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07
던전을 발견하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냐며 콧김을 뿜어대는 파라스를 바라보다 아이반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철혈기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지. 대신 대가는 넉넉하게 받아 챙겨야겠지만.”
“흐흐, 그거 좋지.”
아이반과 파라스의 눈동자가 황금으로 빛났다. 델피노 역시 그러했다. 아이반의 마음이 급격하게 불편해졌다.
철혈기사가 제공한 방에서 편히 쉬고 식사도 마쳤다. 그렇게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상대가 초조해졌을 때쯤 제안을 받아들였다.
“무슨 뜻인 줄 알았소. 깊이 고민한 끝에 함께하기로 했소.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유물을 넘길 수는 없지.”
물론 그 자격이 대체 무엇인지, 철혈기사에게는 자격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적당히 써먹을 명분일 뿐이다.
“훌륭한 결정이오. 피의 검 브리카의 권위가 있으니 무도한 자들이 감히 불만을 표시하지 못할 테지.”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를 바라보다가 아이반이 팔을 내밀었다. 그의 팔뚝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지고, 그것이 유려하게 뻗은 검의 형상이 되어 손에 잡혔다.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 곁에 있던 누군가가 낮게 소리쳤다.
“브리카! 피의 성자가 휘두른 자비의 검!”
그 말을 듣고 아이반이 헛웃음을 흘렸다.
‘자비의 검이라,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수백 년간 검에 깃들었던 불의 신 쿤다라의 신성력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아스가르드 신들의 힘이 가득했다. 그 폭력적인 힘에서 자비를 느끼기는 쉽지 않았다. 재빨리 적의 목숨을 끊어주는 것을 자비라고 생각한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피의 성자 알베르홈은 잘 모르오. 그러나 성황청의 이단심문관 피에르 로렝과는 인연이 있지.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서겠소.”
그렇게 말을 토해낸 아이반이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피의 검 브리카의 권위로 그대를 돕겠소. 그렇다면 내가 어쩌기를 원하시오? 그저 검을 들고 입으로 몇 마디 떠들기만 바라는 것이오?”
그 말에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러기를 바라지만 대놓고 긍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피의 검 브리카의 권위라면 던전을 차지하기 위한 명분은 세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던전 안에서도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러나 아이반이 나설수록 넘겨줘야 할 몫이 많아졌다. 그가 지나치게 활약하는 것은 불편할 터였다.
“······.”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의 침묵이 길어졌다. 처음에는 아이반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아이반의 일행이 가진 힘이 적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스러웠겠지.
“···알겠소. 피의 검 브리카의 소유자가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하지.”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는 더는 고리타분한 명분 타령을 하지 않았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속마음을 꺼내 보였다.
“그럴듯하게 혓바닥을 굴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취향이 아니야. 솔직히 말하겠소. 연합 왕국 놈들이 보물을 독차지하는 것은 도저히 볼 수가 없소. 그놈들에게만 넘어가지 않는다면 뭐라도 좋아.”
뒤쪽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데니스 로이어의 보좌관들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지나치게 솔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데니스 로이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그는 남의 눈치를 보면서 살던 사내가 아니었다.
“던전 공략에 당신들의 자리를 만들어두겠소. 분배는 돌아와서 마무리하지.”
“넉넉하길 바라오.”
“부족하지는 않을 거요.”
철혈기사가 손을 내밀었다. 아이반이 마주 잡고 흔들었다. 일단 아이반의 일행이 합류를 결정하자 던전을 공략할 준비가 빠르게 이루어졌다. 대외적으로 피의 검 브리카의 주인이 던전을 공략할 것을 선언하고, 피의 성자 알베르홈의 유물을 수습하겠다고 외쳤다. 그렇게 명분을 쌓고 남들이 뭐라 반응하기 전에 순식간에 던전으로 향했다. 던전이라는 것이 마냥 내버려 둘 수도 없는데다 워낙 경쟁자들이 많았다. 서둘러 움직여야만 했다.
“공식적으로는 연합 왕국 놈들도, 우리도 움직이지 못했지. 서로 견제하느라 눈치만 보고 있었을 뿐. 그러나 뒤로는 다 손을 쓰고 있었소.”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가 딱히 숨길만 한 일도 아니라며 말했다.
“이미 수많은 모험가가 몰래 던전에 들어갔지. 그중에 우리와 연합 왕국의 손길이 닿은 자들이 적지 않소.”
그러나 결국 그들은 던전을 공략하지 못했다. 중간에 막혀서 방황하는 중이었다. 던전의 난이도가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가 직접 던전으로 들어가니 곧 해결될 거요. 연합 왕국 녀석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빠르게 처리하고 돌아오지.”
던전은 몹시 위험한 곳이었지만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는 크게 자신감을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스페니안 왕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철혈기사와 그를 따르는 녹슨 피 기사단, 거친 훈련을 받은 정규군, 대단한 실력을 갖춘 아이반의 일행까지 합류하니 실패를 떠올릴 리가 없었다.
“파괴된 옛 도시였소. 그러니 규모가 작지 않지.”
거의 육백 년 전에 파괴된 이후 재건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방치된 곳이라고 했다. 세월에 쓰러지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서 요즘 사람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곳이었다고. 아이반은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 눈을 굴렸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는 설명과 달리 잡초가 잔뜩 누워서 길을 만들었다. 최근에 많은 사람이 움직였다는 뜻이다.
던전은 스페니안 왕국과 서부 연합 왕국의 경계에 딱 걸쳐져 있었다. 넓은 영역에 입구가 여럿 퍼져있어서 완벽히 통제되지 않는다고 했다.
