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90
#989.
발휘하다 (4)
나이트 베슬리의 이가 부러질 듯 맞물렸다.
나이트들은 알고 있다.
그들이 서양 무인계의 정점에 이른 이들이라고는 하나, 동양의 지배자들과는 그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치욕스럽지만 이건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원탁은 세상을 조율한다.
그저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수많은 다툼에 직접 개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는 당연히 중국에 연관된 일도 있었다.
‘빌어먹을 삼왕.’
중국을 떠올리자 절로 가슴이 아려온다.
삼왕.
중국을 삼등분하여 지배하는 존재들.
원탁의 입장에서 그들은 정말 끔찍하고도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냉전이 종료되고 중국이 세상에 개입하기 시작하자, 자연히 중국과 원탁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거리가 떨어져 있기에 직접적인 충돌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중국은 그 이전까지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던 원탁 중심의 세계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정확하게는 그들의 방식을 고수한 것뿐이지만, 여하튼 중국의 자국 우선주의와 패권주의는 원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원탁은 그런 중국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드러난 세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지만, 무인계에서만큼은 세계의 주도권을 놓을 수 없지 않은가.
그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 곳이 티베트였다.
드러난 세계의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기 전, 중국의 무인들이 티베트를 공격했다. 원탁은 이 공격을 세계 질서에 반하는 패권주의라 받아들였고, 티베트를 지원하기 위한 병력을 파견했다.
그 결과는?
전멸.
이런저런 표현이 필요 없는, 깔끔한 결과였다.
심지어 나이트가 셋이나 포함된 병력이지만, 전투의 상황조차 제대로 전하지 못할 만큼 무참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몇 달 만에 유럽으로 돌아온 단 한 명의 생존자는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흑왕’이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원탁의 움직임은 삼왕이라는 이름 앞에서 번번이 좌절되고야 말았다.
결국 십여 차례의 패배를 반복하고 나서야 원탁은 무인계의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합리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고, 아무리 합리적인 의결 방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무인계에서는 힘이 전부다.
그리고 삼왕은 힘의 정점이었다.
힘에서 밀린 원탁은 결국 동아시아에서 손을 뗐다. 그런 후, 삼왕이 준동하지 않는가를 지금까지 감시하는 중이었다.
아무도 드러내서 말을 하지는 않지만, 삼왕의 존재는 원탁의 콤플렉스, 그 자체였다.
그렇지 않겠는가.
세계의 질서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원탁이 힘에서 밀려 개입할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명분을 뒤흔드는 현상이기도 했다.
더욱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원탁이 그나마 활동할 수 있는 이유가 삼왕이 서로 대립하느라 국외로 힘을 뻗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삼왕 간의 승부가 갈리고 중국이 일통된다면, 중국은 국외로 손을 뻗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 사실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중국의 내부에 개입할 수 없기에 손가락만을 빨고 있는 게 원탁의 현실이었다. 어설픈 개입은 그들을 자극할 것이 분명하기에 시도할 수 없고, 그렇다고 내버려 두자니 중국 일통 뒤에 벌어질 일들이 너무나 눈에 빤히 보인다.
원탁에게 삼왕은 그런 존재였다.
시급히 제거해야 하는 화약이나 다름없는 이들이지만, 너무도 강하기에 손댈 수 없는, 한없는 무력함을 되새기게 하는 존재.
그래, 삼왕이 그랬다.
그런데 오늘 그들에게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가 하나 더 생겨났다.
촤아아악!
나이트 베슬리가 필사적으로 몸을 뒤로 날렸다. 가슴팍의 갑주가 종잇장처럼 갈리며 가슴 근육이 길게 갈라진다.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저 무지막지한 괴물 놈이 휘두른 칼에 목이 날아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할 수 있는 베슬리였다. 물론 지금이 안도할 상황은 아니지만.
그리고 그때였다.
“끄으으윽.”
너무 긴장해서 고통이 느껴지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베슬리의 착각일 뿐이었다. 겨우 살아났다고 생각한 순간, 가슴에서부터 심장까지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상처가 나서 생기는 고통?
그런 게 아니다.
가슴으로부터 이질적인 기운이 그의 몸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몸 안으로 파고든 기운이 그의 육체 안의 마나와 충돌하며 몸 곳곳을 뒤집어놓는다.
“쿨럭!”
내장이 뒤흔들리며 목구멍으로 피가 역류했다.
‘겨우 작은 상처 하나 입었을 뿐인데.’
검에 실린 기운이 강하면 스치는 것만으로도 내상을 입을 수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걸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다.
저 괴물은 환상으로만 전해지던 영역을 현실에 강림시키고 있었다.
전신을 오러로 두른다든가, 기운으로 오장육부를 뒤집어 버린다든가. 그리고…….
움찔.
강진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혈광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베슬리의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눈빛으로 사람을 제압한다든가…….’
이건 숫제 괴물이다.
‘어떻게 이런 놈이 동양의 소국에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삼왕은 인정한다.
그들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중국인이다. 유럽 이전에 세계의 패자였던 중국이라면 그만한 힘을 가진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진호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무인이 아닌가.
