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69
#968.
상륙하다 (3)
샘 머레이는 굳은 얼굴로 활주로로 접어드는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저건가?’
아마 맞을 것이다. 저쪽 활주로로 착륙한다는 것은 이미 확인했으니까.
‘나이트 위긴스.’
아니, 이제는 나이트가 아니지.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 미스터 위긴스?
샘 머레이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호칭이야 아무래도 좋다. 나이트라 불러온 이를 나이트가 아닌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지만,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보다 곤혹스럽지는 않으니까.
‘위긴스와 손을 잡아야 한다니.’
어쩌다가 상황이 여기까지 와버렸을까?
위긴스는 원탁의 배신자다.
본래대로라면 감히 그와 연락을 하는 것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배신자는 용납하지 않는 것이 원탁의 기본이니까.
아무리 샘 머레이가 공식적으로 원탁에 소속된 이는 아니라고 해도, 행동 원칙은 원탁의 그것을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배신자와 내통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가 안전히 공항을 빠져나가도록 도와야 한다니. 아니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빌어먹을 나이트 르보.’
나이트 르보가 마스터를 구속하고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이런 미친 짓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쿠데타도 아니지. 모든 절차는 정당하게 이뤄졌으니까.
그 의도가 불순하다고 하더라도 나이트 르보는 원탁의 동의를 거쳐 마스터를 구속했다. 마스터를 구속하고 그의 지위를 빼앗은 게 원탁의 의지라는 뜻이다.
그 말인즉슨…….
‘나는 지금 원탁을 배신하고 있다.’
샘 머레이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건 딜레마다.
그들은 마스터의 명을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일원칙은 마스터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 지금 그들이 해야 할 것은 마스터를 구출하는 일이다.
하지만 마스터는 분명 샘이 자신을 구하러 오는 걸 반기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이니까. 원탁이 자신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게 정당한 의결을 거친 원탁의 의사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실 분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스터의 안전과 그의 의지가 충돌할 경우,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샘 머레이는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정을 내릴 수 없기에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샘에게 손을 뻗어온 이가 위긴스였다.
“마스터를 구하고 싶겠지?”
‘독사 같은 자.’
과거 위긴스가 나이트였던 시절에는 그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걸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머리가 비상한 분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 머리가 이렇게 사람의 약점을 조이는 쪽으로 활용이 될 줄이야.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원탁에 구속되어 있는 마스터를 그들의 힘만으로 구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방향조차 잡지 못한 게 사실이지만, 설사 방향을 잡는다 하더라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리고 나이트 위긴스라면 그 능력만큼은 확실하지.’
그 마스터가 자신의 후계로 점찍어놓은 자가 아닌가. 위긴스를 의심한다는 것은 마스터의 선택을 의심한다는 뜻이다. 샘의 입장에서 그건 더없는 불경이었다.
“치프, 비행기가 착륙했습니다.”
“짐 풀기 전에 격납고로 이동시켜.”
“예.”
천천히 격납고 쪽으로 이동하면서도 샘의 머리는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고민할 수밖에 없다.
마스터가 원하지 않는데도 원탁과 적대하며 그들을 구출한다. 상식적으로는 하지 않아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샘이 고민하는 이유는 이게 마스터를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점이었다.
‘단독으로는 불가능해.’
이대로 마스터가 구속된 채 나이트 르보가 새로운 마스터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면, 나이트 르보는 분명히 마스터의 마나를 제거할 것이다.
그럼 마스터는 힘을 잃는다.
그런 후, 평생을 나이트 르보의 감시하에서 꼭두각시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설사 그런 결말을 마스터가 원한다고 해도, 샘은 절대 그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설사 그게 원탁과 마스터를 동시에 배신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더는 망설이지 않는다.’
샘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결론은 났다.
이제는 위긴스가 완벽하게 준비해 왔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원탁은 위대하다.
하지만 나이트 역시 위대한 자였다.
가장 뛰어난 나이트였던 위긴스 역시 위대할 것이다.
“문을 닫아라!”
“예!”
격납고의 문이 천천히 닫힌다.
마스터가 부재중이긴 하지만 이 정도의 권력은 휘두를 수 있다. 이곳이 영국이 아니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영국은 마스터의 영역이다.
아무리 새로운 나이트가 선출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아직 영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그만큼이나 나이트 위긴스의 그림자가 짙고, 마스터의 영향력이 강했다.
공항의 검문을 무리 없이 통과하게 만드는 것까지는 어렵겠지만, 지금처럼 화물기 하나를 격납고로 끌고 들어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비행기가 격납고로 들어오고 문이 닫혔다.
“열어!”
비행기의 앞쪽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다.
샘은 긴장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안에 위긴스가 있다. 그리고 위긴스가 원탁을 전복하기 위해서 데려온 이들이 있을 것이다.
입술이 바짝 마른다.
‘매국노 짓과 다를 것도 없지.’
물론 원탁이 국가와 같은 충성심을 바쳐야 할 대상은 아니지만, 일말의 죄책감마저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열린 문을 통해 익숙한 한 사람이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다.
‘위긴스.’
