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10
“내가 붉은 잔은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만, 피의 검은 무척이나 특이한 기능을 가지고 있어.”
피의 검 브리카는 외부의 기운을 흡수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 기운이 얼마나 오염된 것이든 일단 집어삼킨 다음 그걸 적당히 가공해서 순수한 기운으로 다시 돌려주는 것이다. 무척이나 훌륭한 기능이기는 했지만 그게 사실 평범한 사제에게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반처럼 여러 신에게서 힘을 얻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고, 대부분은 하나의 신에게 힘을 내려받으니까. 그러면 여러 힘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이 하나의 기운에만 특화하여 증폭시키는 것이 훨씬 나았다. 대부분의 성검이 그런 식이었으니까. 어쩌면 피의 검 브리카는 뱀파이어를 위해 만든 물건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피의 성자 알베르홈이 우연히 얻어서 사용했을 뿐일 수도 있겠지.
“어쩌면 잘된 일이 아닌가? 어차피 우리는 난쟁이의 흔적을 쫓고 있었는데, 이곳에 잠들어 있던 뱀파이어가 어쩌면 난쟁이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결국 뱀파이어를 붙잡아야만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대강의 목표를 정한 그들은 곧 잠자리에 들었다. 쉽게 잠들 수는 없었으나 그런 순간에도 잘 수 있어야만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깊은 밤, 아이반이 문득 눈을 떴다. 잠자리가 불편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빠르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고, 그건 단순한 요령이 아니라 하나의 기술이었다. 이유 없이 깨어날 리가 없었다.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사의 감각이 날카롭게 일어나고 마법사의 영감이 미래를 엿보았다. 사냥꾼의 경험이 속삭이고 암살자의 악운이 가리켰다. 챙! 아이반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꺼내 들자 잠들어있던 동료들 역시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입니······.”
잠기운이 싹 가신 얼굴로 델피노가 묻다가 입을 다물었다. 굳이 물을 이유가 없었다. 그도 이제는 몸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아니, 성의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어두운 밤, 달빛에 비친 그림자가 이리저리 일그러지며 괴물의 모습으로 변했다. 정제되지 않은 난폭한 살기가 쏟아졌다. 그제야 화들짝 놀란 병사들이 허둥지둥 무기를 들었다.
“하긴, 던전 안에서 편안히 잔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아이반이 창을 빙글 돌리며 앞으로 나섰다. 성이 그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아이반은 피하지 않았다. 쾅! 휘이잉! 돌로 된 바닥이 깨지고 폭풍이 휘몰아쳤다. 온갖 짐승의 모습을 한 그림자 괴물들이 몸이 찢어지고 흩어졌다. 화아악! 등 뒤에서 신성한 빛이 솟아올랐다. 그림자 괴물들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변하자 아이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을 찔렀다. 이름 붙이기로 관천, 하늘 꿰뚫기. 치지직! 쾅! 아이반이 내민 창 앞에 있던 녀석들이 단번에 몸이 터졌다. 새하얀 번개가 쏘아져 나가 성벽을 시커멓게 태웠다. – 끼야아아아악! 귀를 찢는 듯한 여성의 비명이 울렸다. 살아있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지독한 원한을 가진 망자의 원혼이 피눈물을 흘리며 날아왔다.
“이미 죽은 자들이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의 앞을 막아서느냐!”
철혈기사가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원혼들이 뭉쳐지려다 말고 반으로 쩍 갈라지며 흩어졌다. – 끼야아아아악! 녀석들의 비명에 담긴 저주가 정신파의 형태로 퍼졌다. 기사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것으로 견뎌냈으나 병사들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피우우웅!
“컥!”
어디선가 화살이 나타나 쓰러진 병사들을 꿰뚫었다. 아이반이 고개를 휙 돌리니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사람이 활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탕! 아이반이 순식간에 솟구쳐 녀석을 붙잡았다. 천둥걸음으로 거리를 좁혀 녀석을 그대로 바닥에 눕혔다.
‘뭐지 이 녀석은?’
죽은 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심장이 뛰는 속도가 무척이나 느리고 몸이 차가웠다. 그때 흐릿하고 멍한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그는 아이반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검은 나의 것이다.”
