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88
#987.
발휘하다 (2)
“소속사를 옮기라구요?”
“응. 생각 있어?”
강은영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조금은 새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짜 더럽게 예쁘네.’
최연하를 눈앞에서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같이 드라마도 찍었고, 강진호 때문에 몇 번 따로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최연하의 미모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일이 없었다.
워낙 하늘같은 대선배라 아우라에 눌리기도 했고, 강진호 이야기를 할 때는 은근히 푼수기가 느껴져서 미모가 빛을 바랬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역시 이 언니는 이럴 때가 쩐다니까.’
일 이야기를 하는 최연하는 포스가 남다르다. 다리를 꼰 채 등을 의자에 붙이고 있을 뿐이다. 그게 다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은 또 없을 거야.’
이제는 강은영도 연예계에서 신인 티는 벗은 사람이다.
솔로 여가수 가뭄인 지금 같은 시절에 강은영 정도의 경력이면 롱런이라는 말을 붙이기에 딱히 어색하지 않다. 공개방송을 나가도 이제는 인사를 하는 경우보다는 인사를 받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으니까.
이제는 나름 ‘중견’이라는 단어에 발 하나는 걸쳤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많이 여유로워진 강은영이지만, 최연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사람은 그녀가 데뷔하기 전에도 톱스타였고, 데뷔한 후에도 톱스타였다. 단 한 번도 발치에 따라가 보지도 못한 사람이다.
강진호와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강은영이 최연하와 독대를 하는 장면은 애초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쫄지 말자.’
강은영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최연하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녀도 강진호를 보며 자란 사람이다. 최연하의 포스에 눌릴 이유가 없다.
“좀 갑작스럽네요. 소속사를 바꾸라니.”
“코드 개판이던데?”
“…….”
“어차피 바꿀 생각 하고 있던 것 아냐?”
“어, 음…….”
말문이 살짝 막힌다. 보통 이렇게 돌직구를 던지나?
최연하가 피식 웃었다.
“이리저리 돌려 말하지 말자. 어차피 서로 바쁜 사람들이잖아. 탐색전이나 할 만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나는 그냥 서로 쿨하게 속내 까놓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는데?”
“……그건 동감이에요.”
강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연하와 기 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차피 질 테니까. 이 업계에서 최연하와의 기 싸움에서 이겼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왜 갑자기 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 양반이 알아보라고 하더라고.”
“오빠가요?”
“그럼 누구겠어.”
강은영의 시선이 미묘하게 최연하를 쫓았다.
‘오빠 쩌는데?’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분석을 부탁하는 건 친분이 있는 관계라면 흔한 일이니까.
‘이 언니에겐 흔하지 않은 일이라는 게 문제지.’
아니, 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천하의 최연하가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아 일을 대신해 주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 아닌가.
그만큼이나 강진호가 최연하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이가 꽤나 진척되었을 거라 짐작하기는 했지만, 이건 예상 이상이다.
“오빠가 부탁은 할 수 있다지만, 언니가 그 부탁을 들어주는 건 의외네요.”
“왜? 내가 들어주지 못할 이유라도 있어?”
“그런 거 귀찮아하시잖아요. 소속사 사장님이 대기업 회장님 생일에 참가 좀 해달라고 했는데도 그런 아줌마 보러 갈 시간 없다고 찼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그건 오해야.”
최연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 없어.”
“그럼요?”
“그딴 마귀할멈 생일에 기쁨조 하러 가느니, 집에서 게임이나 하겠다고 했지.”
“……오해가 있었네요.”
그것도 꽤나 심각한 오해가 있었다.
최연하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다른 사람이 한 부탁이라면 들어줄 이유가 없겠지만, 남자 친구가 부탁을 하는데 당연히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뭐?”
강은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 남자 친구?”
“몰랐어?”
최연하가 되레 놀란 얼굴을 했다.
“사귀어요?”
“응.”
“언제부터?”
“며칠 됐어. 뭐 그리 놀랄 일이야? 확정만 안 했다 뿐이지, 그전부터 빤한 일이었는데.”
“아, 아니…….”
강은영이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최연하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
혹시 주변에 이 말을 들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다행히 카페에 사람이 몇 없어서인지 들은 이는 없는 듯했다.
당황한 얼굴로 강은영이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그런 말을 뭘 대놓고 해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들으면 들으라지.”
“헐, 이 언니 미쳤나 봐.”
대선배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만큼이나 당황스러운 강은영이었다. 여자 배우에게 열애설이 얼마나 큰 타격인지 모를 최연하가 아닐 텐데, 왜 이리 대책이 없단 말인가.
“그러다가 열애설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음, 안 그래도 고민인데…… 어떻게 할까? 이리된 이상 어쩔 수 없다 그러고 결혼하자고 할까?”
“……겨, 결혼?”
강은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래도 이 여자,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최연하는 되레 그런 강은영의 반응을 이상하게 여기는 듯했다.
“뭘 그리 놀라?”
“안 놀라게 생겼어요? 결혼이라니. 언니 나이가 몇인데 결혼을 생각해요?”
“내 나이 정도면 슬슬 생각할 시점 아냐?”
“언니는 배우잖아요.”
“배우 중에서도 서른 전에 결혼한 애들 많아.”
“아니, 그래도…….”
