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ing a world on your own with an infinite capital RAW novel - Chapter 249
9화 신세계 (3)
세상은 기울어진 운동장과 다름없다.
애당초 출발선이 다른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간극을 극복할 방법이 없다.
흙수저는 맨땅에 헤딩을 하지만, 금수저는 손오공처럼 근두운을 타고 날아오른다. 상대가 되지 않는 그 차이, 실로 어마무시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뭘까?
외칠 수 있는 자유?
개소리다.
목이 터지도록 외쳐 봐야 몸은 점점 더 깊이 진흙 속으로 파묻히기 마련이다. 구름 위의 존재들은 그 외침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 사는 세상이 다르니까.
땅에서 발버둥 치는 흙수저,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는 금수저. 이들은 다른 계급이다. 흡시 신인류라도 되는 듯 더 높게, 더 멀리 달아날 생각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흙을 밟고 살지 않는다. 모든 것을 손가락 하나로 결정한다. 주위에 병풍처럼 늘어선 다른 흙수저 고용인들이 알아서 정리를 하기 때문이다.
시혁도 흙수저 출신이었다.
일반 흙수저가 아니라 덕지덕지 불운을 달고 사는 버려진 고아.
거기다 처절한 배신까지 경험했다. 한마디로 최악의 조건을 가진 아싸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구름 위 세상을 볼 수 없는 찐흙수저.
그러나 시혁은 홀로 이 모든 것을 극복했다.
물론 미래를 알고 있다는 치트키 덕분이긴 했으나, 시혁의 굳건한 의지가 동반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연은 없다.
필연만이 있을 뿐이다.
우연을 강조하는 것은 패배자의 상투적인 핑계다. 첫 번째 계단 없이 두 번째 계단을 만들 수 없듯 하나씩 하나씩 시혁은 탑을 쌓았다.
탑은 계속 쌓였다.
작금에 이르러 그 탑은.
구름을 꿰뚫고 하늘 위에 우뚝 서 있었다. 구름이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높고 웅장하게.
“혁아.”
“예, 아버지.”
“애썼다.”
“…쑥스럽게 왜 그래요?”
“너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어.”
“에이, 민망하다니깐.”
“고맙다, 아들아.”
항상 실실거리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승려답지 않은 능글맞음과 해학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버지,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안 돼요!”
“이놈아, 이만하면 된 거여. 세속에서 나보다 더 행복한 땡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아버지!”
“미리내는 학교 들어갔고, 혜림이도 세상에서 제일 큰 보육원 짓겠다며 귀국하고… 애비도 갈 길을 가야지.”
“씨! 어디 간다고 그래요? 아버지!”
“네가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낡은 바랑 아직 안 버렸다. 그거 하나면 돼.”
미치겠다.
뉴욕으로 모셔 놓고 바빠서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결심을 바꿀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어디로… 갈 건데?”
“왜? 사람 붙여서 귀찮게 하려고?”
“말해요. 그 연세에 혹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 씨이.”
“이놈아, 나는 승려야. 고기도 먹고, 술도 몰래 마시고, 아들 덕분에 호강도 했지만 그렇다고 본질을 잊으면 되겠냐. 허허허.”
못 막는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잘 안다. 헤실헤실 웃어도 저 마음속에 깃든 의지가 얼마나 굳건한지… 시혁의 성격과 강철 같은 마음은 모두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다.
그런 시혁도 아버지를 이겨 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모든 걸 양보했을 뿐이다. 그런 아버지가 마음을 굳혔다.
“전화는 받을 거지?”
“그려, 받으마.”
“거짓말하지 말고, 또 동굴이라 신호가 안 뜬다는 핑계도 대지 말고. 꼭 받아.”
“그만 질척대라, 이놈아.”
불광 자비사에는 아버지의 작은 요사채가 그대로 있다. 거기에는 여전히 이불 한 채와 벽에 걸린 승려복 한 벌 그리고 청테이프로 다리를 동여맨 개다리 소반 하나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미국에도 저 낡은 바랑을 가지고 오셨다.
이제 다시 저 바랑과 목탁 하나만을 가지고 떠나려 하신다.
배고프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탁발(托鉢)로 때우고, 겨울에는 산속 깊은 동굴에 들어앉아 동안거(冬安居)를 보낼 것이다.
아무리 아들이 세상에서 비교할 자가 없는 부자가 되었어도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승려라는 사실은.
“이놈아, 명심혀.”
