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06
그렇게 말하는 철혈기사의 입가에는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아무래도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또한 실례되는 말인 것을 알지만,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나를 용서하시오.”
아이반이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자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가 입을 열었다.
“칼 한 번만 빌려주시오.”
예상했던 일. 아이반이 쓴웃음을 지으며 거절했다.
“함부로 검을 휘두르고 싶지는 않소. 그것도 서부 연합 왕국과의 싸움은······.”
“아니, 그 말이 아니오. 같이 싸워달라는 뜻이 아니었소.”
“···그러면?”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가 민망한 듯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 피의 검 브리카가 당신에게 있잖소? 그거 좀 빌려주시오.”
아이반은 할 말을 잃고 두 눈을 끔뻑거렸다.
‘뭐지? 대가리가 깨지고 싶다는 뜻인가?’
아이반의 오른쪽 손이 움찔거렸다. 도끼를 집어던져야 하나 고민하기도 전에 먼저 움직이는 몸을 멈춰 세우고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오? 검을 빌려 달라고? 피의 검 브리카를?”
아이반이 피의 검 브리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비밀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쿤다라 교단의 성물, 붉은 잔을 건네주고 정당하게 받은 대가였으니 숨길 이유가 없었다. 일행의 정체에 대해 알아봤다면 피의 검 브리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아이반이 삐딱하게 자세를 잡고 그를 노려보았다.
“기사단은 검을 자신의 애인처럼 여기라고 교육한다던데, 그러면 지금 내게 애인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이오?”
물론 무기는 결국 소모품이었다. 싸우다가 무기가 부러져서 다른 이의 것을 빌려 쓰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피의 검 브리카 정도 되는 물건이라면 함부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초면에 대뜸. 피의 검 브리카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를 처음 만났을 때 아이반이 갈라로자를 빌려달라고 했으면 화염 드래곤과 싸우기도 전에 머리가 터져나갔을 거다.
“제대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소. 지금 내 기분이 몹시 불쾌해지려고 하니까.”
아이반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덤빌 테면 덤벼보라는 뜻이다.
‘망할. 일이 잘못되면 그냥 대가리 터트리고 서부 연합 왕국으로 넘어가지, 뭐.’
국경선이 바로 앞이었다. 솔직히 이곳에 있는 병사들이 모두 덤벼든다고 해도 뚫고 지나갈 자신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는 그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 아이반에 대한 정보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러했다.
“진정하시오. 내가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줄 테니.”
데니스 로이어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아이반이 내뿜는 기세에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많은 전장을 경험했지만 이만한 강자는 정말 흔치 않았다.
“혹시 이곳이 피의 성자 알베르홈께서 활동하시던 지역인 것은 알고 있소?”
피의 성자 알베르홈. 익숙한 이름이었다. 쿤다라 교단의 성물, 붉은 잔의 원래 소유주이자 순교한 이단심문관 피에르 로렝의 선조가 아닌가. 아이반이 가지고 있는 피의 검 브리카 역시 한때는 알베르홈의 것이라고 했다.
‘이곳이 알베르홈이 활동하던 지역이라고?’
흘깃 델피노를 바라보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라는 뜻이다.
“피의 성자 알베르홈께서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셨지만, 그중에서도 이곳에서 대부분의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이곳에서는 그분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죠.”
이곳에 신전이 따로 건설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이미 성자가 활동한 성지니 따로 신전이 건물의 형태로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너머에 아주 복잡한 정치적 일들이 있었겠지만 그건 이 자리에서 굳이 언급할 이유가 없었다.
“아직도 그분을 기리는 축제를 할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델피노가 말끝을 흐렸다. 이미 수백 년도 더 지난 일.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아한 눈으로 철혈기사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모른 척 말을 이었다.
“피의 성자 알베르홈의 후손은 많지 않소. 얼마 전 그의 직계 후손이 안타깝게 순교한 이후로는 사실상 맥이 끊어졌다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으니.”
그의 말에 아이반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피에르 로렝의 최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악마의 힘에서 벗어나 스스로 횃불이 되겠다며 영혼을 불태우던 모습이 보였다. 마침내 불의 신 쿤다라의 곁으로 돌아가 세상을 밝히는 횃불이 되었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악마나 신과 같은 존재를 제외하면 그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는 자는 세상에 셋이 전부였다. 지금은 어디서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모를 빌어먹을 뼈다귀 놈과 필레인 그레이우드, 그리고 아이반. 아이반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짐작한 데니스 로이어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애도를 표했다.
“힘든 싸움이었다고 들었소.”
“···뭐, 쉬운 싸움이란 없는 법이니.”
그의 영웅적 최후를 크게 선전한 쿤다라 교단 덕분에 많은 사람이 그의 순교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흠흠. 어쨌든 지금 피의 성자 알베르홈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얼마 전 순교한 피에르 로렝과 인연이 깊지 않은 자들이 감히 이 땅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고 있소.”
직계는 사라졌고 방계는 너무나 피가 옅어져 의미가 없었다. 성물인 붉은 잔은 수백 년간 행적이 묘연하다가 결국 악마의 제물이 되어 사라졌으니 남은 것은 결국 피의 검 브리카밖에 없었다.
“피의 성자 알베르홈을 상징하는 검으로 부디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이 땅이 넘어가지 않도록 도와주시오.”
그러니 검을 빌려 달라, 그렇게 힘을 실어 달라.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이반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취향이 독특한 것은 아니로군.’
