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11
아이반의 눈이 조금 시리더니 어둠이 물러났다. 희끄무레하게나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빛의 신 아룬의 권능, 적외선 시야의 축복을 나름대로 흉내 내어 봤지만 아무래도 완성도에서 차이가 좀 있었다. 그래도 당장은 쓸 만했다. 차가운 돌바닥, 좁고 구불구불한 복도, 답답한 공기. 아이반은 조심스럽게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면서 점점 의아해졌다. 도시 지하에 왜 이런 곳이 있는 걸까? 암살자의 발걸음으로 조용히 나아가던 아이반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검으로 벽을 툭 쳤다. 캉! 소리가 돌아오는 것이 좀 이상했다. 방향이 묘하게 틀어지고 미묘하게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기도 했다. 탁! 아이반이 검을 휘둘러서 무언가를 튕겨냈다. 그러고 나서야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방향도 전혀 엉뚱한 방향이었다.
“귀찮은 결계로군.”
청각과 시각을 속이는 결계였다. 그러나 아이반은 잠깐 미간을 찌푸릴 뿐 신경 쓰지 않았다. 기감은 속일 수가 없었다.
서걱! 쿵! 모험가들이 선택했던 것처럼 아이반 역시 벽을 부수며 이동하기로 했다. 방향을 정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조금 더 불길한 곳으로 나아가면 충분했다.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하면 피의 검 브리카가 신호를 주어서 그리 어렵지 않았다.
쉬이익! 누군가 어둠 속에서 그를 노리고 덤벼들었다. 푸른 안광을 흘리고 있는 죽음의 기사. 캉! 죽음의 기사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벽이 갈라지고 돌가루가 떨어졌다.
나름 조심스럽게 벽을 잘라내고 움직이고 있던 아이반과 달리 거침이 없어서 혹시 이곳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휙! 생전 실력이 괜찮았는지 검술이 제법 날카로웠다.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며 아이반을 구석으로 몰았다. 아이반은 그의 검을 상대하며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이질적인 기운이 이곳으로 빠르게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벽을 부수며 이동하는 바람에 미처 상대하지 않았던 괴물들이 이곳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미로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탕! 아이반은 순식간에 검을 튕겨내고 가슴을 찔렀다. 녹슨 갑옷이 그대로 꿰뚫렸다.
죽음의 기사가 내뿜던 푸른 안광이 이리저리 흔들리다 흐려졌다. 피우웅! 반쯤 뱀파이어로 변한 모험가들이 나타나 화살을 쏘았다.
지난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아이반은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방패를 꺼내 땅에 박아 넣었다.
그것으로 한쪽을 막고 뒤에서 달려드는 짐승의 목을 베었다. 스걱! 반쯤 어둠에 동화되어있던 검은 표범이 미처 발톱을 휘두르기도 전에 목이 잘렸다.
그 뒤에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괴물에게 창을 집어 던진 후 땅에 박아 넣었던 방패를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앞으로 밀고 나갔다. 적이 칼을 휘두르든, 화살을 쏘든, 앞발을 내밀든 상관없이. 아이반의 허벅지 근육이 크게 부풀었다.
빠르게 쏘아져 나간 마력으로 튕기듯이 앞으로 움직였다. 치지직! 쾅! 천둥걸음에 이은 실드차지. 좁은 통로에 몰려있던 녀석들은 그대로 아이반의 방패에 얻어맞고 뒤로 밀려났다.
강철 모루에서 얻은 명품 방패를 뚫지 못하고 오히려 쓰러졌다. 아이반은 그렇게 녀석들을 밀어낸 후 놈들을 가둬두고 역으로 불을 뿜었다.
화르륵! 로키의 불꽃이 녀석들의 몸에 옮겨붙었다. 녀석들의 몸을 움직이던 흑마력과 저주마저도 불태우고 연기조차 내뱉지 않았다.
쿵! 아이반은 양쪽 벽을 무너뜨려 녀석들이 달려들지 못 하도록 길을 막았다. 그리고 천천히 뒤로 돌았다. 어느새 미로의 끝에 도착했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벗어나 넓은 공동이 보였다. 지하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공간이었다.
그저 돌바닥에 불과했던 미로와 달리 이곳은 깔끔하게 가공된 타일이 깔려있었다. 천장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기둥마다 화려한 금박 무늬가 있었다.
아주 오래되고 낡았지만, 원형은 웬만한 성보다 더 화려한 듯했다. 탁, 탁! 이제 아이반은 굳이 발걸음 소리를 죽이지 않았다.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듯 당당한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그의 주변에 불꽃이 피어올라 사방을 밝혔다.
