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92
#991.
상대하다 (1)
“후욱! 후욱! 후욱!”
계단 아래로 내려온 나이트 르보가 두려움이 가득 찬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없어!’
다행히 강진호는 그를 쫓아오지 않았다.
분명 나이트들이 그를 막아설 테고, 이 신전 안에도 방어 마법이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강진호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되지 않았다.
‘저건 악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
마스터는 알고 있던 것이다.
강진호가 어떤 존재인지, 그가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국까지 가서 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그런데 왜 그런 것을 설명해 주지 않았단 말인가.
‘빌어먹을 늙은이 같으니!’
그 여유만만하던 얼굴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왕 말을 해줄 것이라면 그딴 식으로…….
“악마가 올 걸세.”
나이트 르보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빌어먹을.’
마스터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구구절절이 말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차피 믿지 않을 테니까.
저런 이가 있다고, 그리고 저런 이가 하필이면 한국에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마스터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한들,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 탓이 아니라고.’
이건 전부 저 강진호라는 놈이 상식을 벗어난 탓이다.
부르르.
강진호를 생각하자 나이트 르보의 몸이 절로 떨려왔다.
그 소름 끼치는 핏빛의 눈동자.
그건 마치 악몽 같았다.
막을 수가 없다.
강진호뿐만이 아니다. 한국에서 온 놈들은 그 악마의 군단 같았다. 생전 본 적도 없는 시커먼 기운을 줄줄이 뿜어 대며 짐승같이 날뛰는 놈들.
저런 놈들이 대체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중국에 마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들은 나약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들은 대체 뭔가, 대체!
“후욱! 훅!”
나이트 르보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잡념들을 밀어내고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저놈이 악마든, 아니면 그 비슷한 무언가이든!
저들이 원탁에 쳐들어와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이트 르보가 전력으로 달려 나갔다.
복도는 나선형으로 아래를 향해 이어졌다.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 감도 오지 않을 만큼 달린 끝에 나이트 르보의 시선에 새하얀 빛이 들어왔다.
‘여기인가?’
홀의 지하에 나이트의 신전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오로지 마스터만이 출입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모습을 보는 것은 르보 역시 처음이다.
“후욱!”
숨을 가다듬으며 속도를 줄인다. 쫓아오는 기척이 없으니 안심해도 되겠지. 아무리 강진호가 은밀하다고 해도 겹겹이 가로막혀 있는 방어 마법진을 소리 없이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일단은 진정해도 된다.
마침내 멈춰 선 나이트 르보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게 진정한 원탁의 모습인가?”
신전이라고 하기에 조금은 종교적인 모습을 상상했지만, 막상 신전의 모습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고풍스럽기 짝이 없는 홀.
그리고 낡아빠진 커다란 원탁과 그 주변으로 놓여 있는 열세 개의 의자.
과거의 언젠가 존재했던 원탁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열세 개의 의자 중 두 개는 비어 있고, 남은 열한 개의 의자에는 풀 플레이트 메일을 갖춰 입어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기사들이 정좌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처음에는 반짝였을 갑옷에는 녹이 쓸어 있었고,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마치 이야기책에 나오는 광경 같다.
나이트 르보는 그 광경에 자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꿀꺽.”
절로 마른침이 넘어간다.
저들이 바로 원탁의 진정한 기사들.
엘더 나이트.
원탁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고, 영원히 잠든 이들이다.
솔직히 나이트 르보는 원탁을 그리 소중히 여기는 이가 아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원탁을 이용할 뿐, 스스로 원탁을 수호한다는 사명감 같은 건 딱히 없다.
그럼에도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를 경건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원탁을 경애하는 마음이 없다고 해도 스스로의 삶을 원탁에 바친 이들을 어찌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깨워야 하지?’
마법의 잠에 빠진 이들은 깨우는 법 따위는 배운 적도 없다.
단서가 되는 것은 하나.
나이트 르보가 품 안에서 보구를 꺼냈다. 열십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손바닥만 한 금속.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보구의 겉면은 룬 문자가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이걸…….’
나이트 르보의 눈이 빛났다.
나이트들이 둘러앉아 있는 원탁의 중앙에 열십자의 홈이 보인다. 그가 들고 있는 보구와 같은 크기였다. 이것까지 보고도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면 바보나 다름없다.
나이트 르보가 원탁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고는 마른침을 삼키며 보구를 십자의 홈 위에 올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예를 들면 ‘마스터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라든가.
그게 아니라면 ‘불민한 자가 나이트들의 영면을 깨우노니, 부디 용서하소서’라든가.
나이트 르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듣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그런 짓거리를 한다는 건 한심한 일일 뿐이다.
짧게 심호흡을 한 나이트 르보가 보구를 홈에 맞추고 꾹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그의 힘으로 들어가던 보구가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저절로 원탁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이트 르보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아…….”
