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75
#974.
살육하다 (4)
“흐음.”
위긴스가 미간을 좁혔다.
“올드만인가?”
대답은 없었다.
배신자와는 말조차 섞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지, 그게 아니면 지금 이 상황에서 위긴스와 말을 섞어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계산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지 않군.’
어느 쪽이든 위긴스에게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라펠 올드만.
나이트를 보필하는 기사단장 중 하나다. 과거 위긴스가 나이트의 지위에 있을 때도 올드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단 하나의 문제가 있다면.
‘쓸데없이 강직하다는 거지.’
부리는 입장에서 원칙과 명령을 지독할 정도로 고수하는 부하는 써먹을 데가 많다. 전체를 운용하는 자는 변수를 가장 껄끄러워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를 상대하고 설득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다.
“나와서 이야기를 하지.”
대답이 없었다.
“내가 두려운 게 아니라면 나오지 못할 이유가 없을 텐데? 자네가 당당하다면 충분한 것 아닌가?”
살짝 도발을 섞는다.
효과가 있을까?
다행히 그런 모양이었다.
뒤쪽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올드만이 천천히 걸어 나와 위긴스와 마주 섰다.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이지만, 서로의 시선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미스터 위긴스.”
“오랜만이군, 올드만.”
위긴스가 살짝 입술을 축였다.
이 대화 하나로 너무도 많은 것을 결정 난다. 아무리 침착한 그라고 해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잘도 돌아오셨군요. 원탁에 배신자의 자리는 없다는 걸 알고 계실 텐데.”
“때로는 자신의 입장을 감안하지 않고 달려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던가?”
“좋은 말이군요.”
올드만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메시지라 해도 메신저가 올바르지 못하다면 의미가 없는 법입니다. 히틀러가 동물애호가였다고 해서 그의 동물사랑을 칭찬해 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죠. 알고 계실 텐데요.”
“…….”
“배신자의 말은 그 무엇도 무의미합니다, 미스터 위긴스. 우리는 당신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당신은 원탁의 적이고, 영국의 적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신을 단죄할 것입니다.”
“이보게, 올드만.”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고 있네. 나 역시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자네들에게 할 말이 없지. 하지만 단죄라는 건 힘이 있는 자가 하는 걸세. 자네가 나를 단죄할 수 있다고 보는가?”
“힘이 없다고 해서 물러나는 것은 비겁입니다.”
“힘없는 용기는 만용일세.”
“만용이라 할지라도 좋습니다. 저는 그저 원칙과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당신이 가르쳤던 대로.”
“그 대가로 이곳의 모든 이가 죽어 나간다고 해도? 자네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겠는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따위는 대영제국에 없습니다.”
위긴스가 살짝 이를 악물었다.
‘답답하군.’
한때는 저 강직함이 신뢰를 낳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바라본 올드만은 사람 속을 뒤집어놓을 만큼 꽉 막힌 사람이었다.
“자네의 고집 때문에 모두가 죽어가도 괜찮다는 건가?”
“쓸데없는 소리 늘어놓지 마십시오, 위긴스. 우리는 명령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 명령이 마스터의 목숨을 앗아가고, 영국을 나이트 르보의 발아래 놓이게 만들 걸세! 그걸 모른다는 말인가!”
“그게 원탁의 결정이라면 따른다. 당신이 가르친 것입니다. 아닙니까?”
“이…….”
위긴스가 막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였다.
파아아아앙!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그 섬뜩한 파공음에 위긴스가 눈을 부릅떴다.
이 소리는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소리였다.
파공음은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위긴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올드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보았다.
올드만의 목에 새빨간 선이 그어지는 것을.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던 올드만의 몸이 정지 화면처럼 굳어지더니, 그의 목이 기울어지며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툭.
고요한 숲속에 올드만의 목이 떨어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위긴스마저 할 말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됐다.”
강진호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하려던 위긴스가 두어 번 뻐끔거리고는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설득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위긴스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강진호가 나직하게 말했다.
“모두를 살리는 길 같은 건 없어.”
“……예.”
앞으로 나선 강진호가 본의 아니게 그를 막아서고 있는 영국의 무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기회는 이게 마지막이다.”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오자 시선이 조금 더 집중된다.
“살고자 한다면 이쪽.”
강진호의 손가락이 왼쪽을 가리킨다.
“죽을 자는 그 자리에.”
“…….”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움직여.”
위협 같은 건 없었다.
기세를 내뿜지도 않고,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저 담백하게 할 말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이 담백한 말이 세상 그 어떤 협박보다 무섭게 들렸다. 강진호는 자신을 막아서는 이들은 모두 죽는다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정해진 사실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확신이 어려 있는 말은 듣는 이들에게도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막아서는 이는 죽는다.
강진호의 뒤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마인들의 모습이 확신을 더해주었다.
탁.
어디선가 무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켄드릭의 눈이 뒤흔들렸다.