‘던전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어디 움직일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지금 아이반이 속한 공략대만 하더라도 거의 40명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몰래 숨어 들어간 모험가들이 수백 명에, 서부 연합 왕국에서 보낼 인원까지. 어쩌면 몬스터보다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따로 휴식을 취할 필요는 없었기에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던전에 들어갔다. 공략대의 사기는 그때까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음!”
일렁이는 차원의 문을 통과해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사나운 이빨이 코를 부여잡았다. 사방에 가득한 지독한 냄새 때문에 괴로운 모양이다.
리저드맨만큼 후각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공감할 수 있었다. 끈적끈적하고 비릿한 피 냄새, 시체가 썩어가는 구린내, 매캐한 재 냄새가 넘쳐흘렀다.
휘이잉- 이레인이 불러낸 바람의 정령이 지독한 냄새를 날려 보내고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었다. 그제야 사나운 이빨이 코에서 손을 뗐다.
“사방에 죽음의 냄새가 가득하다!”
건물이 불길에 그을리고 쓰러졌다. 여기저기 시체가 바닥에 방치된 채로 널려있고, 하늘은 어둑어둑했다. 죽은 자는 많았으나 살아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영 기분이 나쁜 곳이다. 델피노가 미간을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일행에게 신성력을 내뿜으며 말했다.
“수백 년 전, 도시가 파괴되던 때의 모습입니다. 끔찍한 결말이로군요.”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군. 전쟁으로 파괴된 거요?”
“아닙니다. 이 도시가 망한 것은 전염병 때문입니다. 수백 년 전, 아주 끔찍한 역병이 이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죠. 피의 성자 알베르홈이 성자의 칭호를 받은 것은 그 역병을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역병이라는 소리에 앞서 걷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힘차게 내딛던 걸음이 슬그머니 느려졌다. 단련을 열심히 했다고 해서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수백 년 전 서쪽의 인구를 절반으로 줄였다는 최악의 질병이라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건 창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던전이 재현한 과거일 뿐입니다. 그때의 질병이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겁니다.”
델피노가 그들을 안심시켰지만 더는 활기찬 모습이 없었다. 비록 던전의 힘으로 재현된 것이라고는 해도 사방에 시체가 가득하니 자연히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공략대가 길을 걷고 있는데 앞쪽 골목에서 묘한 소리가 들렸다. 들썩들썩 움직이고, 쇠가 바닥을 긁는 소음. 일행이 일제히 멈춰서 검을 들어 올렸다.
긴장감 가득한 눈빛으로 골목을 노려보았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고개를 삐걱거리며 피를 흘리는 모험가 하나가 걸어 나왔다.
쥐고 있다는 표현보다는 걸치고 있는 검이 바닥에 늘어져서 질질 끌리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미 빛이 사라져버린 회색 눈동자가 초점도 없이 움직였다. 키에엑! 살아있는 존재를 발견한 녀석이 쥐고 있던 검을 내팽개치고 이빨을 들이밀었다.
마른 목소리로 쉰 소리를 흘리며 달려왔다. 여기저기 바닥에 널려있던 시체들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스걱! 좀비들이 그대로 토막이 나서 쓰러졌다. 시커멓게 썩은 피가 끈적하게 바닥을 적셨다.
제대로 훈련받은 정예병과 기사들이 한가득하였다. 겨우 좀비들이 위협적이진 않았다.
“좀비! 또 흑마법사 녀석들인가!”
사나운 이빨이 잔뜩 불쾌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이레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병으로 떼죽음을 당한 곳에서 언데드가 나타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야. 흑마법사의 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
지나치게 죽음의 기운이 강하다면 언데드가 자연발생하기도 했다. 도시 하나가 통째로 사라질 정도의 역병이 휩쓸었다면 방치된 시체들이 좀비가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옛 기록에 이런 일들도 있었다고 쓰여 있기는 했습니다. 설마 그걸 제가 눈으로 볼 줄은 몰랐군요.”
델피노가 신성력을 뿌리자 들썩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언데드들이 다시 시체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평범해진 시체를 파라스가 진지한 눈으로 뒤적거렸다.
“뭘 그리 살피시오?”
아이반이 물어보니 파라스가 별거 아니라는 듯 설명했다.
“장비를 보고 있네. 아무래도 이것들은 옛날 장비는 아닌 것 같아서.”
던전은 옛 시대를 재현하기에 수백 년이 지난 장비도 새것처럼 반짝거리고는 했다. 그러나 다 똑같아 보이는 검도 시대에 따라 모습이 달랐고, 방패도 형태가 달랐다. 파라스는 장비들을 대충 훑어보는 것만으로 그것이 600년 전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최근의 것들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여기 있는 시체들, 대부분 얼마 전에 던전에 몰래 들어온 모험가들인데?”
파라스의 말을 들은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하오?”
“내가 보기엔.”
좀비는 짜증이 나는 놈들이지만 아주 위험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실력이 형편없다고는 해도 설마 좀비들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을 리가 없었다.
‘뭐지? 뭐가 그들을 죽인 걸까?’
아이반은 다시 한번 주변에 널려있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딱히 그럴싸한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이해할 수가 없······.”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이반이 문득 자신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피의 검을 소환했다. 우웅- 검이 떨린다.
피의 검 브리카가 무언가에 반응해 몸을 떨고 있었다. 수백 년간 신성력을 담고 있었던 피의 검 브리카에게는 영성이 있었다.
얼마 전 아이반에게 소유권이 넘어와 각성하고, 몇이나 되는 신의 권능을 받아들이면서 검에 생명이 깃들었다. 그런 검이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알리기 위해 아이반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철혈기사가 묻자 아이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이제부터 그것을 알아보려는 중이오.”
푸드득! 아이반의 그림자에서부터 두 마리 까마귀 정령이 나타나 하늘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