쾅!
아이반이 녀석의 머리를 후려쳐 터트렸다. 순간적으로 섬뜩한 기운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피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더니 스스로 폭발했다. 뜨거운 폭풍이 아이반을 스치고 지나갔다. 위험함을 느끼고 훌쩍 뒤로 물러났음에도 강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화상을 입지 않았음에도 짧게 작열통이 느껴졌다. 짙은 저주가 인위적인 고통을 주입한 것이다. 아주 잠시나마 아이반의 항마력을 뚫다니, 무척이나 위험한 저주였다. 우웅- 아이반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오딘의 권능이 차오른다. 마법의 신이 그에게 힘을 내려주자 아이반의 항마력이 한층 강해졌다.
“푼딘(Fundinn:발견).”
아이반이 오래된 노르드의 언어로 짧게 주문을 뱉었다. 그의 마력이 사방으로 퍼지고 이질적인 존재를 빠르게 찾아냈다. 하나하나 마력이 반응할 때마다 아이반의 표정이 굳어졌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를 자들이 어느새 주변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은밀했다. 컹, 컹! 아이반의 그림자에서부터 두 마리의 늑대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게리와 프레키, 시체를 먹는 늑대들이 전장으로 뛰어들어 날카로운 이빨로 적을 찢어발겼다. 화아아- 델피노가 뿜어내는 신성력의 빛이 점점 강해졌다. 창백한 얼굴을 가진 적들이 크게 고통스러워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몸이 조금씩 타들어 갔다.
“썩은 피 냄새가 진동한다!”
사나운 이빨이 크게 소리치며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검으로 적들의 몸을 두 동강 내고, 주먹을 휘둘러 터트렸다. 그의 꼬리에 맞은 녀석들이 한참이나 바닥을 뒹굴었다. 녀석들이 오염된 피를 뿌리며 자폭했으나 사나운 이빨은 아랑곳하지 않고 날뛰었다. 용의 불꽃을 견딘 그에게 저주가 통할 리가 없었다. 피우웅- 사나운 이빨이 적진을 헤집는 사이 이레인은 부지런히 자리를 이동하면서 화살을 쏘아 보냈다. 녀석들이 날려 보낸 화살을 그대로 요격하고, 역으로 저격하면서 하나씩 수를 줄였다. 이레인의 화살에 꿰뚫린 녀석들은 미처 자폭할 틈도 없이 정령의 힘으로 정화되었다. 그저 썩은 핏물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어이쿠!”
파라스는 땅딸막한 몸으로 제법 날렵하게 움직였다. 그림자 괴물의 머리를 도끼로 찍어버리고 망치로 후려쳤다. 때로 적들의 창칼이 그를 노리고 휘둘러졌지만, 드워프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만든 방패를 넘지 못했다. 탁! 아이반은 창에 묻은 피를 털어내면서 하늘을 흘깃 바라보았다. 이쯤이면 슬슬 해가 뜰 시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어두웠다. 흐릿하고 우울한 낮마저 사라지고 밤이 계속되려는 모양이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던전의 환경은 언제나 종잡을 수가 없으니까.
‘큰 거 한 방 날려서 끝내야겠어.’
병사들이 지쳤다. 기사들은 사정이 좀 나았지만 멀쩡하진 않았다. 다치고 죽은 사람들이 제법 나왔다. 이쯤에서 한 번쯤 끊어갈 필요가 있었다. 아이반이 가만히 서서 창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그가 갑자기 그러고 있으니 사방에서 적들이 모여들었다. 금방이라도 그림자 괴물들의 이빨과 발톱에 몸이 찢길 것 같았지만, 얼굴이 창백한 자들의 창칼에 꿰뚫릴 것 같았지만 아이반은 신경 쓰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토오르으으!”
그가 천둥신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자 어두운 하늘을 가르고 번개가 내리쳤다. 치지직! 쾅! 굵은 번개가 아이반이 들어 올린 창을 타고 내려와 사방으로 퍼졌다. 그를 덮치려던 적들이 일순간 타버리고 바닥에 쓰러졌다.
“으음!”
