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
주룩주룩 우르르 쾅쾅! 비가 아주 세차게 내린다. 가끔가다 번쩍거리는 번개가 내리치고 뒤이어 커다란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따라 하늘이 요란하군. 토르께서 심심하신 모양이야.”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이반은 이내 본인이 뱉은 말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언제부터 자기가 신앙심이 있었다고 번개가 내리치는데 토르의 이름을 들먹인단 말인가.
저건 그냥 허공에서 일어나는 전기의 방전 현상에 불과했다.
양전하와 음전하, 플라즈마 상태의 무언가.
문과라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거. ‘젠장, 너무 물들어버렸어.’ 이 낯선 땅에 너무 오래 있었다. 이제 고향의 기억은 흐릿해졌고, 쓸모없는 기억만 가득 채워졌다.
세계와 신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필멸자는 결코 닿지 못할 심오한 지식도, 적의 머리를 효과적으로 쪼개는 방법도 그가 알고자 원한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그 모든 것이 거추장스러웠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을 포함해서.
” 망할.”
한 손에 달랑달랑 들고 있는 가죽자루가 괜히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 속에는 아이반을 덮치려던 강도들의 대가리가 다섯이나 들어있었다. 잘려나간 지 반나절도 되지 않은 신선한 상태로. ‘아무렇지 않게 사람 대가리를 잘라서 들고 다니다니,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 새삼스럽게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쪽 세계에 너무도 쉽게 적응해버린 자신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이 엿 같은 세계가 문제일까.
“카악, 퉤!”
불쾌한 감정을 가득 담아서 털어내듯 바닥에 침을 뱉은 아이반은 낡은 문을 열고 용병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평소 북적북적한 곳이지만 비바람이 워낙 거세게 불어서인지 오늘은 한적하기만 했다.
“흠, 흠!”
바닥이 축축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접수원은 반쯤 의자에 기대고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게임 속에서처럼 미모의 직원 같은 건 없었다. 하나같이 얼굴이 험악한 아저씨들뿐이다. 당연한 일이다. 용병처럼 거친 자들을 다루려면 접수원도 거칠 수밖에 없었으니까. 연약하게 보이는 여성에게는 고함을 떽떽 지르고 온갖 개지랄을 다 떨어도 얼굴에 칼자국이 난 근육질 대머리 마초남이 접수원이라면 조용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의뢰 완료 보고.”
“무슨 의뢰를 가져가셨더라?”
“근처에 얼쩡거리던 강도 퇴치. 모두 다섯이오.”
접수원은 아이반이 들고 있던 자루를 힐끔 살폈다. 그 속에 강도의 머리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썩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젠장, 밥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밥맛이 뚝 떨어지는군. 저기 놓고 가시오. 정말로 강도가 맞는지 경비대에 보내서 확인을 해야만 하니까. 보상을 받으려면 며칠 정도는 걸릴 거요.”
“얼마나?”
“그거야 모르지. 망할 경비대 놈들이 얼마나 미적거리며 움직일지에 따라 다르니까. 그래도 떼먹지는 않을 거니 안심하시오.”
그 말을 들은 아이반은 속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미적거리는 것은 경비대뿐만이 아닐 게 분명했으니까.
이래서 강도 처치 같은 의뢰는 웬만하면 피해야했다.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원한관계를 만든다는 것이고, 심지어 그 보상도 거지같은데다 과정마저 복잡했다.
멍청한 강도놈들이 자신을 덮친 것이 문제였지 사실 아이반도 굳이 스스로 찾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사람 잡는 솜씨가 제법인 것 같은데, 현상금 사냥꾼이시오? 얼굴이 낯설군.”
“여기로 온지 얼마 안 되었소. 그리고 사람 잡는 것보다는 괴물 놈들을 잡는 게 전문이지.”
“흐, 하긴. 강도나 괴물이나 그게 그거지.”
치안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세상이었다. 칼밥 먹고 살다보면 사람을 잡다가 괴물도 잡고, 괴물 잡으러 나섰다가 사람을 잡기도 했다.