“말씀하세요.”
“너는 정상에 올랐다. 세상이 다 네 발밑에 엎드리고, 네가 마음먹으면 못 할 일이 없을 게야.”
“아버지 발길 하나 못 잡잖아?”
“허허허, 그건 다른 얘기고… 애비가 볼 때 너는 ‘비로자나불’의 환생이라고 생각한다. 부처는 형상이 없는 법이다. 그럼 인간들이 깨닫지 못하니 법체를 보여 주는 것이 비로자나불 아니더냐?”
“…….”
“근본을 잊지 말 거라. 세상은, 네가 정복할 대상이 아니라 두루 살필 갓난아이와 같음을 느꼈으면 좋겠구나.”
“…….”
“네가 중국에서 만났다는 친구도 한번 만나 보거라. 그래, 휴가 다녀온다 생각하고. 너무 삭막하게 자본에만 얽매이는 것도… 슬픈 일이다.”
“예, 아버지.”
그리곤 말이 없었다.
시혁은 문득 불광 자비사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풍경은 바람만 불어도 스스로 청아한 소리를 낸다.
아버지와 아들은 맨해튼 도심을 내려다보며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의 마음속으로 풍경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 * *
아버지를 보내고 시혁은 잠시 엘리와 공사홍에게 통보했다. 잠시 휴가를 가겠다고.
그리곤 바로 중국으로 건너갔다.
항저우 공항에 시혁의 전용기가 내리고, 트랩 앞에서 공항 청사까지 레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시혁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후진타오가 전용기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파격적이다.
국빈으로 온다면 공항에서 의전을 하겠지만, 미국 대통령이 온다 해도 중국의 주석이 항공기 안에서 영접하지 않는다.
“왔나?”
“왔습니다. 별도로 통보를 안 하고 왔는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허허허,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자네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신기하네.”
“예……?”
“자네의 일거수일투족은 각국의 최우선 보고 사항일세. 기침만 해도 건강 이상설이 도는 마당에 자네 전용기가 중국으로 떴는데, 내가 모를 수 있겠나?”
“아, 예. 이번 방문은 제 개인적인 일로 왔는지라,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아냐, 이렇게라도 와 준 덕분에 나도 자네를 만날 기회가 생겼으니, 좋은 거지.”
“그래도 기내까지 걸음하신 것은 과합니다.”
“훗! 그렇지 않으면 자넨 그 팔삭둥이같은 친구를 만나러 가 버릴 것 아닌가? 여기서 잠시 보는 게 좋아.”
“네, 그 친구가 홍콩 증시에 상장하기 전에는 보지 말자고 해서 미루고 있었는데, 문득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더군요.”
“나도 옛적에 자네 편지 배달부로 그 친구를 본 기억이 나네.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중일세.”
그렇다. 둘 사이에는 마운과 작은 추억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었다.
“커피 하시겠습니까?”
“오! 좋지. 설탕 둘, 크림 둘일세.”
“……!”
지쳤구나. 전에는 블랙으로 마시던 후진타오였다. 당을 많이 찾는다는 건, 몸도 마음도 지쳤다는 표현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주석이 된 후로 많이 힘들었구나. 고민이 많을 것이다. 어쩌면 그 고민의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주석님, 삼국시대 제갈량이 3개의 주머니를 풀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저도 비단 주머니가 3개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단숨에 환하게 웃음을 짓는다.
‘역시 이 친구는 족집게다.’
“부탁함세. 이 지독한 불면증을 없앨 처방이라면 언제든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네.”
커피를 한 모금 삼킨 시혁은 후진타오와 눈을 맞췄다.
“사람은 고기 맛을 봐 버린 이상, 다시 채소만 먹고 살아가길 원하지 않습니다. 이게 첫 번째 비단 주머니입니다.”
“……?”
“인민을 믿으라는 게 아니라 사람의 욕망을 믿으십시오.”
“너무 어렵게 말하지 말고 쉽게 풀어 주면 안 되겠나?”
고개를 끄덕이는 시혁.
“아직 군권을 넘겨받지 못하셨더군요. 상하이방과 장쩌민 전 주석은 상왕 정치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지금 가장 걸림돌 아니던가요?”
“…그렇네.”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는 모택동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인민들이 미개할 때 통하는 말입니다. 다 비슷비슷하게 못살고 헐벗은 시기라면 총을 가진 사람이 제일 두려운 법이죠.”
