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04
델피노의 기도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 누군가는 이들을 배웅해야만 했다.
“가장 어두운 곳에 당신의 자비를, 길 잃은 자들에게 인도의 빛을.”
뜨거운 불 앞에서 몇 시간이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이틀 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격렬한 싸움을 끝낸 뒤에 곧바로 이어서. 그러나 델피노는 모든 유골이 재가 되어 흩어질 때까지 기도를 계속했다. 그동안 다른 일행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를 지켜보았다.
“혼자 고생하는군.”
아이반이 그리 중얼거리자 이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파라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각자 신을 모시고 있었으나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엘프가 스스로 만든 종족신인 세계수는 다른 종족을 신경 쓰지 않았다.
뱀신 모르나 역시 리자드맨이나 그와 가까운 몇몇 종족에게만 숭배되는 신이었고.
노르드의 신? 그 미친놈들에게 평안과 안식을 빈다고? 아이반은 쌈박질을 제외하면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치지직! 화르륵! 휘이잉! 그런 생각에 항의하듯 아이반의 몸에서 신력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갑자기 바람이 불고, 불꽃이 피어오르고, 스파크가 튀는 것 정도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 아이반은 잊고 있던 것을 깨닫고 인벤토리를 열었다.
“파라스, 혹시 이것이 뭔지 알겠소?”
아이반이 꺼낸 것은 시커먼 돌덩이였다. 파라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다가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이건··· 설마?”
돌덩이를 받아들고 한참이나 살펴보던 그가 한껏 불신을 담아서 되물었다.
“이걸 대체 어디서 구한 건가?”
“북쪽 혹한의 땅에서 거인의 군세가 공격할 때 어떤 녀석이 돌도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 챙겼소.”
그 정도 괴력으로 휘두르면 보통은 여기저기 쩍쩍 갈라지기 마련인데 그놈이 휘두르는 것은 멀쩡했다. 거인의 힘으로도 부수지 못하는 돌이라면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인벤토리에 챙겨놓았었다.
“어때, 쓸 만한 물건이오?”
“쓸 만한 물건이냐고?”
파라스는 헛웃음을 한 번 흘리고는 대답했다.
“아다만트라고 혹시 아나?”
“아다, 뭐?”
아이반이 뭔 소리인지 몰라서 눈을 끔뻑거리고 있을 때 이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끼어들었다.
“아다만티움? 그게 아다만티움이라고?”
그 말에 아이반과 사나운 이빨이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아!”
아다만티움이라면 그들도 알고 있었다. 더럽게 비싸고 더럽게 귀하기로 유명한 금속이 아닌가. 옛이야기 속의 영웅들이 아다만티움으로 된 무기를 들고 다녔다고 듣기만 했을 뿐 실제로 그런 무기를 들고 다니는 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하기는 무슨, 브릭타 왕자랑 같이 싸웠으면서.”
“브릭타? 아, 혹시 힘의 망치 갈라로자가 아다만티움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소?”
“명색이 드워프를 대표하는 세 개의 보물 중 하나인데 그 정도는 되어야지 않겠나?”
힘의 망치 갈라로자는 대지가 스스로 움직여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었다. 실제로 땅을 조종하는 권능이 깃들어 있고. 평범한 금속으로는 그 힘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튼튼하다는 아다만티움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아다만티움이란 말이지? 대체 얼마나 나오겠소?”
“여기에?”
파라스가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다가 대답했다.
“글쎄, 얼마나 되려나? 순도를 확인해보기는 해야 하지만 크기가 너무 작아. 제련해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얻기는 어렵겠지.”
원석을 톤 단위로 넣어도 막상 제련해보면 얼마 나오지 않았다. 그걸 알았기에 파라스는 차분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이건 순도가 상당히 높아 보이니 조금만 더 양이 많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이 정도로는······.”
파라스가 말끝을 흐리다가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아이반이 대뜸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바위를 꺼냈기 때문이다. 크기가 웬만한 짐마차보다도 큰 것 같았다.
“거인이 도끼로 쓰던 것을 가져왔다고 하지 않았소? 거인들의 덩치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이 정도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순도에 따라서는 제법 얻을 수도 있겠어.”
아다만티움은 드워프에게도 몹시 귀한 재료였다. 그것을 다룰 기회를 얻었으니 파라스의 기분도 무척이나 좋았다.
“근데 왜 이걸 지금 말하나? 강철 모루에 있을 때 알려주지 않고.”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소. 용과 싸우기도 했고, 사나운 이빨이 위험하기도 했으니.”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긴, 그때 알아봐야 소용없었겠군. 불타는 산의 대용광로가 파괴되었으니.”
