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94
#993.
상대하다 (3)
“여, 여긴?”
“긴말하지 않겠네.”
위긴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 역시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 표정을 본 초병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를 알고 있지 않나.”
“……그렇습니다, 나이트.”
“위긴스라 부르게. 나는 지금 나이트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닐세.”
초병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위긴스가 더 이상은 원탁의 소속이 아니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기에 초병을 살려줄 이유도 없다는 뜻이다.
“문을 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야. 시간이 더 걸릴 뿐이지. 선택하게. 굳이 나와 맞서서 저 문을 지켜 몇 시간을 버는 대가로 목을 내놓든가, 그게 아니면 지금 당장 문을 열든가.”
초병이 기억하는 나이트 위긴스에게서는 결코 나오지 않을 강렬한 협박이었다.
초병이 떨리는 눈으로 위긴스와 그 뒤를 지키고 있는 가터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왜 가터까지?’
위긴스가 다른 이들을 이끌고 왔다면 생각을 조금 더 해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긴스가 가터 기사단을 이끌고 온 건 말이 다르다.
가터 기사단은 영국의 상징이다.
그들은 나이트의 명을 받들어 영국의 적을 격파하는 이들이다. 그런 가터 기사단이 위긴스를 호위한다는 것은 이들이 나이트 채드윅이 아니라 위긴스를 나이트로 받든다는 의미였다.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초병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을 지키는 것이 그의 역할이지만, 이들 앞에서 문을 지킨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위긴스의 말대로 그가 죽음으로써 이 문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위긴스는 결국 문을 열어버릴 것이다. 위긴스는 그가 아는 한 가장 훌륭한 마법사 중 하나이니까.
이들이 마스터와 접촉하는 것을 단 몇 시간 늦추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다.
물론 초병은 이들이 몇 시간의 시간을 허비한 탓에 다른 곳에서 지원이 와 결국 문을 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의도적으로 잊었다.
“열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이네.”
위긴스의 대답을 들은 초병이 슬쩍 고개를 들어 기사단 쪽을 바라보았다. 선두에 선 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혹여 일이 잘못되더라도 그를 변호해 주겠다는 의미다.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한 초병이 품 안에서 열쇠를 꺼내 위긴스에게 넘겼다. 위긴스가 열쇠를 받아 들고 문에 그려진 마법진에 가져다 댔다.
위이이이잉!
순간, 어울리지 않는 기계음이 들리더니, 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위긴스는 초병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지하 감옥의 퀴퀴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아래로 이어진 계단을 전력으로 질주한 위긴스가 마침내 바닥까지 내려왔다. 그의 눈에 가장 끝에 있는 감옥이 들어온다.
“마스터!”
마스터의 모습을 확인한 위긴스가 감옥으로 달려가 창살을 움켜잡았다. 낡은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던 마스터가 천천히 눈을 뜬다.
“……위긴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결국 자네가 와버렸군.”
마스터의 얼굴이 회한으로 가득 찼다.
위긴스가 올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오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무엇을 바랐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마스터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자네가 왔다는 건…… 그 사람도 왔다는 뜻이겠지.”
“마스터, 지금 당장 꺼내 드리겠습니다.”
“……슬픈 일이로군.”
마스터가 미묘한 표정으로 창살을 바라보았다.
이 창살 안에 그를 가둔 것은 나이트 르보다. 아니, 정확하게는 나이트 르보가 장악한 원탁이었다. 아무리 나이트 르보가 간악한 짓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원탁을 장악한 그의 수단은 정당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그는 원탁의 적의 도움을 받아 원탁의 명령을 거부해야 하는 상황이다.
“내게는 거부권이 없겠지.”
“마스터.”
위긴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필요에 의해 이곳에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스터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가 얼마나 큰 딜레마에 시달리고 있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수단에 함몰되어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스터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말을 조심해야 해. 언젠가는 내가 내뱉은 말이 나를 찌르기 마련이거든.”
낮게 웃은 마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게나. 나는 이곳에서 나가겠네. 이미 대세는 기울었겠지.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네.”
마스터의 말에 위긴스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검을 뽑아들고는 숨을 골랐다.
“물러나십시오, 마스터. 조금 거칠 수 있습니다.”
“……이보게, 위긴스.”
“예?”
“바로 뒤에 열쇠가 있네.”
“…….”
위긴스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벽에 열쇠가 걸려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쓸데없이 힘자랑하지 말고, 열쇠 가져와서 열게나. 이 창살도 원탁의 기물이네.”
“예.”
조금 머쓱해진 위긴스가 종종걸음으로 열쇠를 가져와 감옥 문을 열었다. 그러고도 여전히 어색함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내뱉었다.
“초병들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빤히 보이는 곳에 열쇠라니.”
“마법진으로 마나를 쓰지 못하게 막아뒀는데, 저 먼 거리에 있는 열쇠를 무슨 수로 가져온단 말인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게.”
“……예.”
위긴스가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을 좀 하더니 마스터의 성격이 좀 나빠진 느낌이다.
“그래서 지금 상황은?”
마스터의 질문에 위긴스가 얼굴을 굳혔다.
“나이트 르보가 신전을 열었습니다.”
