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08
“고디 흐라픈블로트스(Goði hrafnblots:까마귀를 부리는 사제).”
후긴과 무닌이 하늘에서부터 세상을 살폈다. 흘리드스캴프에 앉아있는 까마귀의 신에게 정보를 재잘거리듯이 아이반에게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을 알려주었다.
“음······.”
한동안 까마귀의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아이반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저 멀리서 특이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모이고 있었다. 그것이 흐릿한 형상을 만들었다.
이가 잔뜩 나가 있는 낫과 잔뜩 낡은 검은색 로브, 사악한 안광.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죽음의 기운이 요동쳤다. 멀쩡하던 사람들이 풀썩 바닥에 쓰러지고 시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하니 델피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악마입니다. 죽음의 악마나 역병의 악마 정도 되겠죠.”
악마의 힘으로 절망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지독한 절망이 악마를 부르기도 했다. 역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이 신을 외치다가 결국은 원망하며 죽었을 것이다. 그건 어떤 면에서 악마를 소환하는 가장 투박하고 기초적인 방식이었다.
“악마라고?”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시작부터 악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던전을 한껏 얕보고 있다가 한 방 먹은 셈이었다.
“···일단 악마를 피해서 움직이겠소. 아직 제대로 정체도 모르는데 함부로 악마와 싸울 수는 없지. 아무리 녀석이 던전에 붙잡힌 가짜라고는 해도 섣불리 덤빌 수는 없소.”
신중한 판단이었다. 공략대를 이끄는 대장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결정이다.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면 그렇게······.”
치지직! 그때 아이반의 마력이 줄어들고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의 마력을 제멋대로 뺏어간 토르가 번개를 집어던졌다.
쾅! 강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토르가 내리친 번개가 악마의 머리에 떨어졌다.
기사와 병사들은 깜짝 놀라서 하늘을 바라보았고, 일행의 시선은 아이반에게 향했다. 저 멀리 있던 악마가 아이반을 발견하고 흉흉한 기세로 날아왔다. 그러자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 역시 번개를 내리친 것이 아이반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가 당황해서 아이반에게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요?”
씨부럴, 망할 토르! 하여간 누구 뚝배기 깰 일만 생기면 아주 몸이 들썩들썩하지. 번개는 왜 때리고 지랄이야? 수전증이라도 생겼나? 속으로 한껏 욕설을 내뱉던 아이반이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르드의 전사는 싸움을 피하지 않소.”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아이반이 뛰어올랐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그가 수습해야만 했다.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강하게 마력을 내뿜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쾅! 건물을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거리를 좁힌 아이반이 피의 검 브리카를 휘둘렀다. 빠르게 날아오던 악마가 뒤로 밀려나고 아이반이 바닥에 착지했다.
음습한 악마의 마력이 아이반의 몸을 노리고 스며들다가 튕겨 나갔다. 사악한 저주의 기운 역시 그러했다.
‘썩 강한 녀석은 아니네.’
어디까지나 던전의 힘으로 재현된 가짜였다. 실제로 현신한 악마라면 무척이나 곤란했겠지만, 지금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마녀가 사역마로 부리고 있던 악마의 키메라보다도 약했다. 물론 아이반의 기준에 그렇다는 말이지 녀석이 정말로 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녀석이 거대한 낫을 휘두를 때마다 땅이 썩어가고 망자가 일어났다. 건강한 사람조차 순식간에 쇠약해서 쓰러져 죽을 저주가 흘러나왔다.
평범한 모험가라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대부분의 용병은 그럴 실력이 없었다.
스걱! 아이반이 검을 휘둘렀다. 악마의 육신이 잘려 나가 검은 연기로 흩어졌다.
녀석의 존재감이 확연히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우웅- 델피노가 신성력을 내뿜었다.
빛의 사슬이 나타나 악마의 몸을 묶었다. 녀석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 크아아아아! 악마가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녀석의 목소리가 아니라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은 누군가를 따라 한 것이었다.
“윽!
” 악마의 비명에 담긴 저주 때문에 병사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비틀거렸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델피노는 그들을 힐끔 살피고는 따스한 신성력을 밀어 넣었다. 병사들을 괴롭히던 저주가 사라졌다.
그 사이 아이반은 피의 검 브리카로 악마의 심장을 꿰뚫었다. 녀석의 존재를 유지하던 사악한 마력이 그대로 검에 빨려 들어가 순수한 힘의 형태로 쌓였다.
스스슥- 녀석이 사라지자 주변을 오염시키고 있던 저주가 흩어졌다. 언데드로 변하려던 시체들도 금방 힘이 다해 쓰러졌다.
처음 아이반이 전투를 참을 수 없다며 뛰쳐나갈 때만 하더라도 미친놈 바라보듯 보았던 기사와 병사들이 놀라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이러니 싸우려 했던 거군.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을 돌아가려 했으니 답답했겠어. 이해하오.”
그 말을 들은 아이반은 몹시 민망해졌다. 전혀 그런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음!”