역사도 없고, 힘도 없는 작은 나라의 무인이 어떻게 원탁의 나이트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만큼의 무력을 소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이트 베슬리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속을 뒤집어놓던 기운을 모두 해소했음에도 그의 손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지금 떨고 있는 건가? 내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몸은 솔직했다.
나이트 베슬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수많은 전장에서 단 한 번도 물러섬을 몰랐지만, 그건 나이트 베슬리가 용감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는 진정으로 두려움에 떨 만한 상황에 처해본 적이 없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강진호의 존재가 지금껏 그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꽈악!
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어 검을 잡는다.
손이 부러져라 힘을 주지 않으면 이 떨림을 감출 수 없다.
‘다른 이들도 다 같은 심정이겠지.’
두려울 것이다.
공포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다.
그들은 원탁 최후의 보루였다. 그들이 물러서면 아무도 이 괴물을 막을 수 없게 된다.
‘지원은?’
나이트 베슬리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향했다.
‘없다.’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강진호만이 아니다.
강진호가 이끌고 온 이들도 생각 이상으로 강했다. 아무리 입구가 좁아 수비하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는 하나, 저 소수의 인원만으로도 각국의 기사단들이 홀로 진입하는 것을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아니, 막아내는 정도가 아니다.
‘몰아붙인다고?’
처음에는 입구에 정렬했던 이들이 이제는 복도 안으로 밀고 들어가고 있었다. 복도에서 싸운다면 서로 비슷한 수끼리 승부를 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오히려 밀어붙인다?
‘저들이 기사단 이상으로 강하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기시단은 무력의 정화다.
각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무인들이 엄격한 심사와 훈련을 거쳐야 겨우 들 수 있는 곳이 기사단이다. 기사단에 들었다는 것은 국가가 인정한 최고의 무인이라는 증명과도 같다.
그런데 각국의 정예 기사단을 일개 국가가, 그것도 작은 반도에 자리한 소국의 무인들이 모조리 막아내다 못해 되레 밀어붙인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무시한 적은 없다.
이십 년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한국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국가다. 유럽에서도 한국 이상의 국력을 갖췄다고 자신할 수 있는 국가는 몇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드러난 세계의 이야기다.
무인계에서 한국은 제삼세계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들의 가치는 오로지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밖에는 없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이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몇 년 사이에 한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 있었다. 그걸 미리 알지 못한 것이 원탁의 큰 실수였다.
어떻게든 이 실수를 바로잡…….
파아아아앙!
그 순간, 귀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나이트 베슬리를 향해 시커먼 강기가 날아들었다.
“큭!”
양손으로 검을 움켜잡고 오러를 불어넣었다. 급격한 마나의 활용으로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쳤지만, 나이트 베슬리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심장이 터져 죽으나, 강기에 잘려 죽으나 어차피 결과는 같다.
“으아아아아아아앗!”
오러가 폭발하듯 분출된다. 제어를 잃기 직전, 어떻게든 검을 휘두른다.
콰아아아아아앙!
은빛의 오러를 실은 검과 검은색의 마강(魔剛)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나이트 베슬리가 걷어찬 공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끄으……윽.”
바닥에 처박히고도 몇 바퀴나 구르고 나서야 멈춰 선 나이트 베슬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바닥을 움켜잡는다.
눈과 코, 그리고 입으로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나왔다.
바닥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손목 위로는 감각이 없다. 아마도 뼈는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일어나야 한다.
“끄윽…….”
나이트 베슬리가 부들부들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전혀 감각이 없지만, 그의 손은 그대로 굳어버린 듯 검을 확실하게 움켜잡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이 검을 놓쳤다면 다시는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칠공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나이트 베슬리는 어찌어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검을 들어 강진호를 겨눴다.
“흐음?”
혈광을 담은 강진호의 시선이 나이트 베슬리를 응시했다.
나이트 베슬리의 힘으로는 그의 마기를 제대로 막는 게 불가능했다. 그런데 기어코 그것을 막아내고, 박살이 난 몸으로도 저항의 의지를 꺾지 않고 있었다.
“이곳에도 쓸 만한 자가 있군.”
강진호의 말을 들을 나이트 베슬리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결코 웃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가 지금까지 만난 이들 중 최고의 무인이 그를 칭찬하고 있는데.
적이 보내는 순수한 감탄은 무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전장에서 살고 전투로 죽는 무인은 아군이 아니라 적에게 인정받아야 하는 법이니까.
그 순간이었다.
강진호의 몸이 갑자기 확 커진다.
아니, 커진 게 아니다.
강진호가 앞으로 달려오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인 것이다.
나이트 베슬리의 눈이 더없이 크게 떠졌다.
쾅!
그리고 그의 명치에 강진호의 발이 꽂혔다.
거대한 트럭에 부딪친 것처럼 나이트 베슬리가 피를 뿜으며 허공을 날았다.
“하지만 어설퍼.”
바닥에 떨어져 의식이 끊기기 전, 나이트 베슬리의 귓가에 마지막으로 들린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