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80
#979.
침습하다 (4)
사람은 언제나 당당해야 한다.
이현수는 이 말을 진리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사실 그가 이 척박하고 잔인한 무인계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그를 죽일 수 있는 이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의지를 꺾고, 명을 내려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아슬아슬한 칼날 위를 걷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무인 중에 미친놈이 좀 많은가.
일반인 중에도 정상이 아닌 이들은 있다. 하지만 무인계에서는 그 ‘정상이 아닌’ 인간의 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평범한 이도 흥분하면 남에게 주먹을 날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무인들이 마음먹고 주먹이라도 날리면 이현수는 꼼짝없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현수가 택한 방법은 바로 당당함과 허세였다.
이곳은 정글과도 같다.
상대에게 겁을 먹었다는 인상을 조금이라도 내보이면 바로 잡아먹힌다. 싸워서 이길 수 없다고 하더라도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죽일 테면 죽여 봐라. 죽이지 못하면 네가 죽는다’라는 자세를 유지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이현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강진호의 휘하로 들어오면서 예전처럼 생존을 걱정하는 단계는 지났지만, 그럼에도 이현수는 자신의 기준을 관철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당은 얼어죽을.’
지금은 그놈의 당당함을 써먹을 데가 없었다.
당당함은 서로 대화를 할 때, 아니면 서로 위협을 할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막상 서로 주먹질을 하기 시작하면 당당함이라는 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당당하다고 맞은 데가 안 아픈 것도 아니고, 날아가는 주먹에 힘이 더 실리는 것도 아니다.
그 말인즉슨.
‘난 여기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거지.’
애초에 수준이 다르다.
이현수는 총회 최악의 무인이다. 나름 무학을 익히기는 했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무공에는 재능이 없었다. 무학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라면 평생을 운동치라는 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총회의 정예들과 영국, 유럽의 정예들이 맞붙는 곳이다.
조기 축구회 물주전자 담당이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출전한 꼴이다.
그러니 뭘 하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현수가 이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현수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조용히 박혀 있어야지.’
모두가 복도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이현수는 굳이 복도를 빠져나가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복도 벽면에 바짝 붙어서 숨을 죽였다.
잘 싸우고 있는 이들이 괜히 그에게 신경 쓰지 않게 존재감을 지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진짜 장난 아니네.’
이현수가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다르다.
지금 이곳에서 날뛰고 있는 이들은 그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이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저 새끼.’
지금 영국 무인 하나 위에 올라타 말도 안 되는 파운딩을 퍼붓고 있는 저놈은 마염 중에서도 성격이 너무 얌전해서 이현수가 걱정하던 녀석이다.
이름이 박상태였나?
어떻게 이런 녀석이 강진호의 테스트를 통과하고 마염이 되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대가 약한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런 놈이 지금 바닥에 쓰러진 사람 위에 올라타서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리고 있다.
“죽어! 죽어어어!”
……잘해줘야지.
얌전한 놈이 눈 돌아가면 더 무섭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다른 놈들 역시 마찬가지다.
마염들은 말할 것도 없다. 마염이야 총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미친놈들 집합소가 아니던가.
마염들이 미쳐 날뛰는 거야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미쳐 날뛰는 건 마염뿐만이 아니었다.
“다 박살 내버려! 뒤지지 마라!”
공영길이 고함을 지르며 앞쪽의 무인을 걷어찬다.
쾅!
사람이 사람을 걷어찼는데 해머로 타이어 후려치는 소리가 났다.
‘저 미친…….’
공영길은 예전에도 체격이 좋은 편이었다.
함께 다니던 이명환에 비하면 머리통 하나는 더 큰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공영길은 ‘체격이 좋다’라는 카테고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울룩! 불룩!
근육이 옷을 찢어버릴 듯 약동한다.
바토르가 대체 저놈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바토르와 수련을 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하나같이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있다.
딱 뭐랄까.
그래, 미니 바토르.
저 몸을 확대해 놓으면 딱 바토르가 될 것 같다. 기본적으로 덩치가 두 배 정도 차이 나서 바토르의 육체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위압감은 없지만, 지금 저 몸만으로도 일반인들은 오금이 저릴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몸이 커진 게 다가 아니었다.
바토르에게 사사하기 전에는 그저 총회의 젊은 무인에 불과하던 녀석들이 지금은 영국의 정예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대등, 아니, 그 이상으로.
그 광경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하지만 총회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하고 있었다. 그 변화의 결과물이 눈앞에 보이는 느낌이다.
저들은 강진호에게 딱히 받은 것이 없다.
물론 총회 자체가 강진호를 통해 변화했고, 바토르 역시 강진호 덕에 총회에 합류했으니 그 수혜를 받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저들의 무학은 강진호가 아닌 바토르의 것이었다.
무학의 다변화.
강진호에 마공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도 타국의 정예들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금 저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방 이사님이 하고 있는 일만 잘 풀린다면?’
