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996
#995.
상대하다 (5)
양손에 검을 들고 자세를 잡은 강진호의 몸에서 살벌한 위압감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기세와는 다르다.
진득하고 소름 끼치는 살기.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통제를 잃고 날뛰기 시작한다.
‘흡사 짐승을 보는 것 같군.’
짐승이라기보다는 야수가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것도 그냥 야수가 아니었다.
“펜리르가 세상에 내려온 것 같군.”
“그럼 지금이 라그나로크라는 건가?”
“그렇지는 않겠지. 우리는 신이 아니니까. 하지만…… 저자가 멸망의 야수가 될 조짐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이제는 원탁의 의무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이었다.
저자는 위험하다.
너무도 위험하다.
엘더 나이트들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저자는 단순히 원탁에만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다. 저 악마를 연상케 하는 기운을 감안한다면, 이곳에서 저자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온 세상이 저 야수의 발톱에 신음하게 될 것이다.
“죽여야겠군.”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사들이 마나를 끌어 올렸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그들의 갑옷을 빛나게 만든다.
그러자 변화가 일어났다.
낡고 오래된 갑옷에서 녹이 떨어져 나가며 광채가 뿜어진다. 그러더니 갑옷의 형상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흠?”
강진호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중원에서 수많은 사술을 경험한 그에게 있어서도 이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신기한 일이었다.
‘마법이란 건가?’
갑옷이 변화한다. 그것도 모두 동일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형태의 갑옷이 각각 다른 모양으로 변화한다. 어떤 이의 갑옷은 더없이 화려한 백색의 갑주로 변했고, 어떤 이의 갑옷은 더없이 무거워 보이는 중장갑으로 변했다. 개중에는 갑옷의 형태가 완전히 사라지고 가벼운 로브 차림이 된 이도 있었다.
‘신기하군.’
마법이란 알면 알수록 신기한 기술이었다. 한 번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건 마음뿐이다.
굳이 저런 잡기(雜技)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저건 그저 편리하고 신기한 기술에 불과하니까. 강진호가 추구하는 강함과는 거리가 있다.
답답해 보이는 투구가 사라지고, 마침내 드러난 얼굴들은 생각 이상으로 젊었다. 나이가 든 나이트들이 엘더 나이트가 되었다면 대부분은 노인이어야 할 텐데,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이도 장년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 역시 마법의 효능인지, 아니면 저들이 나이가 들지 않은 채 엘더 나이트가 되었는지.
‘상관없겠지.’
어차피 죽을 테니까.
느껴진다.
저들의 힘이.
홍왕의 태산처럼 웅장하게 끓어오르는 장대함과는 다르다.
오히려 신성함에 가까웠다.
생각 이상의 강함, 기대 이상의 강함이었다.
갑옷을 바꿔 입은 것만으로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힘이 느껴진다.
강진호의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간다.
손등의 솜털이 곤두서고 있다. 그의 육체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그가 상대해야 할 이들은 ‘진짜’라고.
‘아쉽군.’
중원을 제패하는 건 세상의 모든 강자를 꺾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강진호가 중원을 지배한 그 당시에도 유럽에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과 면면은 조금 달랐을지 모르지만, 엘더 나이트들은 분명 존재했다.
그렇다면 그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강자들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을까?
당시에는 한없이 넓다고 느껴지던 중원이 지금에 와서야 좁은 우물이었다는 걸 실감하는 중이었다.
“나는 가웨인이다.”
가장 앞에서 장창을 든 엘더 나이트. 스스로를 가웨인이라 소개한 이가 강진호를 향해 장창을 겨누었다.
“긴장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동양의 마귀여. 우리는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 너를 쓰러뜨릴 테니까.”
“……하지만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긴 롱 소드를 든 엘더 나이트가 가웨인의 옆에 서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원탁의 기사들이 단 한 사람을 상대로 공격을 펼치는 건 이것이 처음이니까. 그리고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자부심을 가지고 죽어가도 좋다.”
