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66
#965.
침투하다 (5)
인생에는 여러 가지 진리가 있다.
평소에는 딱히 드러나지 않던 진리들은 살아감에 따라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지금 조규민이 깨닫고 있는 진리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형님.”
“조용히 해라.”
“……아니, 형님.”
“조용히 하라고 했다.”
“비행기 시간 다 됐는데 말입니다.”
“쯧.”
이현수가 구석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는 조규민을 보며 혀를 찼다.
“시간만 있었어도 확 그냥!”
“헤헤헤.”
“너는 매번 당하면서 왜 객기 부리냐?”
“형님.”
“응?”
“저는 남자 아닙니까?”
“…….”
“남자의 인생은 도전에 그 의미가 있는 법이지요.”
“그러다 뒈지면 안 억울하고?”
“……억울하죠.”
이현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정상적인 놈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면 강진호를 매개로 알게 된 사람인데 정상적일 리가 없다.
“어떻게 됐어?”
“화물선 안에 공간을 반쯤 비워뒀습니다. 조금 좁게 타면 삼백 명까진 별문제 없을 겁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타면 빠져나가기 힘드실 텐데요.”
“그렇게까지 많이 탈 생각도 없어.”
이현수가 고개를 돌려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공항 안이다. 정확하게는 격납고 안이었다. 여객용 항공기가 아니다 보니 딱히 다른 이들에게 노출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영국에는 왜 가시는 건데요? 그것도 이렇게 은밀하게.”
“말하자면 하루 밤낮으로도 부족하다. 내가 뭔 힘이 있냐, 까라면 까야지.”
“그건 그렇죠.”
조규민도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안 봐도 빤하다. 보나마나 강진호가 또 사고를 치는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는 동정한다.
이미 강진호가 뭐 하나에 꽂히면 얼마나 대책이 없는지, 수도 없이 겪어본 조규민이 아닌가.
“위험한 일입니까?”
“우리가 하는 일 중에 위험하지 않은 일이 어디에 있겠냐.”
“……그렇긴 합니다만.”
조규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참 이해가 안 가기도 합니다. 그리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데, 왜 이런 범죄 같은 일까지 저지르면서 팍팍하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현수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맞는 말이다.
현상태를 유지하면서 편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총회는 그런 방법을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지. 우리는 무인이니까.’
살아온 방식이 이렇고, 살아갈 방식이 이렇다.
“됐으니까 일처리나 잘해둬. 조종사한테는 말해뒀지?”
“예. 그런데 우리 직원은 아니라서 어디까지 먹힐지 모르겠습니다. 일이 커지면 다 불어버릴 수도 있죠.”
“……감수해야지.”
재경이 아무리 대기업이라고는 하나 화물기를 전용으로 굴리지는 않는다. 황정후가 가진 힘으로 웬만큼은 무마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다른 회사의 직원이니만큼 말이 새어 나갈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그래도 최대한 막아봐.”
“그건 걱정 마십시오. 이거, 말이 새어 나가면 저희도 골치 아프니까요.”
“그래.”
이현수가 고개를 돌려 격납고 한쪽에 모여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강진호를 위시로 한 이사진들과 마염들, 그리고 마교의 정예들과 슈발리에들까지 와 있었다. 수로 따지면 백이 넘어간다.
평소 이만한 전력을 눈으로 본다면 뿌듯했겠지만, 지금 이현수가 느끼는 감상은 전혀 달랐다.
이만한 전력이라면 웬만한 조직은 박살을 낼 수 있다. 강진호와 이사진들만으로도 문파 하나 갈아 마시는 것은 몇 분 걸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영국으로 가야 한다.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일개 문파가 아니었다. 영국이라는 하나의 국가였고, 더 나아가서는 유럽이라는 어마어마한 집단이다.
‘미친 짓이 아니어야 할 텐데.’
위긴스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현수는 알고 있다. 세상일이란 것은 절대 계획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게다가 이만큼 커다란 일이라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변수가 발생한다.
그 변수를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느냐가 이번 출정의 핵심이었다.
“그럼 나는 보고하러 간다.”
“예, 형님. 저는 기내 점검 한 번 더 하겠습니다.”
“그래.”
이현수가 조규민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매번 깐죽거려서 짜증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이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조규민만큼 믿음직스러운 사람도 없다.
이현수가 강진호의 앞으로 다가갔다.
“준비는?”
“대부분 다 끝났습니다.”
“음.”
“비행 시간은 변수가 없을 경우 대충 열두 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꽤나 길군.”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거니까요.”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온하시네.’
적국으로 잠입해야 하는 일이건만, 강진호의 얼굴에는 딱히 긴장감이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강진호가 전투를 앞두고 긴장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던가.
“다른 분들도 다 준비가 끝나셨습니까?”
“준비랄 게 뭐 있나.”
위긴스가 너스레를 떨었다.
“여권을 챙겨야 하는 것도 아니고, 들어가서 앉아 있으면 끝나는 일인데. 방석이나 하나 챙길 걸 그랬군. 의자가 없다는 걸 생각 못했어.”
“……사부님, 너무 태평하신 것 아닙니까?”
“그럴 수밖에. 다른 사람들이야 타국에 가는 거지만,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데, 긴장할 일이 없지.”