자신의 몸에 남아있는 힘을 털어내듯 아이반이 창을 집어던졌다. 번개를 머금고 번개처럼 쏘아진 창이 적들을 한순간에 지워버렸다. 사방에 가득하던 어두운 마력이 움찔 뒤로 물러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내 놈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제기랄! 관짝에 누워있던 놈들이라 상도덕이 없어. 잠도 못 자게 만드는군.”
파라스가 바닥에 퉤 침을 뱉었다.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는데 그 꿈의 여운을 채 느끼기도 전에 도끼를 휘둘러 썩은 핏물을 뿌려대니 그 행복한 꿈마저 악몽처럼 찝찝했다.
“죽음은 영원한 잠이라더니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오. 죽은 놈들이 밤잠이 없어.”
아이반은 파라스에게 대충 대꾸해주면서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에게 향했다.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전투의 흔적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방금 그자들, 전부 모험가였소. 던전에 뛰어들었던 사람들.”
“반쯤 언데드가 되어 있던데.”
“정보를 수집한 후 나를 맞이하기로 했던 자들이 핏기없는 얼굴로 무기를 휘두르고 있더군. 모두 뱀파이어에게 당한 모양이지.”
뱀파이어는 자신이 피를 빤 사람을 권속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모험가들은 모두 그렇게 당해버린 듯했다.
“몇백 명이나 되는 모험가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당했다니, 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그리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부상자와 사망자도 나온 상태, 사기가 크게 떨어지는 것이 몸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병사들의 피해가 컸다. 초반에 적의 공격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장점은 반복된 훈련으로 만들어진 협공이었다. 자다가 갑자기 습격을 받아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치명적이었다. 부상자는 치료할 수 있었으나 사망자는 되살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곱이 사라졌다. 델피노가 성호를 그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줄일 수 있는 희생이었습니다. 안타깝군요.”
이레인, 델피노, 사나운 이빨, 아이반과 파라스까지. 일행은 누군가를 지키며 싸우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조금 더 효율적으로 움직였다면 희생자가 크게 줄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델피노의 말에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내 탓이오. 적을 얕본 탓, 아군을 지키지 못한 탓. 그러나 전투에서는 이 또한 당연한 일이지.”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는 죽은 병사들을 모아 손수 눈을 감겨주었다. 수많은 전투와 전쟁을 경험했던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죽은 병사들의 유품을 수습한 후 시신은 불태우기로 했다. 이곳에 내버려 두면 언데드가 될 테니까. 아이반이 그들의 시신을 아공간에 보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가 거절했다. 그런 차가운 공간에 병사들을 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쿤다라께서 들고 있는 횃불을 놓치지 않길 바라오.”
피의 성자 알베르홈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 철혈기사와 그를 따르는 녹슨 피 기사단, 그리고 병사들은 모두 쿤다라 신자였고, 불의 신을 믿는 자들답게 불이 없는 공간에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솔직히 아이반은 아공간이나 던전 안이나 뭐가 그리 다른가 싶었지만 이건 신앙의 문제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사나운 이빨이 그에게 말했다.
“녀석의 상태가 이상하다.”
녀석이라고 하면 낮에 붙잡은 모험가, 제이스를 말했다. 아이반이 일러둔 대로 계속해서 녀석을 감시하던 사나운 이빨이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알린 것이다. 아이반이 빠르게 달려갔다. 그러자 녀석이 끽끽거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이오?”
아이반이 묻자 제이스를 붙잡고 있던 기사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녀석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우웅- 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지혜의 눈으로 제이스를 꿰뚫어 보고 한쪽 눈썹을 밀어 올렸다.
‘사역마의 계약이 흔들리고 있어. 뱀파이어가 약해져서? 아니야, 오히려 강해진 것이 문제인 것 같은데.’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이야기를 들은 델피노가 와서 제이스의 상태를 보았다. 그는 제이스의 까뒤집어진 눈을 확인하고는 양손으로 녀석의 머리를 붙잡았다. 델피노의 양쪽 손목에 새겨진 성흔이 빛을 뿜는 것을 보니 빛의 신 아룬의 권능을 통해 제이스의 정신을 살펴보는 모양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그러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얼마나 많은 심력을 사용했는지 델피노의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이스의 정신이 이리저리 편집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뱀파이어의 힘이 강해지면서 그에 영향을 받아 균형이 깨진 모양이군요.”