강진호가 피식 웃고 말았다.
자부심이 있겠지.
저들은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시대에 자신보다 강한 이를 만나본 적이 없을 테니까. 그러니 원탁의 선택을 받아 원탁의 수호자가 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글렀어.’
저들은 무인이 아니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인지는 몰라도 시대를 뛰어넘어 상대를 만난 감상이 강진호와는 전혀 다르다. 강진호는 시대를 뛰어넘어 또 다른 강자를 만난 기쁨을 느끼고 있는 반면, 저들은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알려줘야겠지.
저들이 알던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
그 좁은 세상에서 왕의 행세를 해 대는 것이 얼마나 병신 같은 짓인지.
그리고…….
강하다는 게 무엇인지.
강진호의 손이 적루를 꽉 움켜잡는다.
“좀 더 지껄여도 돼.”
강진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의 발밑에서부터 검은 마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처음에는 기류처럼 그의 발끝을 맴돌던 마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치며 강진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러고는 이내 불꽃처럼 검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는 지껄일 수 없을 테니까.”
쇠를 긁는 듯한 음성.
천하의 엘더 나이트들조차도 그 광경에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진짜 악마인가?”
“적어도 모습에서는 부족함이 없군. 삼백 년 만에 깨어나서 만난 상대가 악마라니.”
긴장감은 느껴진다.
하지만 공포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름값에 걸맞게 엘더 나이트들은 강진호의 모습을 보고도 투쟁심을 잃지 않았다.
“적에게는 죽음을.”
“적에게는 죽음을!”
홀을 쩌렁쩌렁 울리는 구호와 함께 엘더 나이트들이 강진호를 향해 돌진했다.
줄기줄기 혈광을 뿜어내던 강진호의 입가가 일렁인다.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강진호도 그들을 향해 마주 달려 나갔다.
콰득!
장창을 움켜잡은 가웨인이 마나를 있는 대로 밀어 넣었다. 그의 창이 백색의 광채를 발한다.
“우오오오오오!”
가웨인의 창이 회전하며 앞으로 뻗어졌다.
위이이이이이잉!
그와 동시에 장창의 앞에서 거대한 기류가 만들어진다. 소용돌이치듯 회전하는 기류가 폭발적으로 앞으로 뿜어져 나간다. 백색의 소용돌이가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겠다는 듯이 강진호를 향해 날아들었다.
강진호의 눈가가 꿈틀한다.
적루가 날아오는 소용돌이를 세로로 베어낸다. 기류가 좌우로 갈라지며 홀의 벽면을 강타했다.
카가가가가가가각!
스크루에 자갈이 빨려 들어간 듯한 소리와 함께, 소용돌이가 홀의 벽면을 그대로 뚫어버린다. 마법으로 강화된 벽조차 가웨인이 만들어낸 기류를 버티지 못했다.
벽면에 시커먼 구멍이 만들어진다. 어디까지 뚫고 들어갔는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오오오!”
가웨인이 다시 창을 찔러 댄다.
한 번 찌를 때마다 하나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진다. 십여 개의 소용돌이가 강진호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적루와 청루를 둘러싼 불꽃이 폭발적으로 타올랐다.
우우우웅!
공명하듯 떨어 대던 적루와 청루가 어지러이 공간을 가른다. 타오르는 검은 화염의 벽이 가웨인의 소용돌이를 모조리 집어삼킨다.
‘삼켜?’
막아낸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집어삼켰다. 압도적인 기운으로 상대의 기운을 말 그대로 소멸시킨 것이다.
“흐읍!”
가웨인이 헛바람을 삼켰다.
그의 볼텍스(Vortex)를 막아낸 이가 없던 것은 아니다. 이곳에 있는 다른 엘더 나이트들이라면 피해 없이 막아낼 이가 꽤 될 것이다.