방진훈 이사가 전수하고 있는 총회의 새로운 무학이 저 정도의 효율성을 내줄 수 있다면, 총회는 정말 강해질 것이다. 한두 명의 강자가 이끌어 나가는 허울 좋은 문파가 아니라, 진정으로 강한 문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마존께서 보고 계신다! 너희들의 신앙을 증명하라!”
장민 역시 평소와는 달랐다.
평소에는 얼이 빠져 있어서 이 사람이 과연 마교의 장로인가를 의심하게 만드는 장민이지만, 전장에 선 장민은 확실히 남달랐다.
표정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사람의 피를 들끓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그 카리스마는 위긴스와 바토르마저 능가하는 느낌이다.
‘과연.’
마교도들을 조사하는 와중에 그들의 충성심이 과도하게 장민에게 몰려 있다는 느낌을 받고 경계한 적이 있다. 장민의 강진호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의 여지조차 없고, 과한 측면까지 있기에 딱히 문제 삼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일만에 가까운 이들이 회주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것은 이현수의 입장에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경계의 와중에서도 대체 왜 저들이 장민을 그리 따르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지금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납득이 간다.
결국 카리스마는 반쯤은 타고나는 것이니까.
장민의 지휘를 받은 마교도들도 성난 늑대처럼 적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일만에 가까운 마교도들 중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다. 그들의 힘은 ‘중국의 마인들은 나약하다’는 선입견을 깨주기에 충분했다.
하나하나의 힘은 마염들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그들에게는 마염 이상의 독기가 있었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마인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게 된다면, 누구라도 오금이 저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미쳐 날뛰는 이들은 마염도, 마인들도 아니었다.
바로 슈발리에.
갑주를 갖춰 입은 슈발리에들은 정말 이성을 잃은 듯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이현수는 그런 슈발리에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저들은 원탁에게 버림받은 이들이다.
강진호를 죽이기 위해 한국이란 머나먼 나라까지 왔지만, 원탁은 저들을 구출하기 위한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버린 것이다.
충성하던 이에게 배신당한 이는 그 충성심 이상의 복수심에 불타기 마련이다. 총회에 협조하며 숨죽이는 동안 얼마나 이 순간을 꿈꿨겠는가.
“모두 쓸어라! 다 죽여 버려!”
뱅상이 목소리를 드높였다.
그의 목소리에 피가 맺혀 나오는 느낌이다. 더없이 강렬하고, 더없이 간절하다. 그리고 그의 명을 들은 슈발리에들은 대열을 도외시하고 날뛰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뭐라고 할까, 그러니까…….
‘개판 5분 전이군.’
대열이고 지휘 체계고 뭐고 없다. 다들 저 좋을 대로 날뛰고 있을 뿐이다. 대열을 정비해 주어야 할 바토르는 가장 앞에서 이성을 잃은 채 적을 휩쓸고 있고, 평소라면 냉정을 유지했을 위긴스조차 마법을 난사하는 중이었다.
지휘라는 개념을 조금이라도 머리에 가지고 있는 이가 이 광경을 보면 그 난잡함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그럼에도 이현수가 앞으로 튀어나가 소리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혼잡하고 난잡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강하다.
공동에 진형을 갖춘 영국의 무인들이 순식간에 쓸려 나가고 있었다. 이현수 스스로도 믿지 못할 강함이었다.
물론 강진호가 이미 저들의 기세를 박살 내놨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총회의 무인들은 강했다. 압도적으로.
‘이런 거로군.’
이현수는 그 모습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눈에 새겼다.
멀리 떨어져 지휘를 하는 것과 바로 옆에서 전투를 지켜보는 것은 그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지금 이현수가 평소처럼 뒤에서 상황만을 전달받았다면, 이들의 강함을 이렇게 생생하게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데려온 건가?’
결국 총회의 지휘관은 이현수다.
다른 이들이 현장에서 움직이는 현장 지휘관이라면, 이현수는 뒤쪽에서 전체 전황을 파악하고 지휘관들을 움직이는 총사령관에 가까웠다.
그런 만큼 이현수는 자신이 움직이는 이들이 얼마나 강한지, 어떤 곳에 활용되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확실히 알아야 한다.
지금 이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면, 이제까지와 같은 애매한 명령만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총회의 무인들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지 말이다.
“그만.”
그때, 강진호가 입을 열었다.
어느새 마기를 회수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간 강진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진 위엄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성을 잃고 날뛰던 이들이 강진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벼락에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썰물처럼 뒤로 물러난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강진호의 뒤편에 열과 오를 맞추어 도열했다.
이현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성과 야성의 조화.
이성의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던 이들을 순식간에 제어하는 모습. 이건 어쩌면 이현수가 그토록 바라던 이상적인 군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공포스럽겠지.’
마귀처럼 달려들던 이들이 한 사람의 명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모습을 반대편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모두가 괴물이 되어 날뛰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두렵지 않을까?
아마도 이현수의 예상이 정확한 모양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이 몸을 덜덜 떨면서 강진호를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이 마치 홀린 듯이 강진호에게로 꽂혔다.
그와 동시에 강진호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