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1
큰돈을 벌었으니 생각 없이 쉬고 싶었다. 장기 숙박을 걸어놓았던 바람소리 여관으로 돌아온 그는 동화 네 개를 내밀며 빠르게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뜨거운 물에 들어간 채 눈을 감고 있으니 세상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씨부럴, 보물이고 나발이고 다 뭐야. 이게 지상낙원이지.”
며칠 동안 흙먼지, 뼛가루, 썩은 피와 살점, 독 연기까지 죄다 뒤집어쓴 아이반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땟국물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그는 돈을 추가하고 몇 번이나 뜨거운 물을 보충 받아야만 했다.
슥, 스슥! 그렇게 때를 씻어내고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과 머리카락까지 정리를 하고 나니 충분히 미남이라고 불릴 멀끔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러나 아이반에게는 영 낯설기만 했다.
” 쯧.”
하얀 피부에 우뚝한 콧날, 짙은 눈두덩이, 금발에 푸른 눈동자. 이건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노르드의 모험가, 아이반 에시르손의 얼굴이지.
얼굴도, 이름도, 행동과 사소한 습관, 사고방식까지.
이제는 원래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걸 이렇게 문득문득 자각할 때마다 그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슬퍼해야하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기뻐해야하나? 그럴 수는 없었다. 작은 거울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외면한 아이반은 인벤토리에서 빳빳한 새 옷을 꺼내 입고 밖으로 나갔다. 국밥.
뜨끈한 국밥이 먹고 싶다.
이왕이면 고춧가루를 팍팍 뿌려서 얼큰하게.
오늘은 얼큰해지고 싶은 날이다.
“이봐, 아이반! 여기야, 여기!”
아이반이 근처에서 든든한 국밥을 한 그릇 뚝딱하고 여관으로 돌아오니 1층 테이블 하나를 붙잡고 랄프가 술을 들이 키고 있었다. 아이반은 그를 흘깃 보고 지나치려는데, 랄프가 손을 뻗어서 굳이 그를 자리로 불렀다.
“무슨 일이시오?”
“흐, 무슨 일이긴! 우리는 동료가 아닌가, 동료! 그 빌어먹을 곳에서 살아 돌아온 동료! 보물을 함께 나눈 친구!”
랄프는 이미 술이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결코 입 밖으로 뱉지 않을 말들을 아무렇게나 늘어놓았다. 보물.
그 말이 들린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눈빛이 묘하게 변한 것이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큰일이 나겠군.’ 물론 지금은 용병길드가 개빡쳐서 눈이 돌아간 상황이니 함부로 일을 벌였다간 죄다 잡혀서 머리가 댕강 날아갈 거다.
소문에 빠르고 생각이 있는 놈들이라면 욕심이 생겨도 쉽게 움직이지 않겠지.
하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현명했다면 아이반이 던전에서 사람을 썰 이유가 없었다.
“술을 많이 마셨군.”
아이반이 무서운 얼굴로 바라보자 랄프가 찔끔 목을 움츠렸다. 본인도 순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크, 크흠! 미안하게 되었소!”
“아니, 넘어가지. 어차피 곧 소문이 퍼질 테니.”
랄프의 앞자리를 빼고 앉은 아이반이 맥주를 시켰다. 이 동네는 죄다 수제맥주라 가게마다 술맛이 다 달랐는데, 확실히 여기 맥주는 매력이 있었다. 꿀꺽꿀꺽 찌르르
“크으!”
따끔한 탄산이 목을 찌르고 차가운 맥주가 넘어간다.
그렇게 한 잔을 쭉 들이켜 마시고나니 목구멍에 잔뜩 끼어있던 텁텁함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여기 맥주 두 잔! 고기와 소시지도 넉넉하게.”
새롭게 주문을 마친 아이반이 앞을 보니 랄프가 깨작깨작 감자를 조각내고 있었다. 영 기운이 없었다. ‘뭐라도 위로를 해야 하나?’ 평생을 아싸로 살아온 아이반은 사람 대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 망할 세계로 넘어온 뒤로는 다가오는 사람마다 목을 따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해서부터 고민해야했고.
