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62
#961.
침투하다 (1)
결정은 전격적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딱히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총회의 결정이란 언제나 이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필요성과 당위성을 납득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는.
‘아무도!’
그 아무도!
‘내 걱정을 해주지는 않는군.’
멘탈이 날아가 버린 이현수가 머리를 움켜잡았다.
결정이야 쉽다. 아니, 말이야 누가 못하는가. 문제는 그걸 정말 실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실행의 추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현수에게 맡겨질 게 빤했다.
“이현수.”
역시나!
이미 가채점이 끝나 있는 성적표를 받아들일 때도 사람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어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기대는 처참하게 박살이 난다. 바로 지금처럼.
“예, 회주님.”
“준비는 언제까지 가능하지?”
“자, 잠시만요. 아직 결정 난 것이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결정?”
강진호가 의아한 눈으로 이현수를 바라보았다. 이미 출정하기로 결론이 났는데, 더 뭘 결정해야 하느냐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이현수는 강진호에게 설명하는 대신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스승님.”
“말하거라.”
“얼마나 데려갈 생각이십니까?”
“흐음.”
위긴스가 살짝 고민에 빠졌다.
‘정보가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영국에는 여전히 그의 영향력이 미친다. 아무리 그가 원탁을 벗어났다고는 하나 그가 영국의 나이트였다는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그는 원탁을 벗어났을지언정 영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지는 않았다.
원탁은 그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만, 영국에는 아직 그를 따르는 이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 역시 대놓고 위긴스에게 정보를 넘길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나이트가 선출되면서 정보의 통제 권한이 그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원탁은 지금도 그를 감시하고 있다. 정보를 얻어내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즉각적으로 정보를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말인즉, 지금 영국 내의 상황은 온전히 예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최소로 가야 한다.”
“타국에 가는 일입니다.”
“그러니 최소로 가야 한다는 뜻이다. 나이트 르보는 바보가 아니야. 분명 우리가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할 거다. 우리가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지 타국에서 대규모로 입국한 정황이 발견된다면 반드시 조사하려 들 거다.”
“……입국까지 감시할 정도로 그들의 권력이 강합니까?”
“사실 무인계의 힘으로 따지자면, 한국이 이상할 정도로 힘이 없는 쪽에 속하지.”
“한국이 힘이 없는 측에 속한다구요?”
이현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의 무인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무인계가 힘이 없다니?
“힘이 없었기 때문에 힘이 없지.”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부분의 나라에서 무인계는 국가가 성립이 되기 전부터 존재했네.”
“……아!”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중국도 지금의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은 같은 이름을 써왔다고는 하나 2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에 분명 체제가 변했다.
다른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의 체제를 정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반드시 혼란과 함께하게 되네. 그리고 대부분의 무인계는 이 단계에서 이미 정부에 침투하기 마련이지.”
“확실히 그렇겠네요.”
이현수라고 해도 그런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렇기에 타국의 무인계들은 정권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월 관계를 유지하고 있네. 겉으로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뒤에서는 암약하지. 왜, 그런 음모론들이 흔하잖은가. 로스차일드라든가.”
“……조금 유치한 이름이네요.”
“그렇지.”
위긴스가 고소를 머금었다.
이곳에서 음모론의 대명사를 논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완전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 로스차일드는 아니더라도 정부의 뒤에서 그들을 움직이려 하거나 협력하는 이들은 분명 있으니까.”
“그게 무인계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그게 아니라면 일본이 한국으로 쳐들어온다는 일이 가능할 것 같은가? 출항한 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난리가 나야 정상이지. 하지만 현재 아무도 그 일에 대해 논하고 있지 않지.”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 역시 무인계와 긴밀한 관계란 말이야. 그들이 요구한다면 입국하는 이들에 대한 정보를 넘겨줄 걸세. 동아시아에서 다수가 동시에 입국을 한다면?”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감시를 피할 수가 없다.
“게다가 하필이면 영국이구요.”
“그렇지.”
위긴스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이 무대라는 점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고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단점이 너무도 크다.
대륙 내에 있는 국가였다면 아무리 출입국 심사를 강화한다고 해도 침입할 수 있는 방도가 넘쳐 난다. 애초에 국경이라는 것은 평범한 이들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일 뿐, 무인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니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 오늘 밤이라도 휴전선을 넘어갈 수 있다. 휴전선만큼 과한 경계가 투입되지 않는 타국의 국경선 따위야 대낮에도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다르다.
영국은 섬나라다. 섬나라의 국경을 넘는 방법은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는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 돌아올 때나, 일본이 한국에 쳐들어올 때 썼던 방법처럼 적당한 거리의 배에서 헤엄쳐 들어가는 방법은 이번에는 사용할 수 없다.
그렇게 느긋하게 이동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유럽으로 이동해 배를 타고 영국으로 가는 동안 상황이 끝나 버릴 테니까.
“비행기를 통해 낙하하는 건 어떻습니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타국에서 수송선이 날아와 자기 영공에 들어오는데 좌시하고 있을 공군이 어디에 있겠는가.
