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60
#959.
진출하다 (4)
‘멍청한 늙은이.’
나이트 르보가 가면을 움켜잡았다. 손끝에 차가움이 느껴지자 들뜬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차라리 제 무덤을 팔 것이지.’
마스터가 어떻게 나오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스터가 탄핵된 이유는 그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니까. 그저 지금까지 그에 대한 불만이 쌓인 결과였다.
나이트 르보는 알고 있다.
마스터가 딱히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그게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시대에 뒤처진 것 역시 죄다.
원탁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변화 없이 구체제를 답습하는 자가 이끌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고, 원탁에는 새로운 흐름이 필요하다.
준비는 철저했다.
설사 마스터가 한국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는 결론을 가지고 왔더라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스터의 저 발언은 나이트 르보의 가슴 안에 미묘하게 존재하고 있던 일말의 죄의식마저 깔끔하게 지워 버렸다.
‘노망이 든 게지.’
한국을 지원해서 중국과 일본을 조율한다?
제정신으로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 동조하지 않은 이들도 마스터의 그 발언을 듣고는 모두 자신 쪽으로 돌아섰다.
마스터가 그동안 해온 행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더라도, 지금 그가 마스터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에는 동의한 것이다.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이트 르보가 원하는 대로 됐다.
‘그러니 이제는 되돌릴 수 없지.’
며칠 내로 새로운 마스터의 선출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이트 르보는 경쟁 상대조차 없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유일하게 그를 거슬리게 하던 위긴스는 원탁을 떠났고, 그를 견제하던 마스터는 실각했으니까.
무주공산.
이제는 주인이 비어버린 산을 오르는 일만 남았다.
절로 입가가 실룩인다.
그동안 해온 일들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제 최고의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복도 끝에 도달한 나이트 르보가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열어라.”
“예.”
그그그긍.
커다란 철문이 거슬리는 소음을 내며 좌우로 열린다. 나이트 르보는 살짝 눈을 찌푸리고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름 현대적으로 만들어진 복도와는 다르게, 문 뒤편은 고풍스러운 옛 양식 그대로였다. 커다란 벽돌로 쌓아 올린 벽면을 따라 원형으로 계단이 나 있다.
그 계단은 어두운 아래로 이어져 있다.
중간중간 벽면에 밝혀져 있는 횃불이 아니었다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트 르보는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악취미라니까.’
시대는 이미 제소자들의 인권도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옛 양식 그대로 만들어진 지하 감옥에는 인권이 발붙일 여지가 없다.
계단 끝까지 내려서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이트 르보가 코를 틀어막으며 앞으로 걸었다. 좌우로 나 있는 감옥의 가장 끝.
가장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는 가장 깊은 곳의 감옥.
그 안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원탁을 상징하는 마스크마저 압수당한 노인.
마스터.
그가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어 나이트 르보를 바라본다.
“스스로가 만든 감옥에 스스로가 갇힌 기분은 어떻습니까?”
비꼼이 가득 담긴 그 말에 마스터가 피식 웃는다.
“생각보다는 아늑하군.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했나 후회 중이야.”
“원하신다면 마스터가 만드신 그대로 해드릴 수 있습니다. 일단 구정물을 가져와 바닥에 채워야겠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니 제가 참도록 하죠.”
마스터의 시선이 나이트 르보에게로 향했다.
“나를 아직 마스터라 부르는 건가?”
“당신의 직무는 정지되고, 탄핵되었지만 아직 새로운 마스터가 선출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의를 담아 마스터라고 불러 드리죠.”
“꽤나 절차를 따르는 척하는구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주제에 말이야.”
나이트 르보가 감옥에 바짝 다가갔다.
감옥에 붙을수록 목이 눌리는 느낌이 든다. 수형자의 도주와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이 감옥에는 특수한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다. 제아무리 마스터라고 하더라도 이곳에서는 달아날 수 없다.
“절차 따위야 얼마든지 따를 수 있습니다.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지요. 그 절차만 따른다면 제가 마스터의 자리에 오를 텐데, 굳이…….”
“……내 꼴이 좋아 보이는 모양이로군. 마스터가 되려 하다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당신처럼 될 생각은 없으니까요. 저는 구질서를 파괴할 겁니다. 이 고리타분하고 곰팡내 나는 원탁을 그대로 유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그건 원탁이 아니겠지.”
“아니요, 원탁입니다. 왜냐면 원탁은 저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의 의미하는 게 아니니까요. 원탁은 나이트를 의미합니다. 나이트들이 내 의견에 동조한다면, 제 의견은 원탁의 의지가 되겠지요.”
마스터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뭘 할 생각인가, 제멋대로 원탁을 바꾸고서는.”
나이트 르보는 더 이상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제가 무엇을 할 것 같습니까?”
“……모르겠군. 나는 도무지 자네의 머릿속은 알 수 없어서 말이야.”
“나는 당신이 이 원탁에 채워 넣은 망할 가식부터 다 걷어낼 겁니다.”
“…….”
나이트 르보가 씹어뱉듯 말했다.
“힘이 있는 자가 힘을 사용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걸 죄악으로 만들어 버렸죠. 마치 세상에 온갖 패악을 다 부려놓고 이제 와 깨끗한 척하는 당신의 나라처럼 말입니다.”