보구가 빨려 들어간 홈에서 백색의 빛이 뿜어져 나와 천장을 비춘다. 천장에 그려진 커다란 마법진이 백색의 빛에 호응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짐작도 할 수 없군.’
마법은 여전히 유럽의 한 축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현재의 마법은 감히 고대의 마법과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유럽을 휩쓴 종교재판과 이단심문의 칼날은 원탁마저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마법의 유산들이 실전되었고, 잊혀졌다.
지금도 과거의 마법을 연구하고 복원하는 과정이 계속 진행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과거의 경지를 되찾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마법사 이상으로 마법에 해박한 나이트 르보조차도 지금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복잡한 마법진이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지, 대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이트 르보가 뒤로 두 걸음 더 물러났다.
눈부신 빛이 조금 약해진다 싶더니, 열세 줄기의 빛이 원탁을 둘러싼 의자를 비추기 시작했다.
강렬하게.
신성한 광경이었다.
한참 동안 내리비추던 빛이 순간적으로 명멸한다. 그와 함께 신전은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나이트 르보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끝인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이트 르보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뭔가 실수라도 했나? 아니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그때였다.
그극.
쇠와 쇠가 마찰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다. 나이트 르보가 눈을 크게 뜨고는 전면을 바라보았다. 의자에 정좌해 있던 갑옷들이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갑옷을 입고 영원의 잠에 빠진 이들이 지금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그그극, 그극.
갑옷들이 움직이면서 녹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나이트 르보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신성스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지만, 시선에 따라서는 조금 괴기롭게 보이기도 하는 광경이었다.
그극! 그그극! 그극!
들려오는 소리가 점차 커지면서 갑옷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열두 개의 투구가 일제히 나이트 르보를 향해 돌았다.
그와 동시에…….
번쩍!
투구를 넘어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에 나이트 르보는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평소 다른 이들에 비해 간담이 크다고 자부하는 나이트 르보였고, 실제로도 담대하다는 평을 받기에 충분했지만, 지금 이 광경만은 침착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그 순간, 아주 거칠고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를 깨운 게 그대인가?”
누가 말하는 거지?
정확하게 누가 말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일단 나이트 르보는 대답부터 했다.
“……그, 그렇습니다.”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군.”
“마지막 엘더 나이트께서 잠에 든 이후로 삼백 년이 흘렀다고 알고 있습니다.”
“삼백 년이라…….”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삼백 년이라는 말에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삼백 년 만에 깨어났다는 말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군. 삼백 년이나 원탁에 중대한 위기가 없었다는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이나, 시간의 흐름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갔겠지.”
“……엘더 나이트이시여.”
“쓸데없는 말을 했군. 됐다. 그래서 그대가 당대의 마스터인가?”
나이트 르보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지금의 마스터입니다.”
“그대가?”
“…….”
살짝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다.
투구들이 살짝살짝 흔들린다. 마치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이.
“복색으로 보아 나이트인 것 같은데?”
“오늘 제가 마스터의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오늘 마스터가 된 자가 우리를 깨웠다라…….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 같군.”
“설명하자면…….”
“됐다.”
가장 앞에 선 자가 팔을 내저었다.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할 뿐이다. 적에게 안내해라. 감히 원탁을 침범한 이들에게 그 죄를 깨닫게 해주겠다.”
나이트 르보의 눈이 환호로 가득 찼다.
엘더 나이트들을 움직이는데 성공했다. 제아무리 강진호가 강하다고 한들 이들을 이겨낼 수는 없을 것이다. 강진호가 악마라면, 이들은 악마를 잡는 사냥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안내하겠습니다.”
“그전에…….”
“……예?”
그극 소리를 내며 투구가 나이트 르보를 똑바로 바라본다.
“우리를 깨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똑바로 인식하기 바란다, 어린 마스터여. 우리는 원탁의 적을 베는 검이고, 원탁의 이치를 바로잡는 저울이다. 이 위기를 초래한 자가 그대라면 그대 역시 우리의 검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원탁 외부의 적뿐 아니라 원탁 내부의 적 역시 심판한다.”
“…….”
“힘에는 합당한 책임이 따르는 법. 그대들이 저지른 죄악은 그대들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안내하라.”
투구를 넘어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적에게는 죽음을.”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들어 자신의 머리 앞에 가져다 댄다.
“적에게는 죽음을!”
나이트 르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느껴진다.
이들이 가진 힘이.
현대의 나이트이자, 마스터의 자리에 오른 나이트 르보조차 은연중에 뿜어지는 이들의 힘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원탁의 진정한 힘.
마스터만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강대한 힘이었다.
나이트 르보가 입술을 핥았다.
‘위긴스, 너는 너무 늦게 왔다.’
이제 반격을 시작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