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67
#966.
상륙하다 (1)
“지내는 건 좀 어떠십니까?”
나이트 르보는 창살 안의 마스터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 며칠 사이에 마스터는 무척이나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딱히 고문을 한 적도 없고, 괴롭힌 적도 없다. 그런데도 저런 모습이란 건 그의 내면적 고뇌가 그만큼 깊다는 뜻이리라.
“내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수척한 얼굴과는 다르게 마스터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마스터께서 묻는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지.”
“이상한 일이군요. 마스터야 모든 것을 잃었으니 고뇌에 찰 만도 하지만, 저는 모든 것을 얻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제게 그런 걸 물으십니까?”
“그럼 여긴 왜 왔나?”
“…….”
나이트 르보가 입을 다물었다.
“패배한 이를 보며 즐기기 위해서? 아니야, 아니지. 자네가 아무리 성격이 나쁘다고는 해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할 사람은 아니야. 지금은 한창 바쁠 때지. 그런데 굳이 시간을 내서 이곳에 올 이유가 없어. 마스터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충분하니까.”
나이트 르보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는다는 것은 불안하기 때문이겠지.”
“저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자네의 얼굴은 그리 말하고 있지 않군.”
마스터가 고소를 머금었다.
“인정하면 편해지네. 사람이란 그런 거지. 일을 벌이기 전까지는 자신감에 넘쳐 나다가도 정말 일이 벌어지면 덜컥 겁이 나는 법이거든.”
“저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오해하고 있군.”
마스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지금 자네를 비난하고 있는 게 아닐세. 사람이란 다 그런 거라는 뜻이지. 나 역시 마찬가지네. 흔들리지 않는 척하려고 무던히 애를 써왔지. 하지만 가면을 벗겨보면, 내 표정도 아마 볼만했을 걸세.”
나이트 르보가 손을 들어 자신의 가면을 매만졌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손끝에 닿는다.
평소 가면을 매만질 때면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가면은 그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지 못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지.”
마스터가 피식 웃었다.
“가면은 원탁을 상징하지. 개인이 존재하지 않고 시스템만이 존재한다는 가장 큰 증거가 가면이란 말이야.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가면이 인간과 원탁의 불완전함을 증명해 주는 가장 큰 증거가 되지.”
“뭔가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권력과 힘을 잃고 나니 새로운 게 보이기라도 하는 겁니까?”
“잃어서 보이는 게 아니야.”
마스터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잃어서가 아닐세. 경험했기 때문이지. 설사 내가 자네를 제압하고 여전히 마스터의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생각을 했을 걸세.”
나이트 르보가 가만히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좋습니다. 부정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저 역시 지금 원탁의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동의합니다.”
“그 방향은 다르지만 말이지.”
나이트 르보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쉬십시오.”
“이보게.”
나이트 르보가 몸을 돌리다 멈춰 섰다.
“준비는 잘되어가고 있는가?”
“……준비?”
“자네를 찾아올 이들에 대한 대비 말일세.”
가면 속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무슨 망상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망상?”
나이트 르보가 몸을 획 돌렸다.
“그들이 유럽으로 온다고 해서 뭘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설마 당신을 구하기 위해 오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꿈 깨십시오. 마스터의 가치는 지위에서 나옵니다. 마스터의 자리에서 밀려난 당신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늙은이일 뿐이죠.”
“그럴지도 모르지.”
마스터가 고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기억하게나. 세상일은 항상 상식적으로만 돌아가지는 않는다네. 때로는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그 말이 안 되는 일 때문에 역사가 바뀌기도 하지.”
“미안하지만, 마스터에게 배우던 시절은 끝났습니다. 이제 당신에게서는 배울 게 없군요.”
나이트 르보가 차가운 눈으로 마스터를 응시했다.
“편안한 휴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 시간이 당신의 인생에서 주어진 마지막 여유일지도 모르지요. 그 시간을 충분히 즐기시길.”
나이트 르보가 거친 걸음으로 감옥에서 멀어졌다.
“이보게, 르보.”
나이트 르보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등으로 마스터의 목소리가 전해져 온다.
“악마에 대해 연구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그게 아니면 영혼을 쨋길 수도 있을 테니 말일세.”
‘미친 늙은이.’
나이트 르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계단을 올랐다.
조금의 분노, 그리고 조금의 실망.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다.
냉철하고 이성적이던 마스터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다. 남은 것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나 지껄이는 노인일 뿐이다.
저런 자를 지금까지 모셨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미는 나이트 르보였다.
거대한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나이트 르보가 그의 앞을 지키고 있던 수행원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입국하는 이들에 대한 감시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나?”
“예, 나이트! 확실하게 감시 중입니다.”
나이트 르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지?”