“그나저나 근처에 좀 괜찮은 숙소는 없소? 초행이라 아무 곳이나 대충 들어갔더니 지난 며칠간 잠자리가 아주 끔찍했거든.”
“숙소라, 그건 돈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니겠소?”
“적당한 걸로.”
“흠, 그렇다면 바람소리 여관으로 가보시오. 새로 생긴 곳인데, 방은 좀 좁아도 깨끗하고 조용하다더군.”
“경험은 아닌가 보오?”
“흐, 나는 집이 바로 옆에 있는데 여관 갈 일이 뭐가 있겠소? 다른 사람들 평이 그렇다는 얘기지. 아, 거기 맥주랑 안주는 확실히 괜찮소. 그건 내가 먹어봤거든.”
용병길드 직원에게 자세한 위치를 물어본 아이반은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 ‘어쨌거나 처음 숙소보다는 낫겠지.’ 그곳은 정말 최악이었다. 제대로 세탁이 되지 않은 침구에 벌레들이 드글드글했으니까.
이 망할 세상으로 넘어오게 된 이후로 아이반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사는 중이었다.
하지만 밤새도록 자신의 몸을 물어뜯으려는 벌레들과 동침할 만큼은 아니었다.
스르륵 탁! 새로 생긴 곳이라는 건 맞았는지 문에 기름칠이 잘 되어있어서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열렸다. 은은하게 내부를 밝히는 마력등의 불빛, 한쪽에 가득 쌓여있는 술병과 오크통. 고급스럽지는 않아도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꽤 운치 있었다. 너무 시끄럽지도 않았고. ‘깔끔해서 좋군.
방도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 아이반이 안쪽을 둘러보고 있으니 여급이 얼른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이고, 손님! 비를 많이 맞으셨네요! 필요하신 것은 무엇인가요? 술? 식사? 잠자리?”
“셋 모두. 일단 오늘 하루 묵어보고 괜찮으면 장기 숙박을 고려해보겠소.”
“숙박은 1인실인지, 아니면 다인실인지 .”
“1인실로.”
“그러면 1박에 20코퍼예요. 혹시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시려면 거기서 4코퍼만 더 주시면 되고요. 아침 식사 포함이랍니다.”
이전에 머물렀던 여관에 비해 두 배나 비싼 금액이었지만 아이반은 순순히 품에서 동화를 꺼내 내밀었다.
정말로 침대가 깨끗한 곳이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지불할 만 했다.
거기에 따뜻한 물로 목욕이라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네, 여기 열쇠 받으시고. 2층 끝에 있는 방이에요. 뜨거운 물이 준비되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곧장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방을 확인한 아이반은 크게 만족스러웠다.
자그마한 침대와 짐을 넣어둘 수가 있는 옷장이 전부.
들었던 대로 방은 크지 않았지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 정도면 몹시 훌륭한 여관이었다.
“비싸게 받아먹을만하군.”
흡족한 미소를 지은 아이반은 먼저 축축한 옷부터 벗어던졌다. 위에 걸친 망토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잔뜩 젖었다. 가죽 신발 안까지 물이 새어 들어와 질척거리는 것이 몹시 찝찝한 상태였다. 주르륵 신발을 뒤집자 거기서 물이 흘러내렸다. 방금 전까지 발과 함께하던 물이.
아이반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이거 제대로 씻어서 말리지 않으면 엄청 냄새가 나겠어.’ 냄새만 나면 다행이지, 어쩌면 무좀이 걸릴지도 몰랐다. 더 심하면 봉와직염이나.
어쨌든 축축해진 옷을 세탁바구니에 집어넣은 아이반은 젖은 몸을 닦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차피 곧 씻으러 갈 거지만 그렇다고 계속 젖은 채로 있을 수는 없었다. 새로 꺼낸 옷은 물기 한 점 없이 뽀송뽀송했다. 비바람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인벤토리 속에 보관되어 있었으니까. 인벤토리, 상태창, 스킬, 퀘스트. 레벨과 경험치. 그 모든 것은 아이반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요소였다. 이쪽 세계에 원래부터 살고 있던 존재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부터 유희를 위해 넘어온 존재.