따끈따끈한 소시지 하나를 입에 집어넣은 아이반은 우물거리면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질문을 던졌다.
“방패를 쓰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더군. 그냥 길바닥에서 익힌 기술은 아닌 것 같던데?”
그러자 랄프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흐, 그렇소. 한때 기사 지망생이었거든. 딱딱한 기사단 생활은 체질에 맞지 않아서 몇 년 다니다가 때려치웠소. 꾹 참고 버텼으면 기사님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는데 . 지금 생각하면 멍청한 짓이지. 그때는 나도 어렸소.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안다고 생각했던 거요.”
그래서 그는 스벤과 쉽게 친해졌다고 했다.
규율이 엄하기로 소문난 동부 전선 레인저 출신이라 이리저리 공통점이 많았으니.
“젠장. 어쩌면 그 자식은 레인저 생활이 답답해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거기서도 동료를 찌르고 튀었을지도 모르겠군. 망할 자식.”
한참이고 스벤을 욕하던 랄프는 이내 자신의 기사단 시절 이야기를 읊어놓았다. 남자는 어디서나 술 마시면 스포츠 이야기, 여자 이야기, 군대 이야기라더니 이세계에 와서도 그건 달라진 것이 없는 듯 했다.
“흐, 당신은 어떻소? 듣자하니 노르드는 척박해서 사람이 억셀 수밖에 없다던데. 몬스터도 많이 튀어나오고.”
대륙북부는 눈과 얼음이 가득한 척박한 동네였다. 거기서 사는 사람들을 노르드인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의 외모나 생활상, 모시는 신들이 아스가르드의 신들이라는 것을 보면 딱 바이킹이었다.
노르드인들은 세계수가 불타고 세상이 멸망하는 재앙을 피해 다른 세계에서 이곳으로 넘어와 정착했다고 하는데, 듣다보면 라그나로크 이후에 세계를 건너왔다는 소리였다. 그러면 다 뒤졌을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왜 멀쩡히 살아서 가호를 내리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노르드인들 사이에서는 온갖 신화적 해설이 돌아다니고 있는 모양인데, 아이반은 그냥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말이 안 되는 걸로 따지면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는 지금 상황도 말이 안 되긴 매한가지였다. 몬스터 때려잡는다고 경험치가 오르고 스킬 포인트로 기술을 배우는 것은 정상적인 일인가.
어쨌든 가짜 노르드인인 아이반에게 북부에서의 추억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충 자신의 군 생활을 떠올리며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북부에는 계절이 세 개밖에 없소.”
“응? 그게 무슨 뜻이오? 너무 추워서 여름이 없다는 말인가?”
“여름, 겨울, 빙하기. 여름에는 팔뚝만한 요정들이 날아다니고 겨울에는 사방이 얼어붙지. 빙하기에는 숨 쉬는 것조차 고역이오. 침을 뱉으면 날아가다 얼어붙는 곳이니.”
“그거 끔찍하군. 그런 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단 말이오?”
“사람 목숨은 질기니까.”
“크, 그래도 요정이라니. 한 번쯤은 나도 보고 싶군.”
“추천하지는 않소. 나와 동료들은 그들을 팅커벨이라 불렀는데 아주 사악하고 역겨운 모습이었거든. 사실 요정보다는 마물에 가까운 존재요.”
그렇게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른 채 입을 놀리면서 아이반은 아무렇지 않은 척 주변을 살폈다. 아까 전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보였지만 근처에 있던 몇몇 손님들이 바쁘게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도. 힐끗 아이반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자신이 머무는 방이 있을 공간을 향해.
‘ 젠장, 오늘 밤에도 곱게 잠들긴 글렀군.’
“으으, 으어억!”