모든 일이 그러하든 시작이 어려울 뿐이다. 한 사람이 무기를 떨어뜨리자 여기저기에서 무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대열을 이탈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몇몇이 이동하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흐름이 바뀌었다.
단 하나라도 달랐으면 이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이트 르보를 지키고 마스터를 실각시키기 위해 절대 막을 수 없는 적과 상대해서 목숨을 버려야 한다.
이 엿 같은 상황을 받아들일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원탁의 명령을 어긴다는 유일한 가책은 위긴스의 존재가 해소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상사이, 명령권자였던 자다. 그런 이가 마스터를 구출하러 간다. 이 사실은 그들의 마지막 가책마저 덜어주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물러서는 쪽을 택한 건 아니었다.
팔 할에 가까운 이들이 옆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이 할에 가까운 이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엇이 이들을 버티게 하는 걸까?
신념? 그게 아니면 의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정광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이들을 보며 강진호가 미소를 지었다.
“선택은 끝났나?”
“…….”
“바토르.”
“말하라, 주인.”
“신념을 택한 이들이다. 존중할 가치가 있겠지.”
바토르의 눈이 빛났다.
왠지 그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곱게 죽여주도록.”
강진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토르의 몸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뒤를 마염들이 뒤따른다. 마기를 줄줄이 두른 바토르가 거대한 고함성을 지르며 막아서는 이들을 덮쳐 간다.
강진호는 그 광경을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위긴스를 향해 다가갔다.
위긴스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강진호를 마주 보았다.
강진호는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육에 딱히 관심이 없지만, 위긴스는 필사적으로 그 광경을 외면하고 있었다.
“위긴스.”
“……예, 로드.”
“정신 차려라.”
“…….”
위긴스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하는 자가 망설이면 피해가 늘어난다. 지휘하는 자가 감정에 휘둘리면 죽지 않아야 할 자가 죽는다.”
“……예.”
“한국에서 보여준 네 냉정함이 너와 관련된 이들이 없어서 나올 수 있는 것이었나?”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로드.”
강진호의 차가운 눈을 본 위긴스의 몸이 움찔한다.
“해야 할 일을 잊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 광경을 보며 위긴스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지휘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느꼈다. 마음만 먹으면 마스터나 강진호가 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위긴스는 자신의 부족함을 절절히 실감했다.
위에 서는 자의 자격은 단순히 계산에 능한 것이 아니다.
계산 따위는 대신해 줄 사람이 넘쳐 난다.
위에 서는 이에게는 과감성이 있어야 한다. 설사 그 결정이 잘못되었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일 수 있는 과감성.
위긴스에게는 그게 부족했다.
올드만이 그에게 반기를 든 이상, 원만한 해결은 불가능했다. 시간을 끌었다면 서로의 피해만 늘어났을 것이다.
그 순간을 해결한 것은 그가 아니라 강진호였다. 올드만의 존재를 배제해 버리면서 선택지를 좁혀 버렸다. 위긴스에게는 불가능한 결단이다.
위긴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잘난 듯이 조언을 할 수 있던 이유가 자신이 총회와 한국이라는 곳에서 한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 상황에 완벽하게 얽혀 있으면서도 과감하게 움직인 강진호가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망설이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은 그가 시작한 일이다.
그가 시작한 일을 다른 이들이 주도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건 모두에 대한 모독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모독이었다.
조금은 더 차가워진 얼굴로 위긴스가 고개를 돌렸다.
살육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기세가 꺾인 이들은 바토르와 마염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일방적인 학살.
위긴스는 이제 그 광경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낸 이가 그라면, 벌어지고 있는 일 모두를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한다.
그게 책임이라는 거니까.
막아선 이들이 모두 정리되고 나자 바토르가 마기를 풀풀 날리며 돌아왔다.
“……고통은 없었을 거다.”
바토르의 한마디에 위긴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바토르 님.”
“흠.”
바토르가 그를 지나쳐 가자 위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두어 번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안정시킨 그가 강진호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이제 문제가 하나 남았는데…….”
위긴스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바토르의 살육극에 완전히 질려 버린 영국의 무인들이 양손을 모은 채 도열해 있었다.
“저 녀석들을 어떻게 할까요, 로드?”
다시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위긴스를 보며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알아서 해.”
“감사합니다.”
위긴스가 저벅저벅 걸어 도열해 있는 이들에게 앞에 섰다. 그러고는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었다.
켄드릭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위긴스를 바라보았다.
순순히 이쪽으로 왔으니 죽이지야 않겠지만, 아직 위기가 끝났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 순간, 위긴스가 입을 열었다.
“선택지가 두 개가 있는데…….”
선택지?
무슨 선택지?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하지. 첫 번째는 얻어맞고 기절한다. 두 번째는 너희가 알아서 자체적으로 제압당할 방법을 찾아본다.”
“…….”
“자, 선택은?”
아무래도…….
저 사람, 좀 이상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