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09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의 검 브리카를 쓰다듬었다.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브리카가 진동을 멈췄다. 아이반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칼을 쓰다듬고 있는 것을 본 철혈기사가 얼른 일행을 재촉했다.
아이반이 또다시 싸움을 찾아서 미쳐 날뛰기 전에 움직이려는 것이다. 지금쯤 그들이 던전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서부 연합 왕국 쪽에서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면 마냥 여유를 부릴 수도 없었다.
“그러면 성문을 뚫고 들어간다! 모두 전투 준비!”
철혈기사가 굳은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얼굴에서는 세월의 흔적을 숨길 수가 없었으나, 그의 체력과 힘만큼은 젊은 시절 못지않았다. 예전 전쟁터를 누비던 그때의 기세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오랜만의 전투를 앞두고 그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가 길을 연다!”
철혈기사가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두꺼운 내성의 성문을 향해 그가 날아오르듯 뛰어서 검을 휘둘렀다.
스걱! 두꺼운 나무에 철판을 덧댄 성문이 그대로 쪼개졌다. 철혈기사가 성문을 잘라내고 길을 열자 녹슨 피 기사단과 병사들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긴장했던 것과 달리 내부는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듯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밖과 달리 이곳에는 바닥에 널려있는 시체조차 없었는데, 그게 더욱 기묘하게 보였다.
“모두 조심하십시오! 악마의 기운이 더욱 진해졌습니다!”
델피노가 소리치지 않아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있다.
이곳에 뭔가 기다리고 있다. 툭, 투둑, 탁! 조심스럽게 걸어가던 병사 하나가 실수로 돌멩이 하나를 걷어찼다.
워낙 조용하다 보니 그 소리마저도 크게 들렸다. 순간 돌멩이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아이반이 검을 들어서 올렸다.
내성에 장식되어 있던 조각상들이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다.
“가고일! 석상이 움직인다!”
괴물을 닮은 석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가루가 흩날리고 녀석들이 발톱을 드러냈다.
“침착하게 움직여라! 침착하면 이길 수 있다!”
철혈기사가 소리치자 기사와 병사들이 일제히 자리를 잡고 움직였다. 서로가 공격과 방어를 나눠서 가고일과 싸우기 시작했다.
가고일의 주먹질을 병사 둘이 방패를 들어 막아내고, 기사가 녀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만들어진 기회를 살려 조금씩 깎아나갔다. 하나하나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실력이었지만 그들이 모여서 움직이니 빈틈이 거의 없었다.
하루 이틀 손발을 맞춰본 솜씨가 아니었다. 오랜 훈련의 결과였다.
다른 이들이 그렇게 가고일과 싸우는 동안 아이반은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누군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헤임달, 당신의 감각을 빌려주시오.’
아이반의 몸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이미 날카로웠던 그의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양털이 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귀가 좋아지고, 세상의 끝을 볼 만큼 눈이 좋아졌다.
말 그대로 이 땅을 굽어살피는 초월자의 감각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평소의 감각으로는 희미했던 것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치지직! 쾅! 아이반이 땅을 박차고 움직였다.
숨어있던 녀석은 재빨리 몸을 피하려고 했으나, 천둥걸음은 직선 이동만큼은 무척이나 빨라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일렁이는 공간을 찢고 아이반의 손이 뻗어졌다.
이차원에 숨어있던 녀석은 설마 자신이 붙잡힐 줄은 몰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녀석이 뭐라고 말을 내뱉으려고 했으나, 아이반은 그대로 녀석의 멱살을 붙잡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컥! 자, 잠깐!”
녀석이 거친 호흡을 토해낼 때 아이반이 칼을 박아넣었다. 녀석의 머리 옆, 손가락 한 마디만큼 떨어진 곳에. 캉! 피의 검 브리카가 내뿜는 날카로운 기운이 녀석의 볼을 스치고 지나가 주르륵 피가 흘렀다.