지끈지끈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랄프는 한참을 끙끙거렸다. 어제 도대체 얼마나 술을 많이 마신 것인지 숙취가 심해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이제 일어났소?”
낮고 무거운 남자의 목소리. 언뜻 부드럽다고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아는 랄프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
아이반이 창가에 앉아 목걸이를 닦고 있었다. 이번에 던전을 해결하면서 그의 몫으로 떨어진 물건이었다.
“생각보다 술이 약하시더군. 죽은 듯이 잠들기에 깜짝 놀랐소. 물론 진짜로 죽을 뻔하기도 했고.”
그 말에 랄프가 주변을 둘러보니 좁은 여관방이 사람으로 꽉 차있었다.
각자 꺾일 수가 없는 방향으로 팔다리를 하나씩 꺾은채 쓰러져서.
“이, 이건 !”
“지난밤에 당신이 술을 먹다 함부로 입을 놀린 결과지. 그나저나 보물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밤에 습격이라니, 하여간 개 같은 곳이야. 너무 역겨워서 친근함이 생길 정도군.”
사실 이 습격마저도 랄프의 수작질은 아닐까 의심하며 놈들을 캐물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냥 아이반이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너무 깊이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까지 동료를 의심하며 헤어지고 싶지도 않았고.
“젠장, 엿 같은 세상이군.”
시니컬하게 욕설을 내뱉은 아이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은 사람은 없소. 꽤 마음에 들던 여관이라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러니 뒤처리는 그대가 알아서 하시오. 같이 의뢰를 하면서 쌓은 정으로 하룻밤 목숨을 지켜줬으면 의리는 다 했으니까.”
“그, 미안합니다.”
“별 말씀을. 누구나 약해질 때가 있는 법이지. 이겨내시오.”
그렇게 툭 말을 내뱉은 아이반은 가죽 배낭을 짊어지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떠나야할 때가 된 듯싶었다.
이곳 음식은 한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한 달 장기 숙박을 걸어두고 며칠 머물지도 못했군.’ 아까운 일이지만 이런 것이 용병의 삶이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를 부평초와 같은 삶. 여기저기 던져주는 사료를 헉헉거리며 핥아먹는 개 같은 인생.
1층에서 가볍게 아침을 해결한 아이반은 방을 비우고 여급에게 떠날 것이라 일러두었다. 계약했던 한 달에서 며칠 정도 여유가 있었으나 그 차액을 되돌려 받지는 못했다. 애초에 그런 조건으로 할인을 받았으니까. 아이반은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이고 용병길드로 향했다. 역시나 용병길드는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한쪽 구석에서 인상을 찡그리며 누군가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빌리가 아이반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큰 건 하나 성공시키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하러 왔소? 거 참, 부지런한 친구로군.”
“내가 그렇게 성실한 사람은 아니오. 간밤에 잠자리가 뒤숭숭했거든.”
그것만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은 빌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위로했다.
“저런, 그렇게나 발 빠른 녀석들이 있었군. 망할 놈들, 그런 속도로 의뢰나 해결할 것이지.”
“그래서 에민의 숙소가 어딘지 물으러 왔소. 더 귀찮아지기 전에 청색 마탑에 유물들을 팔아넘기려고 하오.”
“으음, 원래 손님의 위치는 함부로 알려주는 것이 아닌데 .”
잠시 고민하던 빌리는 이내 그 정도는 상관없겠다고 여긴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주소를 알려주었다. 에민은 경비대에서 직접 치안을 맡고 있는 고급 여관에 묵고 있었다. 던전에서 겪은 일로 크게 위협을 느낀 그가 자리를 옮긴 것이다. 듣기로는 용병길드에서 사과를 표하며 공짜로 호위를 붙여주겠다고 했으나 거절했다고 했다.
실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아이반이 그쪽으로 갔을 때 에민은 마침 1층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세상의 무서움을 깨닫는 것과 별개로 아이반에게 신뢰가 생긴 그는 크게 반겨주었다.
“어서 오세요! 하하, 식사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