끼이익! 아이반이 커다란 문을 힘줘서 밀었다. 오랜 세월 방치되어있던 문은 삐걱거리며 길을 열었다.
수백 개, 혹은 수천 개. 언뜻 셀 수조차 없는 촛불이 안쪽을 밝혔는데, 바람 한 점 없음에도 촛불이 이리저리 일렁여서 음산하기만 했다. 비릿한 피 냄새, 녹슨 철의 냄새. 역시 오래되고 낡아서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왕좌에서 차갑고 창백한 자가 피를 마시고 있었다.
“식사 시간에 찾아왔군.”
아이반이 그리 입을 열자 그가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를 빨아먹고는 비쩍 마른 시체를 옆으로 집어 던졌다.
“주인의 식사를 방해하다니 참으로 무례한 객이로구나.”
검은 머리칼을 뒤로 묶은 남자는 아주 우아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까지 피를 빨고 있던 것을 보지 않았다면, 그의 입가에 아직도 핏물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진심으로 감탄할 만큼 귀족적인 자세였다.
“초대방식이 거칠었으니 그럴 수밖에.”
아이반은 그렇게 입을 열면서 녀석을 자세히 살폈다. 녀석의 근육, 체형, 자세와 기운을 읽고 어떤 식으로 상대하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공간을 왜곡하거나 감각을 흐리는 환영결계를 보면 마법적인 능력이 상당한 것 같았다. 그러면 육체적으로는 약할까? 아니면 신체능력도 괴물 같을까? 그러다가 녀석의 옆에 쌓여있는 시체들을 흘깃 바라보았다. 평범한 모험가의 장비가 아니었다.
아마도 기사, 그리고 정예 병사. 익숙한 얼굴이 아닌 것을 보니 아이반과 같이 출발했던 자들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서부 연합 왕국의 병력이겠지. 철혈기사가 움직인 것을 확인하고 뒤늦게 부랴부랴 들어왔다가 벌써 당한 걸까.
‘기사들이 당했다고? 외상이 크진 않군. 장비의 손상도 적고. 그러면 마법이군.’
적당히 상대를 파악한 아이반이 피의 검 브리카를 꺼내 들자 녀석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브리카! 나의 검! 그것을 나에게 바치려 하느냐!”
“이게 왜 너의 검이지? 피의 성자 알베르홈의 검이 아닌가?”
“알베르홈! 그 하찮고 증오스러운 녀석의 이름을 말하다니!”
뱀파이어는 붉어진 눈동자로 분노를 토해냈다. 조금 전까지 피를 빨아먹으면서도 잃지 않던 우아한 자세마저 무너지고 괴물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건 나의 검이다! 그 도둑놈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뱀파이어가 소리치자 바닥을 적시고 있던 핏물이 크게 솟아나 무기의 모습이 되었다. 붉은 창과 칼이 그대로 아이반에게 쏘아졌다.
“나의 검을 내놓아라!”
이미 전투준비를 하고 있던 아이반은 어렵지 않게 피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검을 휘둘러 녀석이 쏘아 보낸 무기들을 흘려내고, 한쪽 손으로 도끼를 집어 던졌다.
휘리릭! 탁! 화살만큼이나 빠르게 날아간 도끼가 뱀파이어의 손에 잡혔다. 그리고 순식간에 부식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나무가 썩어버리고 쇠가 녹슬었다.
마치 시간이 크게 흐른 것만 같았다.
“그러면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보자!”
쉬이익! 아이반이 창을 꺼내서 집어던졌다. 도끼 이상으로 빠르게 날아가는 창에는 토르의 번개가 잔뜩 담겨있었다.
쾅! 녀석의 오른쪽 팔이 끊어졌다. 미처 막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꿰뚫린 것이다.
창에 담겨있던 토르의 번개가 몸을 지져서 탄내가 확 풍겼다. 그러나 뱀파이어의 상처 부위가 검붉은 핏물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팔을 회복했다. 팔 부분의 옷이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스스로 목숨을 바쳐라!”
녀석의 붉은 눈이 불길하게 번뜩이고 흑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사람을 현혹하고 정신을 조종하는 마안이 힘을 발휘했다.
웬만큼 실력을 쌓은 기사들조차 멈칫할 수밖에 없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아이반에게 그런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스걱! 아이반은 조금의 멈칫함도 없이 검을 휘둘러 뱀파이어의 허리를 잘랐다.
“신격에게도 칼을 들이미는 내가 한낱 흡혈귀 나부랭이의 마안에 당할 것 같으냐?”
잘려 나간 뱀파이어의 몸이 핏물로 변해 아이반을 덮쳤다. 뱀파이어의 피는 모두가 희생자의 것. 지독한 원념과 저주가 아이반을 썩게 만들려 했지만, 그는 온몸에서 마력을 내뿜는 것으로 그것을 털어버렸다.