하지만 볼텍스 자체가 저리 흡수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파아아앗!
경쾌한 호성이 들려옴과 동시에 강진호의 몸이 불꽃의 벽을 뚫으며 나타났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가웨인은 강진호의 검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이!”
강진호의 적루가 공기를 찢어내며 가웨인을 향해 내려쳐진다.
가가가가가각!
하지만 가웨인의 몸은 갈라지지 않았다. 어느새 거대한 방패를 든 중장갑의 기사가 강진호의 일격을 방패로 막아내고 있었다.
“흠?”
강진호조차 순간 신음을 냈다.
무엇이든 갈라 버리던 그의 적루가 상대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방패를 따라 긴 흔적을 남기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공격이 막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브루노어!”
“우아아아아아앗!”
브루노어라 불린 거대한 기사가 함성을 지르며 방패를 밀어붙인다.
‘바토르?’
강진호의 머리에 순간적으로 바토르의 이름이 떠올랐다.
물론 바토르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이자의 육체는 그래도 정상인의 범주에 있고, 그 힘 역시 바토르에 비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바토르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강하지 않다는 뜻이 될 수는 없었다. 순수한 힘으로 따진다면 바토르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방패와 결합된 기술은 그 모자란 힘을 보충해 주고 있었다.
강진호의 육체가 뒤로 밀려난다.
“쏴라!”
브루노어가 방패를 앞으로 훅 밀어내고는 뒤로 몸을 날렸다.
강진호의 얼굴을 감싼 불꽃이 일렁인다.
그의 시야에 천장을 가득 뒤덮은 빛의 화살들이 들어왔다.
쐐애애애애액!
빛의 비가 내린다.
저 빛의 화살이 진짜 화살이었다면 태양마저도 가려 버렸을 것이다.
그만한 수의 빛의 화살이 일반적인 화살의 수십 배의 힘을 싣고 강진호의 육체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적루와 청루가 재빠르게 강진호의 머리 위에서 타오르는 검벽(劍壁)을 만들어낸다.
카가가가가가강!
검게 타오르는 검의 벽에 충돌한 화살들이 철벽에 탄환이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쏘아라!”
그런 후, 뜨거운 열기가 강진호를 덮쳤다.
‘뭐지?’
강진호의 눈이 일그러졌다.
보인다.
검벽으로 쏟아지는 빛의 화살들 뒤로 거대한 화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너무도 강력하여 마치 제방을 넘어 강물이 범람하는 것처럼 보이는 불꽃의 격류가 강진호의 육체를 그대로 뒤덮었다.
콰아아아아아아!
“우오오오오오!”
가웨인이 다시금 창을 잡고 소용돌이를 날린다. 불꽃에 휩싸여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강진호를 향해 수십 발의 볼텍스를 날린 가웨인이 거친 숨을 토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잡았나?”
불꽃이 점점 사그러들었다.
“퉤!”
바닥에 침을 뱉은 브루노어가 방패를 곧추세우며 입을 열었다.
“꿈같은 소리 하지 마시오.”
“……큭.”
“그 정도로 당할 이가 아니지. 오늘 우리는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할 거요.”
브루노어의 눈이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방패를 잡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충돌.
방패로 강진호를 밀어내는 단 한 번의 교환이 있었을 뿐인데, 그의 손은 순간적으로 파고든 역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떨렸다.
‘괴물이다.’
그 힘과 내력.
그저 악마의 형상을 한 것만이 아니다. 저건 정말 괴물이다.
오늘 그들의 운명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악마를 잡아 이 세상을 구원하든지, 그게 아니면 악마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나가든지.
브루노어가 긴장한 눈으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화아아악!
붉게 타오르는 불꽃 안에서 시커먼 불길이 피어나더니, 타오르는 불꽃을 모조리 집어삼켜 버렸다.
검은 마기의 불꽃은 마치 날개처럼 두른 악마가 그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다.
브루노어의 이가 강하게 맞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