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74
#973.
살육하다 (3)
지옥의 문이 열린 것 같았다.
화염과 흙먼지가 비산하는 숲에서 거인이 걸어 나온다. 그 광경을 본 이들은 다들 할 말을 잃었다.
적이다.
적이 그들의 눈앞에 있다.
하지만 대항해야 한다거나 공격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압도적인 그 위용 앞에 넋을 놓을 뿐이었다.
우드드득.
그런 그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거인이 주먹을 움켜잡으며 낸 소리였다.
사람이 주먹을 움켜쥐며 나는 소리라기에는 너무도 거대하고 섬뜩한 소리였다. 그 주먹의 크기가 웬만한 사람의 머리만 하다면 누구도 그 광경을 무심하게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켄드릭의 몸이 얼어붙었다.
지옥의 군단이라도 몰려온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농담에 불과했다. 그런데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했고, 농담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저거?’
선두에 선 거인의 등 뒤로 붉은 불빛들이 나타난다.
불빛?
아니, 저건 불빛이 아니다.
저벅, 저벅, 저벅.
풀을 밟는 발소리와 함께 붉은 불빛들이 천천히 앞으로 전진한다. 그 불빛의 정체가 거인의 뒤를 따르던 이들이 내뿜는 눈빛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켄드릭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핏빛 안광을 내뿜는 이들이 중앙의 거인을 중심으로 좌우로 도열한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과격한 기세를 흘려 대고 있었다.
짐승이 그로울링하는 것 같은 소리가 자꾸만 그의 귀를 파고든다.
심장이 덜덜 떨려왔다.
‘나는…….’
이런 것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고!
켄드릭의 눈동자가 다급하게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괜한 짓이었다.
좌우로 도열해 있는 이들도 딱히 그와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 다들 넋을 잃고 있다.
압도.
완전한 압도.
적을 상대한다는 의식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이해 불가능한 존재를 눈앞에서 맞닥트린 대가는 무지로의 회귀였다.
“크륵.”
거인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새어 나온다.
거인의 어깨선이 움찔움찔하는 순간, 켄드릭은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 나는 환상을 보았다.
아마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저 지옥의 거인이 달려드는 순간에 말이다.
그 순간이었다.
“왜 멈췄지?”
저벅저벅.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온다.
그러고 나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거인도, 그리고 그 거인의 주변을 채우고 있던 악귀들도 다들 얌전하게 자리를 내준다.
그러더니 순종하는 듯 고개를 숙인다.
좌우로 갈라진 길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켄드릭들을 압박하던 이들과는 다르게 새로 걸어 나온 이는 그나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동양인?’
새삼 깨닫게 된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이 동양인이라는 것을.
과거 몽골이 유럽을 침략했을 당시, 유럽인들은 몽골의 병사들을 군대가 아닌, 자연재해나 질병이라 생각했다는 말이 있다.
과거, 그들의 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켄드릭은 그 말을 비웃었다.
아무리 다른 인종이 서로 교류하지 않던 시대라고는 하나,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켄드릭은 과거의 유럽인들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의 켄드릭도 똑같으니까.
이런 이들을 상대하면서 상대가 같은 인간이라 여길 수 있겠는가.
이들은 동양에서 온 악마들이다.
그 악마들의 가운데 선, 유일한 인간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왜 멈췄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나라의 언어다. 그리고 굳이 켄드릭이 알아들을 필요도 없어 보인다. 저 사내의 말은 그가 아닌 거인을 향하고 있으니까.
“……다 죽여도 되나?”
“막아서는 이는 모두 죽인다. 그렇게 말했을 텐데.”
“음…….”
거인.
바토르가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여전히 혈기가 들끓고 있지만, 이전에 마공을 운용했을 때처럼 완전히 이성을 잃지는 않아 보였다.
그 말인즉, 바토르의 마공이 그새 더 깊어졌다는 의미다.
진짜 격전을 치른다면 이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겠지만, 지금처럼 딱히 힘을 쓸 필요가 없는 적을 상대할 때는 과도하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멈춘 것이다.
이들을 쓸어버리는 것은 딱히 어렵지 않다. 하지만 다짜고짜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는 이들을 쓸어버린다면, 이 광경을 잊지 못할 이가 있으니까.
바토르가 살짝 머뭇대자 강진호가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히 원하던 상황은 아니지만, 결국 제가 풀어야 할 문제 같습니다, 로드.”
위긴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이트 위긴스!’
켄드릭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지금 나온 이는 분명 나이트 위긴스였다.
켄드릭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로 나이트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나이트 위긴스가 왜 여기에?’
물론 처음에는 나이트 위긴스가 쳐들어왔을 가능성을 고려했다.
마스터가 구류된 상황에서 그를 구출하겠다고 움직일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이트 위긴스밖에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들을 직접 맞닥트린 순간, 그런 가능성은 머리에서 깔끔하게 사라졌었다.