“그거, 꽤 괜찮겠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스터. 당신을 이곳에 박아 넣고 조롱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큰 형벌은 손발이 묶인 채로 원탁이 변해가는 걸 그 두 눈으로 지켜보는 것이겠죠. 저는 기꺼이 당신에게 그 형벌을 드리겠습니다.”
“좋군, 아주 좋아. 그런데 말일세.”
마스터가 차가운 눈으로 나이트 르보를 바라보았다.
“그런다고 자네에게 뭐가 남지?”
“…….”
나이트 르보가 입을 닫았다.
“원탁이 항상 옳았다는 건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원탁에서 모순을 느끼고 있었지. 하지만 적어도 원탁과 함께해 온 내게는 영광이 남아 있네. 그런데 자네에게는 뭐가 남나?”
“영광!”
나이트 르보의 주먹이 감옥의 쇠기둥을 후려쳤다.
콰앙!
귀를 찢는 소음이 퍼져 나갔다.
“나의 영광을 무너뜨린 것은 바로 당신이지! 당신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일을 벌일 필요도 없었어!”
“…….”
나이트 르보가 철창을 움켜잡고 소리쳤다.
“나는 원탁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했어. 내 모든 것을 바쳤지. 그런데 당신은 나를 어떻게 했지? 왜 위긴스였나! 왜 내가 아니라 위긴스였나! 그 애송이 따위가 나를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대답해 봐! 당신은 아직도 그 멍청한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하나?”
마스터가 가라앉은 눈으로 나이트 르보를 바라보았다.
인간.
결국은 인간이다.
인간은 감정에서 완전히 유리될 수 없다. 결국 저 감정적인 부분까지가 인간이다. 그걸 감안하지 못했으니 이 꼴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나는…….”
마스터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내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지.”
“…….”
“하지만 누군가 틀린 판단을 내렸다면, 그걸 바로잡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다. 누군가 틀렸다고 그를 판에서 배제해 버리는 것이 너의 방식인가?”
“아니, 이건 나의 방식이 아니지. 이건 이제 원탁의 방식이 될 거야.”
“…….”
“지켜보시오, 마스터.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부술 테니까. 당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 당신이 만들고자 했던 것, 그리고 당신이 손에 쥐려 했던 것. 그 모든 것을 내가 부술 테니까. 내가 만들어낼 새로운 질서를 즐기게 해드릴 테니까.”
“마스터라는 자리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아닌가? 자네가 그 자리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그건 이뤄낼 수 없어.”
“말하지 않았나, 이건 내 의지가 아니라 원탁의 의지라고.”
마스터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당신은 현명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리석었지. 웃기게도 이 말이 사실이야. 원탁의 마스터로서 당신은 더없이 유능했지만, 조직의 수장으로서는 어리석었어. 당신이 나이트 위긴스에게 공을 들이는 동안 나는 당신의 관심에서 벗어난 다른 나이트들을 회유했거든. 이게 당신이 만든 법칙이지. 그 유능한 위긴스도 어차피 하나의 나이트. 무능한 다른 나이트들도 똑같은 권리를 행사하지.”
나이트 르보가 빙그레 웃었다.
“그 권리가 이제 당신의 목을 조일 거야. 당신이 만든 시스템으로 몰락하시오, 마스터.”
마스터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오해가 하나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시스템을 만든 적이 없네. 시스템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지.”
“이미 망가져 버런 시스템을 수호해 왔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절대 면피할 수 없어. 이제 그 대가를 치러야겠지.”
나이트 르보의 조롱 어린 목소리가 어두운 감옥에 메아리쳤다.
“식사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건강이라도 해치면 안 되니까요. 될 수 있으면 오래 사십시오. 그래야 내가 만들 세상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을 테니까. 아, 물론…… 마나를 잃은 당신이 오래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몸을 돌린 나이트 르보가 그곳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기다리게.”
마스터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이트 르보를 잡았다.
“……할 말이라도 남아 있습니까?”
“고민 중이야.”
“고민할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새로운 마스터의 선출까지는 이틀이나 남아 있으니까요. 그때까지 충분히 고민하고 또 고민하십시오. 그 이후, 내가 직접 당신을 단죄하러 올 테니까.”
“이 늙은 몸뚱아리가 어찌 되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
“…….”
나이트 르보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마스터를 바라봤다.
“이보게, 나이트 르보.”
나이트 르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스터도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자네들은 자식 같은 존재라네.”
“이제 와 무슨…….”
“값싼 동정이나 유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니, 끝까지 듣게.”
마스터의 목소리에는 묘한 박력이 있었다. 천하의 나이트 르보조차 입을 꾹 다물고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박력이 말이다.
조금은 회한에 찬 얼굴로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자식이란 그런 존재지. 언제나 부모에게 대들고, 부모의 길을 부정하지. 때로는 죽을 만큼 밉기도 하지만, 결코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게 자식이란 말이야.”
마스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짓이다. 더없이 멍청한 짓.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짓이다.
“대비하게.”
“……무슨?”
“위긴스가 올 거야.”
“…….”
나이트 르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위긴스는 여기까지 보고 있던 모양이더군. 그러니 이제 이곳을 정리하러 올 걸세. 자네를 죽이고, 마스터의 자리에 앉으려 하겠지. 그러니 미리 대비하는 게 좋을 걸세.”
나이트 르보의 복잡한 시선이 마스터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