“흠…….”
마스터의 목소리가 침중해졌다.
“……좋지 않은 선택을 했군.”
신전을 연다는 것은 마지막 선택지다. 엘더 나이트들은 원탁을 위해 자신의 생을 포기한 이들이다. 그들은 원탁의 위기를 막는 동시에 원탁을 정화하는 존재들이다.
그 어떤 식이든 원탁의 심층부까지 적이 쳐들어오게 만든 것은 마스터와 나이트들의 실책이다. 그리고 엘더 나이트들은 그 실책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엘더 나이트들이 승리하든, 강진호가 승리하든 나이트 르보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가보세나.”
“예.”
마스터가 무거운 걸음을 뗐다.
발이 바닥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지만, 더는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극단으로 흘러가 버린 사태를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이 일의 결과가 원탁의 붕괴가 되든 원탁의 부활이 되든, 그에게는 이 변화를 지켜볼 의무가 있었다.
* * *
나이트 베슬리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마치 고풍스러운 올드 무비의 한 장면이 현실과 섞여드는 것과 같은 이질감. 더없이 익숙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모습을 보는 심정이었다.
그만큼이나 그 모습은 기이했다.
철컥철컥.
잔뜩 녹이 슨 갑옷을 갖춰 입은 이들이 절도 있게, 아니, 절도 있으면서도 자유롭게 계단을 올라오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조금은 껄끄러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저들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 나이트 베슬리조차도 경건함과 존경심보다는 괴기로움을 먼저 느꼈다.
철컥철컥.
모두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하는 이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이들도 저들이 심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만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열한 명의 기사가 모두 계단 위로 올라왔다.
조금은 태평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속도였다. 적을 맞아 달려온다기보다는 사열을 위해 느긋하게 움직이는 듯한 속도다. 그리고 모든 기사들이 홀로 올라오고 나서야 계단에서 나이트 르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신전으로 내려갈 때의 다급한 얼굴과는 달리 나이트 르보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쳐 났다. 그 모습을 본 베슬리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나이트 르보가 그들을 뒤로하고 신전으로 들어간 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감정적으로 동조하여 같이 죽음을 선택할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되니까.
하지만 그가 몸을 빼는 걸 도와주기 위해 죽어간 나이트들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저런 얼굴로 올라와서는 안 된다.
절대로.
‘마스터였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적어도 그분은 수치가 뭔지는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절로 이가 맞물렸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마스터를 몰아내고 나이트 르보를 마스터로 옹립한 것이 바로 그들인데.
하지만 이건 그 대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뼈저렸다.
허탈함과 분노가 뒤범벅된 얼굴로 나이트 베슬리가 나이트 르보를 노려보았다. 그의 들끓는 감정이 절로 느껴졌는지, 엘더 나이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나이트 베슬리를 바라본다.
“나이트?”
나이트 베슬리가 몸을 떨었다.
잔뜩 쉰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이트 베슬리가 몸을 떤 것은 그의 목소리가 쉬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목소리에 어려 있는 조롱과 경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원탁도 몰락했군. 저런 이가 나이트라니.”
“기운을 보아하니 보헤미아 같소.”
“다른 이들 역시 별다를 게 없다.”
조롱과 함께 은은한 분노가 느껴졌다.
“길고 길던 시간 만에 다시 세상의 공기를 맡는다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지. 하지만 저들은 내 즐거움을 슬픔으로 바꾸는군.”
“그리 실망할 것 없소, 나이트 가웨인. 삼백 년 전에도 똑같은 기분을 느꼈지. 결국 세상은 기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어간다는 뜻이겠지. 앞으로 몇 백 년만 더 지나면 기사의 대가 끊길지도 모르지.”
“슬픈 일이군. 기사 같지 않은 이들이 기사를 자칭하는 시대라니.”
더없이 모욕적인 말이지만, 나이트 베슬리는 쉽사리 경거망동할 수가 없었다.
이들이 누구인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엘더 나이트.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이트였던 이들. 아니, 그의 국가가 세워지기 이전에 이미 나이트였던 이들. 그 강대하기 짝이 없는 무력을 인정받아 원탁에 자신의 삶을 바칠 자격을 얻고, 그 고행이나 다름없는 삶을 기쁘게 받아들인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그를 멸시한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불만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게다가…….
‘빌어먹을, 딱히 틀린 말도 아니야.’
느껴진다.
이들이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거대한지.
그저 마주 바라보는 것만으로 심혼이 얼어붙을 것 같은 느낌이다. 같은 기사이기에 더 잘 알 수 있었다.
“기이한 일이오.”
엘더 나이트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원탁은 기사라고 할 만한 이가 존재하지 않소. 오히려 인정해야 할 만한 기사는 저기에 있소.”
엘더 나이트들의 시선이 강진호에게로 향했다.
검을 늘어뜨리고 있는 강진호를 바라보는 엘더 나이트들의 눈에 백광이 솟구쳤다.
“과연.”
“적이지만 훌륭하다.”
“하나 적은 적.”
“적에게는 죽음을.”
“적에게는 죽음을!”
엘더 나이트들의 웅장한 외침이 강진호에게로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