나는 또 남의 여자라면 환장하는 조 승상처럼 남의 칼이라면 갖고 싶어서 견디지 못하는 성벽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이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로군. 동료들과 이야기를 해봐야겠소.”
그 말에 데니스 로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오. 편안히 쉴 수 있도록 방을 내어주겠소.”
일행은 성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아마도 국경 도시니만큼 높으신 분들이 오갈 일이 많으니 그들을 위해 준비된 최고급의 숙소겠지. 내부의 장식이 무척이나 호화롭고, 가구와 조명 역시 훌륭했지만 아이반은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가시방석 같았다. 방안에 일행만이 남게 되자 아이반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뜸 욕설을 내뱉었다.
“씨부럴, 하여간 더러운 게 걸렸군.”
이런 정치질은 익숙하지 않았다. 차라리 밖에서 노숙하고 괴물들의 사지를 분해하는 것이 편하지. 아이반이 분통을 터트리고 있을 때 이레인은 한껏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우아하게 곰방대를 입에 물고 말했다.
“늙은 기사가 제법 초조했던 모양이야. 아침부터 마중을 나와서 대뜸 본론부터 꺼내는 걸 보면.”
아무리 아이반과 일행이 귀찮은 티를 팍팍 풍겼다고는 해도 이건 전혀 귀족의 예법이 아니었다. 그건 철혈기사가 사실 정치적인 수작에는 능하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했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상황이 급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명분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방법이 너무 투박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
후우, 하고 길게 연기를 내뱉은 이레인이 델피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 던전이 아무래도 피의 성자와 관련된 것 같은데?”
델피노가 그것에 동의했다.
“그런 것 같군요.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피의 검을 찾을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명분 싸움이 중요하다고 해도 너무 뜬금없었다. 갑자기 인연이 깊지도 않은 자들이 후손을 자처하며 잃어버린 지 수백 년도 지난 옛 땅을 되찾겠다고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명분 싸움이 의미가 생기는 것은 수백 년 전의 무언가가 새롭게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지금 갈등의 핵심은 던전이야. 그 던전은 피의 성자 알베르홈과 관련이 있으니 피의 검을 가지고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
던전은 결국 역사와 전설의 흔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세계였다. 만약 아무리 괴물이라도 어린 나뭇가지에 찔려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면, 그걸 기초로 만들어진 던전의 몬스터는 어린 나뭇가지에 반드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피의 성자 알베르홈과 관련이 있는 던전이라면 그와 관련된 흔적이 크게 힘을 발휘할 터였다.
“그러니까 철혈기사에게 우리는 굴러들어온 복이라는 뜻이야. 그것도 언제 울타리를 훌쩍 넘어 옆집으로 가버릴지 모르는.”
이야기를 들은 아이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경계하느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상황을 반전시킬 방법이 생긴 셈이군. 왜 그렇게 급하게 나를 불렀는지 알겠어.”
그리고 아이반은 팔짱을 끼고 되물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시나리오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러면 우리가 꼭 이곳 편에 붙을 이유가 있소? 서부 연합 왕국과 인연이 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스페니안과 가까운 것도 아닌데.”
그 말에 지겨운 표정으로 앉아있던 사나운 이빨이 끼어들었다.
“이곳은 단일 세력인데 서부 연합 왕국은 여럿이 연합한 곳이라 들었다. 아무래도 나눠 먹을 입이 많은 곳보다는 이쪽이 비율을 조금 더 잘 쳐주겠지.”
그러면 처음으로 돌아가 굳이 던전에 뛰어들 이유가 있을까? 크게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던전은 언제나 사람의 욕심을 자극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위험한 곳이었다. 과연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갈 이유가 있을까?
파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의 성자와 연관이 있다면 한 번쯤 들러볼 만한 일이야.”
“갑자기?”
“기회가 왔으니 하는 말이지.”
파라스는 훌륭한 대장장이이면서 동시에 대를 이어 난쟁이의 흔적을 쫓았던 숙련된 모험가였다. 그는 오랜 세월 대륙을 돌아다니며 단서를 수집했던 모험가의 얼굴로 입을 열었다.
“피를 바친 만큼 힘을 전해준다는 붉은 잔, 평소에는 피에 녹아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나타나는 피의 검 브리카. 아무리 생각해도 불의 신 쿤다라를 모시던 성자가 가지고 있기에는 영 이상하지 않나?”
“그 말은?”
“그건 난쟁이의 솜씨야. 설마 모르고 있었나?”
아이반이 한쪽 눈썹을 밀어 올렸다.
“전혀. 피의 검 브리카에는 난쟁이의 표식이 새겨진 것도 아니었는데.”
그 말에 파라스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지운 거지. 난쟁이는 노르드의 신과 가까운 존재야. 쿤다라와는 어울리지 않아. 놀랍군. 그걸 못 알아보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파라스를 보며 아이반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대장장이도 아닌데 그런 것까지 어찌 알겠소? 그리고 당신은 내 장비를 모두 살펴놓고는 그런 말도 하지 않았잖소.”
그러자 파라스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지. 자네가 가지고 있는 장비 중에 강철 모루에서 새로 구한 것들 말고는 전부 난쟁이와 관련된 녀석들이잖아!”
메긴기요르드, 드라우프니르, 피의 검 브리카, 이제는 부서져 버린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과 심지어 피알라르 그뷔드뮌드손이 만들어준 황금 멧돼지의 갑옷까지. 하나같이 직간접적으로 난쟁이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뭘 되묻는다는 말인가.
“그러면 결국 던전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오?”
“내 생각에는. 어쨌든 돈은 좋은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