딱히 할 말이 없었던 아이반은 그저 무게를 잡으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행히 다른 이들은 나름대로 납득을 하는 모습이었다.
“역시 노르드의 전사입니다. 전투에 임하면 물러나지 않고 용맹하기 짝이 없다더니 역시 대단하군요.”
싸우다가 한 칼 맞으면 이제야 오딘을 뵙겠다며 껄껄 웃다가 쓰러진다는 광전사의 소문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침대에서 죽으면 치욕스러운 일이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노르드의 문화가 아닌가.
그런 노르드의 전사에게 전투를 참으라는 것은 어쩌면 무리한 요구였을지도 모른다며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로야 싸움에 미친 야만인 새끼라며 욕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겉으로는 그를 탓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단숨에 악마를 토막 쳐서 죽여 버린 전사에게 누가 대놓고 그러겠느냐만.
“악마를 처리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오. 녀석은 던전의 힘으로 재현된 놈이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타날 것이 분명하오.”
역병이 돌아서 멸망한 도시의 원한이 악마를 불러왔을 뿐이다. 던전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악마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낼 거다.
“이런 녀석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어중이떠중이는 깊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었겠지. 모험가들이 아직 던전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 이해되는데?”
이레인이 악마의 흔적을 살피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이반이나 되니까 쉽게 처리한 거지 보통의 모험가들에게는 턱없이 어려운 상대였다.
이 녀석은 물리력이 거의 통하지 않아서 마력으로 처리해야만 하는데, 평범한 용병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한 지역에서 제법 명성을 얻고 있는 용병 수준은 되어야 한 번 검이나 들이밀어 볼까, 그게 아니라면 악마가 내뿜는 저주조차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녀석이 전부는 아닐 텐데.’
던전에 들어왔다면 적어도 성수 몇 병 정도는 챙겼을 거다. 그렇다면 이 녀석에게 모두 죽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아직은 단서가 너무나 부족했다.
“던전의 힘으로 재현되었을 뿐이라면 수백 년 전에는 정말로 이 모습이었다는 뜻이겠지? 정말 개판이었군.”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악마가 다시 나타난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서둘러 움직여야겠소. 혹시 다른 생존자가 있는지 살펴보고 그들을 만나 정보를 얻어야겠어.”
그러면서 그는 아이반을 힐끔 보았다. 적을 만나면 또다시 참지 못하고 달려들지는 않을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좀 참아주시오. 아니면 미리 언질이라도 주거나.”
아이반은 입을 다물고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요.”
수백 년 전의 비극을 재현한 던전은 무척이나 끔찍했다. 집마다 시체가 가득하고 살이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가끔은 숨어있던 언데드가 튀어나오고, 미쳐버린 사람들이 서로를 찔러서 죽은 흔적도 발견했다.
“묘하군요. 원래 원한이 있던 사이였을까요? 아니면 여기서 다투다가?”
흔적을 보면 둘은 일행이었다. 한동안 같이 움직이다가 갑자기 서로에게 칼을 휘둘러 죽은 것이다.
“우연은 아니겠지. 악마 같은 놈이 더 있단 소리요.”
도시는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니었다. 가볍게 수색하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흘렀다. 그러나 생존자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좀 이상했다.
“이제 의심스러운 곳은 딱 한 군데뿐이군.”
도시 한 가운데에 지어진 성. 생존자가 남아있다면 모두 그 안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였다.
“미리 들어간 모험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해결하지 못하면 정보를 모아서 나의 진입을 기다리기로 했소.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자발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란 소리겠지.”
철혈기사가 무거운 눈빛으로 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전쟁을 경험한 노련한 기사인 만큼 성을 공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괴물이 지키는 성이라니,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되는구려.”
아이반은 성문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면으로 돌파해야 하나? 샛길 같은 것은 없소? 예를 들면 하수구나.”
오래된 성은 지하수로를 파서 오물을 흘려보내곤 했다. 이곳도 그렇다면 그쪽으로 침투해보는 것도 선택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레인이 가장 먼저 반대 의견을 냈다.
“역병으로 멸망한 도시의 지하수로로 움직이자고? 썩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틀림없이 아주 지독한 곳일 거야.”
철혈기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했다.
“글쎄, 지하수로가 그리 클 것 같지는 않은데. 우리는 인원이 오십 명에 가깝소. 모두가 움직일 만큼 공간이 넉넉할 리가 없지. 잘못하면 그 안에서 반항 한 번 못하고 쓰러질 수도 있소.”
하수구라는 말에 시무룩하게 있던 사나운 이빨이 투지를 불태우며 소리쳤다.
“정면으로 뚫고 가면 된다! 우리가 질 리가 없다!”
그러자 아이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정문으로 가지. 그게 낫겠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아이반의 시선은 지하로 향했다. 피의 검 브리카가 떨면서 지하를 가리키고 있었다.
도대체 그곳에 뭐가 있기에 검이 반응하는 것일까?
‘다른 길이 있을 거다. 지하수로는 적절한 길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