위긴스가 고소를 머금었다.
‘사람 일이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구만.’
언젠가는 영국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마스터의 방문과 함께 그의 운명의 수레바퀴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다녀와?”
“무슨 문제라도?”
위긴스가 고소를 머금고 강진호를 돌아보았다.
“이 녀석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군.”
“……예?”
“너도 간다.”
“…….”
이현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 아니, 잠시만요. 저는 전력이 아니잖습니까. 괜히 따라갔다가 짐만 될 뿐입니다. 저는 차라리 여기에서 정보를 얻고, 그걸 전해 드리는 쪽이…….”
“네가 무슨 수로 영국의 정보를 얻을 건데?”
팩트가 이현수의 명치에 틀어박혔다.
“저, 적어도 영국 외부의 정보라도…….”
“총회가 유럽에 정보원을 심어놨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 같은데? 그새 일을 벌였나?”
“……아니죠.”
“그럼 무슨 수로?”
이현수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방법이 없다.
그나마 중국이나 일본이라면 풀어놓은 정보원들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만, 유럽은 총회의 손이 미치는 곳이 아니었다.
애초에 원탁이 갑자기 한국에 손을 뻗기 전까지는 그들과 엮일 거라는 생각조차 하질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위긴스가 총회에 투신한 이후에도 총회의 제일 경계 대상은 중국이었고, 그다음이 일본이다. 유럽은 순위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정보를 얻겠는가.
“남들은 개고생하는데 혼자서 피서 즐길 생각인 건 알겠다.”
“이렇게 몰아가시깁니까?”
“하지만 꿈은 꿈인 법이지. 통역이 부족하니 너도 타라.”
“…….”
이현수의 어깨가 축 처졌다. 위긴스가 이렇게 말하고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인 이상, 그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다.
‘생애 최초의 유럽 여행인데…….’
다른 이들에게는 로망, 그 자체인 유럽 여행을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이야.
이현수가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제 탑승하시면 됩니다!”
조규민의 외침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행기 쪽으로 이동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강진호 씨.”
“고생하셨어요.”
“고생은요.”
조규민이 빙긋 웃고는 이현수를 돌아보았다. 그 썩어 있는 얼굴을 본 순간, 감을 잡은 조규민이 입가를 씰룩였다.
“형님도 가십니까?”
“……쪼개지 마라.”
“에이, 쪼개다니요. 걱정돼서 그렇죠.”
묵은 체증이 내려간 얼굴을 하고 있는 조규민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나는 이현수였다.
‘내가 언젠가는 이 새끼를 반드시 죽일 거다.’
하지만 그 언젠가가 지금은 아니었다.
“시간 없습니다. 빨리 타세요.”
“……돌아와서 보자.”
이현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비행기에 올랐다. 여객기가 아니라 화물기다 보니 탑승이 불편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모두가 비행기에 오르자 천천히 문이 닫힌다.
조규민이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겉으로는 이 안에 사람들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왠지 요즘 하는 일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은데…….’
예전에는 하는 일이라 봐야 강진호가 친 사고를 무마하거나, 강진호를 부대에서 서울까지 데리고 나오는 일 정도였다. 하지만 요즘 그가 하는 일은 점점 커지고 점점 글로벌해진다.
중국으로 소수의 인원을 밀입국시킬 때까지만 해도 현실감이 있었는데, 이제 백 명이 넘는 인원을 영국으로 밀입국시키고 있었다.
“영화네, 영화야.”
조규민이 고개를 내젓고는 몸을 돌렸다. 이제 비행기가 공항에서 무사히 떠나는 것만 지켜보면 된다.
“생각보다 넓네요.”
“음.”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물기라는 말에 굉장히 좁은 창고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막상 타본 화물기는 의외로 꽤나 넓고 쾌적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화물기라고 해도 일반적인 여객기의 좌석을 떼어내고 짐을 실을 수 있게 만든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넓은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쪽에 단단히 봉인되어 있는 짐들을 제외하면 꽤나 넓은 공간이 남는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다 드러누워도 될 것 같다. 정말 드러눕고 싶은 사람이야 없겠지만.
“곧 이륙할 겁니다.”
이현수는 제 신색을 빠르게 되찾았다.
영국으로 끌려가는 일이야 가슴 아프지만, 그렇다고 계속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고 최대한 빨리 돌아오는 것이 목표다.
“유럽까지 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도 그렇습니다. 바람이 하나 있다면,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은 가고 싶지 않네요.”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자주 가게 될 것 같은데?”
“……저도 지금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순간,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륙하는 모양입니다.”
“음…….”
평범한 사람들이 탔다면 꽉 잡으라든가, 벨트를 매라든가 어수선했겠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비행기가 이륙하는 정도로 문제가 생길 사람들이 아니다.
손가락 하나로 몸을 지탱하고 있어도 넘어지지 않을 사람들이니 그런 말은 필요 없었다.
그래서인지 별다른 안내 없이 비행기가 가속한다. 그러고는 곧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이현수가 구석으로 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아래쪽으로 멀어지고 있는 공항이 보인다.
‘정말 가는구나.’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비행기가 떠버린 이상 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
총회의 첫 번째 해외 출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