강진호가 헬기로 일본의 배에 뛰어내릴 수 있던 건, 그곳이 한국의 영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의 영해에 헬기를 타고 들어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결국은 공항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정직한 수지.”
“빤한 수구요.”
“어쩌겠나.”
위긴스가 어깨를 으쓱하자 이현수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공항으로, 공항…….”
그 순간, 가만히 이현수의 말을 듣고 있던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상관없지 않나?”
“예?”
“공항에 도착만 하면 되잖아. 검색대 같은 거야 적당히 제껴 버리면 되지.”
“공항에 도착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출입국 기록이 남잖습니까.”
“안 남기면 되지.”
“……출입국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화물기에 타고 가면 되는 일 아닌가?”
“화물기에는 화물을 싣죠.”
“반만 싣고 남은 곳에 타면 되지.”
“아니, 물론 그러면 가능하겠죠. 하지만 손해를 봐가며 화물을 반만 싣고 영국으로 비행기를 보내줄 만한 호구가…… 호구…….”
이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조규민 실장과 통화해 보겠습니다.”
“응.”
* * *
“아니!”
조규민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세요! 그러다가 걸리면 우린 어떻게 합니까?”
― 저번에 중국에도 그렇게 갔잖아.
“중국이랑 영국이 같습니까? 중국은 돈만 주면 자금성 기둥도 뽑아오는 나라예요! 그런데 영국은 그러다 걸리면 모가지 날아가는 정도로는 안 끝납니다! 그리고 중국이야 공항이 넘쳐 나다 못해 굴러다녀서 관리가 안 되지만, 영국은 그게 아니잖아요!”
―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지.
이마에서 스팀이 올라온다. 귀에서 연기가 뿜어지는 것 같다.
“아니, 형님은 왜 주는 것 하나도 없이 매번 시켜먹으려고 합니까? 재경이 형님 비서예요? 그냥 이거 해달라면 해주는 곳입니까? 여기 그렇게 만만한 곳 아닙니다!”
― 에이. 뭐, 내가 시키나? 회주님이 하라니까 하는 거지.
“이…….”
치트키도 아니고, 매번 강진호, 강진호!
그 말만 나오면 뭐든 제 마음대로 굴러갈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번은 아니다! 조규민이 굳건히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안 됩니다.”
― 그러지 말고.
“아니, 진짜 이건 안 된다니까요. 이건 걸리면 대형 사고예요! 중국처럼 돈으로 무마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중국으로 갔을 때야 우리가 사람 대기시켜 놓고 공항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길 텄던 거 아닙니까! 그런데 영국은 그게 안 된다고요! 공항에서 무슨 수로 빠져나갑니까?”
― 도착 시간만 새벽으로 잡아주면 우리가 알아서 빠져나간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그러다 걸리면?”
― 거참, 안 걸린다니까.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국방부도 털어.
“우리나라 국방부는 좀도둑한테도 털려!”
― 말이 짧다?
“털려요!”
즉각 말투가 수정되었다.
“그리고 피해를 안 주기는 뭔 피해를 안 줍니까! 화물기에 화물 내리라고 하고서는 피해를 안 줘요? 이거 자체가 민폐예요!”
― 밥 산다. 거하게 산다.
“안 먹습니다!”
― 그럼 적어도 회장님한테 말씀이라도 한 번 꺼내줘.
“예?”
― 그거 어차피 니가 결정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 그럴 권한도 없을 텐데?
“…….”
― 가서 말하는 데 돈 드는 거 아니니까, 한 번 여쭤나 봐줘. 그리고 이거, 네가 전달 안 하면 직권남용이다. 알지?
“아오!”
조규민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말은 맞는 말이다. 강진호가 재경에 요청한 일을 조규민이 끊을 권한 따위는 없다. 무조건 회장 직속으로 올라가야 하는 일이다.
“일단 알았습니다. 보고는 올릴게요.”
―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보고한다고 해서 뭐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회장님도 회사가 최우선인 분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허락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회장님이 어떤 분이신데!”
― 네네, 기대 안 하고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과감 없이 전달만 해라. 말 빼먹지 말고.
목소리가 살짝 능글능글하다.
“끊습니다!”
전화를 끊은 조규민이 씩씩거리며 비서실장실을 나섰다.
문이 벌컥 열리자 업무를 보고 있던 비서진들이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본다. 하지만 조규민은 그들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씩씩대며 밖으로 나갔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물론 그는 스스로를 재경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양쪽에 한 발씩 걸쳐 있는 게 조규민의 입장이지만, 마음만은 강진호에게 더 기울어 있다.
하지만 그게 재경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를 강진호와 만나게 해주고,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 역시 재경이라는 회사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서로가 상생하는 길을 만드는 것이지, 재경이 일방적인 피해를 감수하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안 돼!’
사람이 무슨 도깨비 방망이도 아니고, 뭔 말만 하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저 이현수 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좋은 기회다. 마음을 다잡은 조규민이 회장실로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그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