정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다. 사역마의 계약으로 영혼을 붙잡고 있어서 손을 쓰기 어렵다고 했다.
“이게 무슨 뜻이지? 제법 공을 들였을 텐데 그냥 이렇게 버려버린다고?”
제이스를 통해 수작질을 하려고 했다면 습격 타이밍이 너무 빠른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뱀파이어는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녀석이 제이스를 보낸 목적이 빠르게 달성되었던 모양이죠.”
그 말에 아이반의 머릿속에 피의 검 브리카가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 제이스를 제압할 때 브리카를 사용했소. 그때 뱀파이어의 목적은 이미 달성된 거군. 그래, 녀석이 검을 노리고 있다고 말했어.”
브리카. 그 단어에 초점이 사라진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제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이반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검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제이스의 숨이 뚝 끊어졌다. 다행히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거나 폭발하지는 않았다.
“검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군. 이 검이 녀석에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기에?”
“글쎄요. 하지만 결코 녀석에게 검을 건네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자리를 정리한 후 무기를 들었다. 어차피 편안히 쉴 수도 없으니 빠르게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밤이 계속되었다. 하늘에 떠오른 보름달만이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끼이익- 성 내부로 들어가자 한때는 화려했을 공간이 드러났다. 그러나 지금은 흔들리는 촛불 몇 개만 남아있어 그저 음산하게만 느껴졌다. 델피노가 빛의 구슬을 띄워 사방을 밝혔지만, 분위기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끼이이익! 꺄아아악! 바람에 낡은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와 높고 얇은 비명이 함께 들렸다. 악령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위로 올라가는 것이 맞겠지?”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의 물음에 아이반이 고개를 저었다.
“지하로 가야 하오. 피의 검 브리카가 그쪽을 가리키고 있소.”
반쯤 무너진 바닥 너머로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위험해 보이는 곳이었으나, 그렇기에 가야만 했다.
“지하수로를 피해서 움직였는데 결국 가기는 가는군.”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가 지시하자 기사들이 앞서 내려갔다. 그들이 이리저리 살피다가 말했다.
“안이 생각보다 훨씬 깊고 넓습니다!”
뒤이어 나머지 일행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 말대로 안쪽은 생각보다 훨씬 깊었다. 이리저리 벽으로 막혀있어서 마치 미로 같았지만, 전체적인 공간은 무척이나 넓었다.
“모험가들이 헤매다가 결국 벽을 부수고 진행했다는 곳이 여기로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짙은 마력이 느껴졌다. 아마도 이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을 뱀파이어의 기운이겠지. 그어어어 미로 곳곳에서 모험가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좀비가 되어 벽을 두드리고 있거나, 유사 뱀파이어가 되어 일행에게 덤벼들었다. 확실히 몇 겹의 결계와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어서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벽을 부수고 움직인 모험가들의 동선을 따라서 움직여도 워낙 중구난방이라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우웅- 그때 피의 검 브리카가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공간을 찢고 그의 검을 가져가려고 손을 뻗었다.
“어림도 없지!”
아이반은 피의 검 브리카를 놓치지 않았다. 손에 꽉 힘을 주고 버티자 결국 아이반까지 공간 너머로 끌고 들어갔다. 깜짝 놀라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아이반이 아래쪽을 가리켰다.
“먼저 가서 기다리겠소.”
공간을 넘어간 아이반은 날카로운 감각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금방 공격이 시작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조용했다.
‘검을 가져가려다 나까지 딸려오는 바람에 다른 곳으로 틀었나?’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피의 검 브리카를 굳게 쥐었다. 계속 떨리고 있던 브리카가 조용해진 것을 보면 둘 중 하나였다.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멀어졌거나, 아니면 가까운 곳으로 다가왔거나. 몹시 어두운 곳이었다. 빛이 전혀 없어서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비릿한 피 냄새, 녹슨 철의 냄새만이 가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델피노에게 적외선 시야라도 받는 건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아이반이 낮게 주문을 외웠다. 오래된 노르드의 언어는 곧 마법이 되었다.
“빌레위그(Bileygr:번쩍이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