물론 이 곳이 평범한 온라인 게임이던 시절의 설정일 뿐이다. 아이반은 이곳에서 몇 년을 지내는 동안 다른 이방인의 존재는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하긴, 게임 속으로 들어온다니. 그런 개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이 둘이나 있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나는 왜. 아이반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한숨으로 비워냈다.
지난 몇 년간 고민했던 주제였지만 답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계속.
이제는 괜히 머리만 복잡해지니 그런 고민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것만 하기에도 버거운 세계였다. 똑똑똑!
“뜨거운 물이 준비가 되었어요!”
씁쓸한 마음을 털어내기 딱 좋은 소식이었다. 아이반은 바구니에 한 가득 쌓여있는 옷더미를 여급에게 내밀며 세탁을 부탁했다. 물론 그 값으로 동화 두 개를 더 건네주었다.
“깨끗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더 좋은 숙소에서는 방에 개인 화장실, 개인 샤워실이 붙어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잠자리 빼고 모두 공용이었다. 뜨거운 물로 씻으려면 4코퍼, 차가운 물로 씻으려면 2코퍼.
하여간 싼지 비싼지 가늠이 잘 안 되는 미묘한 물가였다. 이 동네는 기본적으로 현대와는 다른 기준으로 가격이 매겨지는데, 아예 중세 유럽 수준이라고 하기에는 또 마법이 발달되어 있어서 대중없었다.
“으흐흠!”
인벤토리에서 비누를 꺼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씻어낸다.
빗물에 핏물까지 뒤집어써서 찝찝했는데 뜨거운 물을 끼얹으니 아이반은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때 반투명한 메시지창이 아이반의 눈앞에 튀어 올랐다. 띠링! [긴급 퀘스트: 강도를 잡아라!(완료)] [보상: 미량의 경험치, 3실버 75코퍼] 3실버 75코퍼.
1실버가 100코퍼였으니 결국 강도 다섯의 머리가 가진 가치는 여관에서 보름동안 머물 숙박비에 불과했다.
물론 이건 시스템의 보상이고 따로 용병 길드에서 받아야할 금액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아이반은 경험상 그 또한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목숨 값 한 번 저렴하군.’ 물이 차갑게 식어가는 만큼 아이반의 기분도 차갑게 식었다. 얼른 목욕을 마친 아이반은 1층으로 내려와 호밀빵과 스프, 구운 닭과 시원한 맥주를 시켰다. 다행히 음식은 맛이 있었고, 아이반의 기분은 조금 나아질 수가 있었다. 그날 아이반은 숙박비와 목욕, 세탁비, 식비로 강도 하나만큼의 목숨 값을 사용했다.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 아이반은 누군가 깨운 것처럼 번쩍 눈을 떴다.
따로 알람시계랄 것이 없었지만 이세계에 떨어지고 몇 년 동안 개고생을 하다 보니 습관처럼 일어날 수 있었다. 이쪽 세계의 사람들은 대체로 일찍 하루를 시작하고, 일찍 하루를 마쳤다. 횃불, 양초는 물론이고 마력으로 움직이는 조명도 있었으나 그것이 모두를 밝힐 만큼은 아니었다.
자연히 태양의 움직임을 따라서 일과도 정해졌다.
딸칵!
“비는 그쳤나?”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본 아이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그렇게 쏟아지던 비는 다 그치고 하늘에는 구름 하나 없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오늘도 그렇게 비가 내렸으면 그대로 하루를 공칠 뻔했으니까. 대부분의 서민들은 하루 벌어서 하루를 먹고 살기도 어려웠다.
아이반이라고 해서 그리 다르지도 않았다. 어제 세탁을 맡겼던 옷들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아이반은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의상을 꺼내 입고 방을 나섰다.
“으하하! 오늘은 어디로 갈 거냐면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