그런데 나이트 위긴스가 저들의 사이에서 나온 것이다.
‘그럼 이들이 한국인이라는 건가?’
나이트 위긴스가 한국의 총회라는 곳에 투신했다는 것은 영국의 무인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정보였다.
동양인들, 그리고 나이트 위긴스.
두 가지 정보가 조합되는 순간, 도출되는 결과는 무척이나 단순해진다.
나이트 위긴스가 한국의 총회를 이끌고 이곳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총회에 대해 켄드릭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는 뭐가 많이 달랐지만.
“우선 바토르 님, 감사합니다.”
“흥.”
위긴스가 고개를 숙이자 바토르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도 강진호의 눈치를 살짝 보는 바토르였다.
강진호가 막는 이들을 모두 척살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자의적으로 멈춰 선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강진호는 그런 바토르를 탓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기회를 주십시오. 저들을 물러나게 만들겠습니다.”
“시간 끌어 좋을 게 없을 텐데?”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위긴스의 목소리에 살짝 간절함이 어렸다.
강진호가 미간을 좁혔다.
그의 기준으로 전장에는 단둘만이 존재한다.
적, 그리고 아군.
그 기준으로 볼 때, 저들은 적이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적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저들이 과거 위긴스의 부하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앞을 막아서는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방법 따위는 배운 적도 없고, 배우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강진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위긴스의 사정을 봐주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옛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강진호 역시 고향을 그리워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만, 결국 죽는 그 순간까지 한국으로 향하지 못했다.
그저 한국이라는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상황이 도무지 그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때 그의 모습이 지금의 위긴스와 겹쳐 보이고 있다.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로드.”
위긴스가 강진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평소의 장난기를 싹 뺀 담백한 인사이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경이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위긴스가 가라앉은 눈으로 켄드릭들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들이로군.”
이윽고 터져 나온 영어에 켄드릭이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저 동양인이 물러난 순간,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 형광이 충천하고 있다.
위긴스가 앞으로 나섰다고 해서 위기가 사라진 건 아니라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다.
위긴스의 시선이 좌에서 우로 천천히 움직였다. 단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그 눈에 담겠다는 듯 말이다.
“왜 이곳에 있는가?”
시선이 이동이 끝날 무렵, 위긴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나는 마스터를 구출하러 왔다.”
깔끔한 선언.
수십 마디의 구차한 말보다 간단하고 강렬한 한마디였다.
위긴스가 대체 어떤 말을 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이들은 갑작스레 날아드는 돌직구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마스터가 억류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 여기에 있는가?”
대답은 없었다.
“마스터를 억류한 이가 그 나이트 르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이곳에 있는가?”
말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미세한 동요는 확실히 흐르고 있었다.
‘당연하지.’
켄드릭이 이를 꽉 물었다.
굳이 말로 하지는 않아도 그 사실에 대한 불만은 모두에게 팽배해 있었다. 그 사실을 짚어내는데 동요가 없을 리 없다.
하지만 이걸 짚어내는 것이 위긴스에게 있어 꼭 이득만은 아니었다.
“나이트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자격이 있습니까?”
어디선가 떨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굳이 누가 말했는가를 찾을 필요가 없다. 저 말은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으니까. 누구의 입을 빌려서 나왔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생각해 보면 묘한 말이었다.
분명히 질책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위긴스를 나이트로 지칭한다는 측면에서는 공경을 담고 있다.
위긴스를 바라보는 이들의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이다.
“나이트께서 자리를 비우셨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아닙니까?”
한 번 말이 터지자 여기저기서 성토가 흘러나왔다. 짓눌려 있던 이들이 위긴스가 나서면서 긴장이 조금 풀린 덕이다.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위긴스가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위긴스가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확실히 나도 이 모든 사태에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려 하는 쪽이고, 너희는 그걸 막으려고 하고 있지. 어느 쪽이 옳은가를 굳이 내가 말해야 하겠느냐?”
“…….”
“시간이 없다.”
위긴스가 손을 들어 한쪽 옆을 가리켰다.
“나를 막는다면, 나는 너희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비켜서라. 그걸로 충분하다. 길을 열어라.”
미묘하게 시선이 오고 간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누구도 나이트 위긴스와 싸우고 싶지 않다. 더구나 저 괴물 같은 놈들을 이끌고 온 나이트 위긴스와는 더더욱.
하지만 이들은 쉽사리 물러서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의 눈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위에서부터 내려온 명령을 어긴다는 걸 생각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상대가 위긴스가 아니라면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과 타협하는 방법 따위는 배운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는 한때 그들의 상관이었던 사람이다.
그러니 고민할 수밖에.
그 순간이었다.
“뭣들 하고 있는 거냐!”
등 뒤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배신자의 말에 현혹되다니! 그러고도 너희가 자랑스러운 대영제국의 기사들이냐! 당장 저자를 죽여라!”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