아다만티움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아주 뜨겁고 특별한 불이 필요했다. 화염 드래곤의 심장을 회수하기는 했지만 붉은 공방이 무너지고 불타는 산의 대용광로가 부서졌으니 제대로 다루지도 못했을 거다.
“그러면 아다만티움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오?”
“적어도 강철 모루와 비슷한 수준의 용광로가 필요하지.”
“···그러면 두 군데밖에 없군.”
대륙에서 감히 강철 모루와 비슷하다고 자부하는 곳은 두 곳밖에 없었다. 청동 망치와 은빛 용광로, 드워프의 다른 왕국들.
“대륙 남쪽, 우리가 가는 방향에 은빛 용광로가 있어. 아다만티움을 제대로 다루려면 거기에 들러야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어차피 난쟁이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만약 난쟁이를 만나게 되면 그에게 부탁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아이반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니 파라스가 다급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난쟁이가 요청을 들어준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제련하는 것과 무기를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일이야! 게다가 용의 가죽과는 다르게 금속은 녹여서 재활용할 수 있으니 괜히 미룰 이유가 없지.”
그 말에 아이반의 마음이 점차 기울어졌다. 귀한 재료를 놀려두는 것은 용의 가죽만으로 충분하다는 파라스의 설득이 통했기 때문이다.
“알겠소. 어차피 같은 방향이니까.”
본인이 저렇게 원해서 하는 일이니, 무기를 만드는 비용은 좀 깎아주겠지. 그때 이레인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녀의 목소리가 은근히 들뜬 것 같기도 했다.
“저길 봐!”
말이 푸르르 머리를 터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말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반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기특한 녀석들이네.”
마녀의 숲을 떠난 일행은 도시로 돌아가 신전에 일이 모두 처리되었음을 알렸다. 처음에 사제들은 겨우 몇 명이 마녀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목을 베었다는 말을 쉽게 믿지 못했지만, 몇 가지 증거를 늘어놓으니 몹시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참으로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수백 년간 이 땅에 어둠이 깃들어 있었는데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니 사제들은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수백, 수천의 유골이 몇 개의 탑을 쌓을 정도였다는 말을 들은 사제들은 눈을 감고 한참이나 성호를 그렸다.
일행은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신전을 나왔다. 위험한 곳에서도 죽지 않고 기다려준 말들을 쓰다듬으며 마차를 연결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다행히 그 후로 한 달간은 큰 사건이 없이 지나갔다. 미친 듯이 덤벼들던 강도들도 사라졌다.
치안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린 변경지역을 벗어나 북부 왕국 스페니안의 중심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웬만해서는 볼 수 없는 고급 마차라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은 많이 받았지만, 사나운 이빨이 마부석에 앉아서 자신의 비늘을 다듬고 있으니 감히 가까이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다는 이유로 아이반의 옆에서 마차를 모는 법을 배운 사나운 이빨이 제법 마부 흉내를 낼 때쯤, 그들은 북부 왕국 스페니안을 가로질러 국경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계속 마차 안에 앉아있어서 뻐근해진 몸을 풀면서 이레인이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저기 저 도시를 마지막으로 넘어가면 서부 연합 왕국이네.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셈이야.”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오랜 세월 그녀가 자신의 거처로 삼았던 서부 연합 왕국이 눈앞에 다가오니 기쁜 모양이었다. 그러나 국경도시에 다가갈수록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도시에 감도는 분위기가 싸늘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그리 멀지 않은 성벽을 마주 보고 북부 왕국 스페니안과 서부 연합 왕국의 병사들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국경 지역이라 원래 경비가 삼엄한 곳이라고는 해도 일반적인 풍경이 아니었다.
“뭐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아이반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리고는 근처에 있던 용병 하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보시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뭐야? 대체 누가 치는···!”
용병은 거칠게 소리를 지르려다가 뒤쪽에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사나운 이빨을 힐끔 확인하고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아이반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부르셨습니까?”
용병은 주제파악이 곧 실력이었으니, 그는 아주 훌륭한 용병이었다.
“국경을 넘고 싶은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도저히 통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데.”
그 말에 용병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이 근처에 꽤 돈이 되는 던전이 발생했다더군요. 그것 때문에 스페니안과 연합 왕국에서 마찰이 일어난 모양입니다.”
그때 성벽 쪽에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우리에게 창칼을 들이미는가!”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기사 하나가 나타났다. 몸이 건장하고 근육이 가득해서 언뜻 젊어 보였지만,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 남아있었다.
“철혈기사잖아? 저 사람이 왜 여기에······.”
“뭐야, 정말로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