거칠게 반항하려던 녀석의 움직임이 멈췄다. 녀석이 떨리는 눈동자를 굴려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입을 막은 아이반이 덤덤하게 말했다.
“밥 먹을 손가락은 남겨두길 바란다.”
빠각!
“으악! 말, 말하겠···!”
으드득! 녀석이 뭐라고 소리치든 아이반은 왼손의 손가락을 모두 꺾어버렸다. 이쪽 세계에서 손가락이 꺾인 것은 그리 큰 부상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제대로 된 사제에게 힐 한 번만 받으면 죄다 회복될 거니까. 심문할 때는 분위기가 가장 중요했다. 분노를 터트리며 팔을 잘라내는 것보다 정말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듯 손목을 비트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잔뜩 화가 난 정상인보다 침착한 미친놈이 더욱 무서우니까.
“이름.”
“제, 제이스, 윽!”
아이반은 대뜸 녀석의 손등에 단검을 박아 넣고 말했다.
“네 놈 이름은 관심이 없다.”
녀석이 고통 속에서도 황당한 눈빛을 보냈다. 자기가 물었으면서 이게 뭔 짓인지 어이가 없겠지. 탁! 아이반은 손등에 박아 넣은 단검을 비틀어 빼냈다. 완전히 걸레짝이 된 손을 붙잡고 고통에 신음하는 녀석의 뺨을 때렸다.
“내가 관심이 없어도 물었으면 대답을 했어야지.”
그러자 녀석은 아이반을 완전히 미친놈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아주 좋은 태도였다. 그렇게 짧게 심문한 뒤에 녀석을 끌고 일행에게 돌아왔다. 그동안 가고일을 모두 정리하고 쉬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철혈기사는 아이반이 붙잡아온 녀석을 힐끔 살피고는 말했다.
“갑자기 뛰쳐나가기에 뭔 일인가 했더니, 생존자요?”
“그렇소. 서부 연합 왕국에서 몰래 들여보낸 모험가라더군. 그렇지, 제이스?”
아이반이 툭하고 발로 차자 제이스가 움찔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서부 연합 왕국의 탈로인 자작에게서 의뢰를 받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원래 비밀유지조항이 있었겠지만 당장 눈앞에 창칼이 들이미는데도 입을 다물 만큼 신의가 넘치진 않았다. 충성을 바치는 기사도 아니고 계약 관계에 불과하니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서로 뒤에서 손을 쓰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비밀유지조항이라는 것도 크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 궁금한 것은 제이스가 누구의 사주를 받고 던전에 들어왔냐는 것보다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이다.
“그, 처음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가끔 망령이 등장하고 언데드가 튀어나오기는 했지만, 그 정도를 상대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성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내부 구조가 너무나 복잡해서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 더는 진행할 수가 없었어요. 우리는 그것이 결계 때문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공간을 왜곡하고 감각을 흐리게 만드는 결계의 힘. 수백 명에 가까운 모험가들이 입구를 찾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았다면 그것 외에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일부 모험가들이 지하를 통해 들어가기로 했고, 다른 이들은 아예 성벽을 부수며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악마가 나타났다고 했다. 악마가 뿌리는 지독한 저주에 당해서 모험가들이 쓰러지고, 좀비가 되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악마라면 이미 우리가 처리했다. 진짜 그 녀석에게 모두 당했다는 말이냐?”
역병의 악마가 제법 강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모험가들이 모두 당할 정도는 아닐 텐데. 그런 의미를 담은 철혈기사의 물음에 제이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악마는 시작일 뿐입니다. 진짜는 따로 있었죠. 피를 탐하는 사악한 놈들, 뱀파이어가 이곳에 있었습니다.”
“뱀파이어?”
“예, 그렇습니다. 아주 잔혹하고 끔찍한 놈들이었죠.”
그러다가 제이스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때의 공포가 다시 밀려오는 모양이다.