“목숨을 걸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 호언장담이 더욱 사람을 못 미덥게 만들고 있었다. 평소라면 저 한마디로 신뢰를 주었겠지만, 지금은 도무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내가 흔들리고 있는 건가?’
저 늙은이의 말 몇 마디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틀이다.”
나이트 르보가 손을 들어 가면을 움켜잡았다.
“이틀, 단 이틀만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져도 해결할 수 있다. 이틀 동안만 무리하면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나이트!”
“……알아들었으면 좋겠군.”
나이트 르보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마스터의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럼에도 그 말을 신경 쓰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위긴스.’
마스터의 말 중 하나 공감 가는 것이 있다. 만약 위긴스가 지금 원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면, 결코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이트 르보가 원탁을 손에 넣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혼자 무엇을 할 수 있지?’
원탁은 거대하다.
더없이 거대하다.
개인의 힘이 먹힐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총회인가 뭔가 하는 동양의 작은 나라를 움직인다?
꿈같은 소리.
총회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한들 원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설사 기적이 일어나 총회의 힘이 원탁에 필적할 만큼 강해졌다 한들 마찬가지다.
총회가 존재한 곳은 지구의 반대편이고, 이곳에 투입할 수 있는 전력에는 한계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전쟁을 치르는 일은 그 미국도 꺼려하는 일이 아니던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문제가 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단 말인가.’
나이트 르보의 발걸음에 신경질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좋다.’
이틀, 단 이틀이다.
불안하든 아니든 단 이틀만 버티면 모든 것이 끝난다.
“직접 온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위긴스.”
그 목이 떨어지는 것 말고는.
* * *
“괜찮으십니까?”
눈을 감고 있던 강진호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위긴스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제라도?”
“아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강진호가 가만히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위긴스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위긴스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자신의 팔이 잘려 나갔을 때도 담담했다던 위긴스가 아닌가.
“일단 좀 진정하지.”
강진호의 지적에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지금의 그는 평소답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회주님.”
“뭐가?”
“……처음 회주님께 제안을 드릴 때만 해도 저는 이 모든 제안이 합리적인 계산에 의해 나왔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이게 과연 온전히 이성적인 판단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위긴스의 눈이 침울해졌다.
“조금의 위험을 감수하는 대가로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목숨을 걸 때의 계산입니다. 이득의 대가가 다른 이들의 목숨이 될 수 있다면 조금 더 재고해 봤어야 합니다만…….”
위긴스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비행기에 오르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이곳에 탄 이들이 모두 돌아가지 못할 가능성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몰랐다.
그는 수도 없는 전투를 지휘했고, 수도 없는 명령을 내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전장은 언제나 원탁이었다. 수로서 사람을 판단하고, 액수로 이득을 계산한다.
하지만 이들은 수로 치환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함께 노력하고, 함께 고민한 이들. 그들이 위긴스의 판단 하나로 모조리 죽어 나갈 가능성이 있다. 이 무거움은 지금까지 위긴스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
“이 일을 하는 대가가 네 목숨의 위협이었다면 어찌했을 텐가?”
“……그랬다면 망설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된 거야.”
강진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숨을 생각하고, 잃을 것을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때로는 그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움직여야 할 때가 있다.”
강진호가 위긴스와 시선을 맞췄다.
“움직이기 전에는 얼마든지 고민해도 된다. 고뇌해도 괜찮아. 하지만 움직인 뒤에는 고민하지 마라. 이끄는 자가 불안에 떨면 이끌리는 자도 떨기 마련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강진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위긴스는 비행기 벽에 등을 기댄 강진호를 보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이런 부담과 함께하시는 거로군.’
이 입장이 되어보니 강진호가 그동안 얼마나 큰 부담에 시달리고 있었을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마 그는 일백의 목숨을 짊어진 것에 불과하지만, 강진호는 수만의 목숨을 짊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선택 하나로 동고동락하던 수만이 모두 죽을 수도 있다는 부담감을 대체 어떻게 견뎌내는 걸까?
새삼 강진호가 대단해 보였다.
그들은 강진호에게 선택을 넘기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지만, 강진호는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선택은 온전히 그의 몫이고, 책임도 온전히 그의 몫이다.
‘그러니 우리 역시 믿고 싸울 수 있는 거겠지.’
그때였다.
강진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로드.”
“영국으로 잠입하면, 그다음에는 어쩔 생각이지?”
위긴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저는 저들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핵심을 제거합니다.”
“…….”
“원탁은 나이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든 결정이 나이트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거꾸로 말하면, 나이트들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원탁을 정지시킬 수 있습니다.”
“그럼 걱정할 것 없어.”
“……예?”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건 내 특기니까.”
소름이 돋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 어떤 말보다 믿음직스러운 말이다.
위긴스가 강진호를 보며 주먹을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