“으으으! 나의 검이···!”
또다시 원래의 모습을 회복한 뱀파이어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이반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몸이 동강 나고도 멀쩡한 것을 보니 회복력 하나는 대단한 놈이었다. 그때 아이반의 눈에 녀석의 가슴이 보였다.
옷이 찢어져서 드러난 녀석의 가슴팍에 아주 오래된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두 동강이 나는 것조차 멀쩡하게 회복하는 녀석이 오래된 상처라니.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살펴보자 은은하게 신성력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델피노의 팔뚝에 새겨진 성흔과 몹시 유사한 형태였다. ‘···알베르홈에게 당한 상처인가.
‘ 어쩌면 녀석의 회복력을 저지할 방법일지도 모른다. 던전은 때로 강점은 더욱 강하게, 약점은 더욱 약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부글부글! 갑자기 사방에서 용암이 들끓기 시작했다.
피부에 뜨거운 공기가 달라붙고 기도가 타들어 가는 듯 호흡이 답답했다. 그러나 아이반은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 치이익! 용암이 그의 발을 녹이고 뼈를 태우는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반은 망설이지 않고 한 발 더 내뻗었다.
“나에게 너의 환상은 통하지 않는다.”
그 순간 바닥에서 솟아나던 용암이 사라졌다. 아이반의 몸을 태우던 고통마저 없어졌다.
뜨거운 용암에 파묻혀 녹아내렸을 그의 발은 여전히 멀쩡했다. 아이반 역시 환상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그저 환상뿐이라면 그를 속이기 쉽지 않았다. 푸슉! 아이반이 녀석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뱀파이어의 오래된 흉터를 새로운 상처로 덮었다.
“내 검! 내 거어엄!”
녀석은 고통에 울부짖으면서도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검에 손을 뻗었다. 피의 검 브리카에 대한 집착이 보통이 아니었다. 치지직!
“으윽!”
피의 검 브리카가 녀석의 손을 거부했다. 검에 가득 들어찬 아스가르드 신들의 권능이 감히 흡혈귀가 손대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아이반이 녀석의 가슴에 박힌 검을 비틀었다. 그리고 물었다.
“이 검이 너의 것이라면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겠지. 난쟁이를 직접 보았나?”
녀석은 아이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토르의 번개에 타들어 가면서도 브리카를 쥐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브리카를 붙잡았을 때, 상황에 맞지 않게 녀석이 웃었다.
“드디어 내 검이 돌아왔다···!”
스스슥! 녀석의 몸이 그대로 핏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가슴에 새겨져 있던 성흔이 점차 사라졌다.
아이반이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나 마력을 흩뿌렸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 검붉은 피의 방어막에 막혀 사라졌다. 두두두두 땅이 흔들린다.
녀석이 핏물로 녹아 사라진 땅을 뚫고 쇠사슬로 묶인 관이 솟아올랐다. –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구나.
관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끊어진다. 그렇게 봉인이 풀릴 때마다 사방을 짓누르는 막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마침내 오랜 세월 닫혀있던 관이 열리고, 관의 주인이 느릿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귀족적인 몸짓과 넘쳐흐르는 여유. 조금 전까지 아이반이 상대하고 있던 녀석과 완전히 같은 외형을 하고 있었으나 격이 달랐다. 2페이즈라,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고맙구나, 무례한 객이여. 마침내 이렇게 나의 검을 가져오지 않았더냐?”
낮은 목소리에 담긴 마력이 온 사방을 뒤흔들었다. 의식하지 않고 있음에도 상대를 매혹하는 힘이 가득했다. 아이반은 조금 전보다 경계심을 높인 채 검을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얻어맞던 녀석이 관 뚜껑을 열고 나온다고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군.”
그는 이죽거리면서도 섣불리 들어가지 못했다. 아까와는 힘의 밀도가 달랐다. 뚫고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으리란 느낌이 왔다.
“그것은 나의 일부일 뿐이다. 이제 알베르홈, 그 하찮고 역겨운 녀석의 봉인이 풀렸으니 그때와 같지는 않으리라.”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손을 휘두르자 갑자기 무언가 후려치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아이반은 훌쩍 뒤로 튕겨 나가다가 바닥에 창을 박아 넣어서 멈춰 섰다.
“그대가 나의 가슴에 검을 꽂았으나 그것으로 오히려 내가 해방되었으니 몹시도 기쁜 날이구나. 어디 춤이나 추어보아라.”
강력한 충격파가 연속해서 덮쳤다. 아이반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피하는 것을 보며 뱀파이어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훌륭한 광대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