모습이 조금 변하기는 했지만, 위긴스가 분명했다. 샘은 마른침을 삼키며 위긴스를 향해 걸어갔다.
살짝 주변을 살피던 위긴스가 그를 발견하고는 다가온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네.”
“악수는 사절하겠습니다.”
뻗어진 손이 어색하게 되돌아간다.
위긴스가 입맛을 다시고는 입을 열었다.
“꽤나 매정하군.”
“잊지 마십시오, 나이트. 아니, 미스터 위긴스. 목적이 같아 당신들을 도울 뿐입니다. 저희가 심정적으로 당신과 같이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알고 있지.”
위긴스가 빙그레 웃었다.
말로는 샘이 위긴스를 몰아붙이고 있지만, 위긴스가 저리 유들유들하게 나와 버리자 어른에게 떼를 쓰는 아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살짝 기분이 나빠진 샘이 인상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재회의 인사는 사절하겠습니다. 그보다 추가 병력은 어떤 방식으로 입국하게 되는 겁니까?”
“추가 병력?”
“추가 병력이 있을 것 아닙니까?”
위긴스가 빙그레 웃었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군, 머레이. 병력은 이게 전부네.”
“……제가 잘못 들은 겁니까?”
“자네가 제대로 들었다고 확신하지. 병력은 이게 전부네.”
샘이 흔들리는 눈으로 비행기에서 내리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백 명이 겨우 넘는 수가 아닌가.’
이만한 인원으로 원탁에 쳐들어가겠다고?
“……동양에 잘 듣는 약이 새로 나온 모양이군요. 그런 건 같이 나누면 좋겠는데요.”
“아쉽게도 한국은 마약에 관한 한 청정지대나 다름없는 곳일세. 이곳과는 다르게 말이네.”
“그럼 약도 안 빤 사람이 지금 고작 백 명으로 원탁에 쳐들어가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미스터 위긴스, 제가 안내해야 할 곳이 원탁이 맞습니까? 좋은 정신과가 아니라?”
“안타깝게도 나는 지금 완전히 제정신일세.”
“…….”
샘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원탁이 어떤 곳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위긴스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원탁이라는 곳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는 원탁의 나이트였지 않은가.
원탁이 얼마나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완벽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해 댄다?
이 사실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미스터 위긴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아주 간단하지. 마스터를 구출한다. 나이트 르보의 목을 쳐버린다. 안정화된 원탁을 마스터에게 돌려 드린다.”
“진심입니까?”
“거짓일 수도 있지. 어차피 내가 진심이라고 해도 믿지 않을 텐데, 뭐 하러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건가.”
“…….”
위긴스가 빙그레 웃었다.
“자네의 말이 맞네. 우리는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자들이지. 그걸로 충분하네. 우리를 원탁까지 무리 없이 이동하게 도와만 준다면, 결과는 자네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걸세. 어차피 자네는 손해 보는 것도 없잖은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하지만 당신들의 전력을 완전하게 확인하지 않는 이상, 저는 당신들을 원탁으로 안내할 수 없습니다. 어설프게 그들을 건드렸다가는 마스터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네.”
위긴스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꾸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원탁을 휩쓸기 위한 충분한 전력을 대동하고 왔네.”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내가 지금 농담하는 걸로 보이나?”
“…….”
가라앉은 위긴스의 목소리에 샘이 입을 다물었다. 위긴스는 나이트이던 시절의 위엄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아니, 못 본 새에 오히려 더…….
“때로는 어설픈 다수보다 완벽한 소수가 나을 때도 있지.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물론 그렇습니다만…….”
“아, 나오시는군.”
위긴스가 샘의 말을 끊고는 고개를 돌렸다.
위긴스의 시선이 비행기로 향한다. 자연히 샘도 위긴스의 시선을 쫓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모습을 잊지 말게.”
“……예?”
“저분을 직접 대면했다는 사실이 자네의 자랑이 될 때가 반드시 올 걸세. 그러니 저분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말게나. 무인들이 가는 펍에서 입만 열어도 맥주는 평생 공짜로 먹게 될 테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 순간, 비행기에서 한 사람이 뛰어내렸다.
샘의 시선이 그자를 쫓았다.
그러고는 깨달았다, 위긴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마스터가 그들을 만든 이유는 단순히 친위대로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원탁에도 시킬 수 없는 내밀한 일들, 때로는 인륜을 저버리는 일조차 과감하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도구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샘은 그동안 수많은 요인들과 강자들을 봐왔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저 청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은 채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저 청년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말이다.
압도당한다.
조금의 기세조차 내뿜지 않는 작은 동양인에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영혼이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저…….”
살짝 벌려진 입이 다시 꾹 다물어진다.
‘저 사람이…….’
짐작할 수 있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그저 정보를 알고, 소문을 들은 게 전부이지만, 이만한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는 이는 그가 아는 한 총회에 단 한 사람밖에 없다.
“소개하지. 나의 로드, 총회의 회주님이시네.”
강진호.
이제는 동아시아의 전설이 되어버린 그 이름의 주인.
샘이 떨리는 눈으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 충분한 전력이 왔을지도 모른다.
위긴스의 말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