“저는 이차원으로 잠시 몸을 숨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덕분에 뱀파이어들에게서 살아남을 수가 있었죠. 하지만 바깥을 돌아다니는 악마는 이차원에 숨은 저를 꿰뚫어 볼 수가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녀석을 감당하지 못해서 밖으로 나갈 수 없었죠.”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이나 그럴듯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낮게 거친 숨을 내뱉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알 수 없는 리자드맨의 언어였다.
“사나운 이빨, 저 녀석을 지켜보시오. 여러모로 수상한 녀석이야.”
동료를 모두 잃었다는 녀석치고 지나치게 멀쩡했다. 전투의 흔적은 있었으나 부상은 전혀 없었고,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이차원에 몸을 숨기는 능력은 모험가보다는 오히려 암살자에 어울리는 능력이었다. 아이반조차 언뜻 위화감을 느낄 뿐이었으니 웬만한 사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겠지. 여러모로 작위적인 녀석이었다. 놈이 하는 말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반이 힐끔 이레인을 바라보니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제이스를 살피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마법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엘프의 눈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대상의 본질을 본다는 엘프가 경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평범한 녀석은 아닌 모양이다. 사나운 이빨도 그것을 깨닫고 조용히 말했다.
“놓치지 않겠다.”
그 사이 델피노가 제이스에게 다가가 엉망이 된 손을 치료해주었다. 비틀리고 꺾인 손가락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단검에 꿰뚫린 손등이 아물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반의 방식이 조금 거칠었다면 미안합니다. 저희도 상황이 상황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해주세요.”
제이스에게 정보를 좀 더 알아내기 위해 일행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불안하기는 했으나 아무런 정보도 없이 진행할 수는 없었다. 녹슨 피 기사단이 제이스를 데려가 정보를 뽑아내는 사이 델피노가 차가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 구마사제로서의 그의 모습이었다.
“저 사람, 평범한 인간이 아닙니다.”
상처를 치료하며 신성력을 내뿜어 제이스의 내부를 살핀 델피노는 그의 몸에 어두운 기운이 새겨져 있음을 깨달았다. 워낙 은밀해서 보통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지만, 구마사제인 그는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아주 원시적이고 투박한 방법이지만 사역마의 계약입니다. 제이스는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어요.”
그 말에 이레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의 영혼을 억누르는 무언가가 있어. 그래, 어쩌면 이미 뱀파이어에게 당한 상태인지도 모르겠네. 이차원으로 몸을 숨기는 것도 제이스의 능력이 아니라 뱀파이어의 힘일 수도 있고.”
하긴, 평범한 모험가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보다는 훨씬 합리적인 생각이긴 했다.
“그러면 뱀파이어가 스스로 자신에 관한 정보를 흘렸단 말이오?”
“아마도. 우리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원하는 모양이지.”
그 말에 아이반은 피의 검 브리카를 꺼내 들었다. 점점 떨림이 강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브리카가 지하를 가리키는 것이 뱀파이어 때문일지도 모른다.
“피의 검 브리카, 피를 바친 대가로 힘을 내려준다는 붉은 잔, 피의 성자 알베르홈. 확실히 뱀파이어가 튀어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군.”
아이반이 델피노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없냐는 물음이다. 델피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당시 기록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600년 전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니까요. 아주 지독한 전염병이 돌았고, 전쟁이 가득했습니다. 뱀파이어와 관련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장담할 수가 없군요. 쿤다라 교단에서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륙 서쪽이 지금처럼 안정을 찾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지난 수백 년간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생겼다가 사라졌으니 제대로 기록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브리카가 사실 난쟁이의 솜씨라고 했지. 난쟁이와 뱀파이어는 무슨 연관이 있소?”
그 말에 파라스가 무척이나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대를 이어 난쟁이를 쫓아온 그도 전혀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잘 모르겠네. 난쟁이가 한동안 이쪽 지역에 머물렀던 것은 확실하지만, 혼란스러운 시기를 지나면서 흔적이 많이 사라져버렸어.”
턱을 긁적이며 고민하던 그가 확신할 수는 없다는 듯 자신의 추측을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