“…….”
“지금은 중국 14억 인민들이 자본주의의 맛, 돈을 쓰는 재미를 알아 버렸습니다. 그들은 총을 두려워하겠지만, 다시 옛날로 돌아가라면 분연히 들고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군도 그런 민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 군권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
“주석께서는 어차피 받게 되어 있는 군권에 얽메여 장쩌민과 상하이방의 눈치를 안 봐도 됩니다.”
“흐음…….”
“천안문 사태와 달리 탱크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쿠데타 걱정 마시고, 먼저 치십시오.”
“선공하라?”
“네, 군도 기득권층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민보다 훨씬 더 많은, 돈맛을 알아 버린 거죠. 지금 중국 정세가 흔들리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쪽은 오히려 군입니다. 탱크는 부대를 나오지 않습니다.”
커피 잔을 들고 있는 후진타오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중국의 모든 부를 장악한 공산당 그리고 실질적으로 중국 경제를 움직이는 상하이방, 이걸 타파하지 않으면 주석님과 중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떨림이 심해졌다. 같이 쥐고 있는 잔 받침으로 커피가 넘쳐 흐르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
“원로를 대접하고 상무위원과 정치국원은 절대 처벌하지 않는다는 묵계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소리에 불과합니다.”
“…….”
“곧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겠군요. 베이징 전인대 회의장에는 아무도 호위병을 데리고 오지 못합니다. 전국의 인민 대표가 보는 곳에서 일거에 숙청하세요. 몇 명을 즉결 처분하는 극적인 연출도 필요합니다.”
“말도 안 돼! 그러면 바로 내전이 벌어질걸세.”
“내전 따위 안 벌어집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중국의 최고 핵심 인사. 머리가 없어지면 나머지 인민해방군과 지방 토후들은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거꾸로 줄을 서면서 충성 맹세를 할 겁니다.”
“…….”
“모두 짱구를 굴리겠지요. 숙청된 주군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어떡하면 내 재산을 지킬 수 있을까… 오직 이 생각만 할 겁니다. 다시 옛날처럼 풀뿌리 캐 먹으며 살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떨림이 멎었다.
후진타오인들 바보가 아니다. 충분히 가상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다만 스스로 확신을 못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차마 시행하지 못하는 판에 시혁이 불을 질러 준 것이다.
“충분히 알아들었네. 이제 두 번째 주머니가 궁금해지는군. 말해 주겠나?”
비로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후진타오.
시혁도 후진타오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잘하면 미래에 바퀴벌레 취급을 받는 중국이 조금 나아질 수 있겠다.
“중국은 앞으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 시대를 열겁니다. 이건 바꿀 수 없는 흐름입니다.”
“그런데?”
“돈만 벌지 마시고 문화 대개혁을 하셔야 합니다. 인민들의 기본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중국은 국제적으로 왕따를 당할 것이고 세계의 해충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그렇게까지… 되겠나? 중국은 예로부터 문화 선진국일세.”
“아뇨, 벽도 없는 화장실, 예사롭게 침을 뱉고, 주위를 신경 쓰지 않은 채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들, 오직 자신과 가족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 이런 기본 중의 기본 의식을 개조하지 않으면 해충 취급받기 딱 좋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걸 어떻게 개조한단 말인가? 자그마치 14억일세.”
“런 타이 둬(人太多)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조지면 됩니다, 돈으로.”
“돈?”
“예, 돈을 신으로 여기는 인민들, 벌금을 팍팍 때리십시오. 침 뱉다가 걸리면 500위안(당시 약 7만 원), 무단 횡단 하면 1,000위안, 모든 일상 생활에 범칙금을 과도하게 내도록 하면 하루 아침에 근절됩니다.”
“…….”
“그다음 학교에서부터 예절 교육을 강화하도록 교육에 집중 투자하세요. 한 세대가 가기도 전에 기본 질서가 바로 잡힙니다. 장담하죠.”
헛웃음을 흘리는 후진타오. 기가 막힌 모양이다.
하지만 자신도 알고 있는 일이다. ‘착중죽중(착한 중국인은 죽은 중국인뿐이다)’이라는 말이 외국에서 떠돌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허허허, 너무 아픈 대목이군. 그런데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슬프네.”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입니다.”
“좋아, 이제 세 번째 주머니를 열어 보시게.”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신 시혁이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한 사람을 더 죽이십시오. 그래야 중국에도 신세계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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