 걸어 나름의 무학을 완성시킨 종사를 존중하는 마음 때문에, 그리고 패배를 알면서도 끝까지 달아나지 않고 승부에 임한 너의 자세 때문에 네 목을 붙여두고 있다. 하지만 더 억지를 부린다면 나는 굳이 네 목을 네 몸뚱아리에 붙여둘 이유를 찾지 못하겠지.”
마스터가 입을 꾹 닫았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 순간 위긴스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한마디 해도 괜찮겠습니까?”
강진호가 무심한 눈으로 위긴스를 돌아본다.
“서로의 입장 차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부디 제 의견을 한 번 들어주시기를.”
“말해봐.”
위긴스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원탁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마스터의 눈이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