최연하가 어깨를 으쓱한다.
“할리우드에서는 결혼하고도 잘나가는 여배우 천지잖아. 심지어 결혼도 몇 번씩 하고도 돈 쓸어 담는 애들도 많은데, 우리는 뭐가 무서워서 결혼도 못하고 빌빌대야 돼? 나 이제 그런 거 안 하려고.”
“…….”
말을 말아야지.
방향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최연하는 최연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무대포스러운 면은 강은영이 들어오던 최연하와 완전하게 일치했다.
“겨, 결혼은 혼자 해요? 오빠는 생각 없을 텐데!”
“안 그래도 그게 고민이야. 저걸 어떻게 해야 할지.”
최연하가 한숨을 푹 내쉰다. 그 모습을 보는 강은영은 지금 자기가 뭘 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야? 왜 니가 매달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최연하다.
아니, 물론 강진호는 대단하지. 평생 함께 살아온 강은영은 강진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릴 때는 딱히 그렇지 않았지만,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강진호는 말도 안 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사람의 기준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강진호는 아직 대학생에 불과하다. 최연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최연하가 강진호 따위(?)에게 이리 집착을 한단 말인가.
몇 번이나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강은영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최연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고 이유를 물을 자신이 없다. 그만큼 말주변이 좋지 않으니까.
“뭐, 됐어.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하던 말이나 마무리 짓자. 어때? 생각 있어?”
“생각이라뇨?”
“소속사 말이야.”
“일단 어디로 옮기라는 건지부터 설명을 해주셔야 생각을 해보든 말든 하죠.”
“빤한 거 묻네. 새로 만들 거야, 소속사.”
“네?”
“만들 거라고.”
“아…….”
강은영은 그제야 최연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독립하시는 거예요?”
“아마?”
“그럼 언니 새로 소속사 만드는 데 저더러 오라고 하시는 거죠?”
“그럴걸?”
“그럼 언니가 사장이고?”
“아니지.”
최연하가 딱 잘라 말했다.
“대표는 세아 씨 오빠. 나는 그냥 이사?”
“오빠가 사장요?”
“못할 거 없잖아. 돈이 없는 것도 아냐, 능력이 없는 것도 아냐. 문제되는 건 바쁜 것 하나밖에 없는데, 그건 다른 사람이 대신 일해주면 되는 거고.”
“아, 아니, 말이 쉽지…….”
“실제로도 쉬워.”
최연하가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세아 씨도 알 거 아냐. 이 바닥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지. 지금 잘나간다는 기획사 중에 정말 체계적으로 사업 시작한 데가 있어?”
“…….”
“그리고 뭐, 대단하게 일을 벌이겠다는 거 아냐. 나나 세아 씨나 눈치 보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활동 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거지. 그건 그렇게 어렵지 않잖아?”
강은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최연하 정도면 일인 기획사를 차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홍보도 필요 없고, 영업도 필요 없으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날아오는 캐스팅을 추릴 사람과 언론 대응할 사람만 있으면 된다.
강은영은 경우가 좀 다르다. 최연하와 다르게 강은영은 결국 가수이고, 가수는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 일인 기획사의 힘으로는 좋은 프로듀서를 섭외하고 좋은 곡을 받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최연하가 도와준다면 말이 다르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 하신 거예요?”
“사장이 짜증 나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계속 해왔어. 그런데 마침 기회가 온 거고.”
“기회요?”
“응. 좋은 기회지.”
강은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최연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일인 기획사를 차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라는 건 무슨 말일까?
강은영의 표정을 본 최연하가 알겠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세아 씨.”
“네?”
“일인 기획사를 차리면 내가 사장인 거잖아. 그지?”
“예.”
“내가 사장인 회사가 잘 돌아갈까?”
“…….”
강은영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최연하가 말한 좋은 기회라는 말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다.
사장이 된다는 건 회사를 자기가 운영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연예인 스스로 자신이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떤 식으로 스케줄을 짤 건지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최연하는 소속사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는 막무가내로 유명했다. 그런 사람이 사장 자리에 오른다면?
‘개판이 나겠지.’
스스로가 사장이니만큼 최대한 자제하려고 하겠지만, 애초에 그게 마음먹는다고 자제되는 것이었다면 최연하의 악명이 연예계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최연하는 통제해 줄 사람이 필요한 여자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럼 그걸 우리 오빠가 한다는 건가요?”
“응.”
“…….”
모든 대화를 다 들은 강은영의 감상은 단 하나였다.
‘아니, 이 언니는 대체 뭘 보고 우리 오빠를 그렇게 믿는 거지?’
강진호는 분명 뛰어난 사람이다.
동생으로서 가족으로서 강은영은 강진호를 믿고 의지한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강진호였다.
하지만 그건 강은영의 강진호의 동생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평가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강진호는 꽤나 충동적이고, 권위적이고, 때때로 무책임하며 대체적으로 어벙하다.
강은영은 이 사태에 큰 책임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최연하에게 현실을 알려줘야 한다.
“저기…… 언니.”
“응?”
“솔직히 믿기 힘든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지금 콩깍지가 씌신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시는 게…….”
최연하가 빙그레 웃는다.
“왜? 좋잖아, 콩깍지.”
“…….”
아무래도 이 여자도 답이 없는 모양이다.
아무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