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13
철혈기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깨달은 사나운 이빨이 코웃음을 쳤다.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깟 기운에 쓰러질 남자가 아니다. 흡혈귀의 조잡한 힘으로는 그를 어찌할 수가 없다.”
그 말에 답하듯 아이반의 몸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치지직! 화르륵! 휘이잉! 저열한 저주는 천둥소리에 움츠러들었다.
음습한 살의는 폭풍에 밀려나고 혼탁한 분노는 불꽃을 이기지 못했다. 흡혈공 아키우스가 부리는 피의 병사 따위는 그저 인형일 뿐이었다.
원혼과 저주로 작동하는 장난감일 뿐이다. 진짜에 비하면 격이 너무나 떨어졌다.
우웅- 아이반이 빨아들인 힘이 천상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언젠가 그가 도달할 발할라가 보였다.
쿵! 쿵! 쿵! 마음껏 고기를 뜯고, 벌꿀술을 마시며, 끊임없이 싸우던 신의 전사들. 에인헤랴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무기를 들어 올리고 가슴을 두드리며 아이반에게 경의를 표했다.
언젠가 이곳에 도달할 전사여, 위대한 아버지 오딘의 아들이여. 우리는 기꺼이 그대와 함께 싸우겠노라, 그대를 위해 검을 들겠노라. 에인헤랴르가 검을 뽑았다.
창을 들어 올리고 도끼를 쥐었다. 투구를 뒤집어쓰고 방패를 단단히 고쳐 잡았다.
그리하여 아이반의 부름에 응답하여 나서려는 순간, 오딘이 그것을 막았다. – 아직은 아니다.
그대들의 검이 쓰일 때가 아니다. 전투의 흥분이 식어버린 에인헤랴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김이 새버린 얼굴로 고기를 뜯고 벌꿀술을 들이켰다. 그렇다면 언젠가 우리의 창칼이 쓰일 그때를 위해, 그대의 부름에 응할 그 순간을 기다리겠노라. 뿌우우우- 어딘가 아득히 머나먼 곳에서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발할라의 풍경이 흐려졌다.
아이반은 어느새 자신이 현실로 돌아와 있음을 깨달았다. 귓가에 저주를 속삭이던 원혼들이 더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아이반이 눈을 돌리는 것만으로 한껏 움츠러들고 공포에 덜덜 떨었다. 아이반은 이제 원혼이 방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 웅덩이가 납작 몸을 숙이고 그에게 복종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스윽 아이반이 손을 들어 올리자 피 웅덩이가 요동쳤다.
그곳에 가득한 기운이 아이반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아니, 인간이 대체 어떻게!”
흡혈공 아키우스가 휙 고개를 돌렸다. 피 웅덩이가 자신보다 아이반을 우선하고 있음을 깨닫고 경악한 표정이었다. 서걱! 아이반이 피의 검 브리카를 가볍게 휘둘렀다. 흡혈공 아키우스의 팔이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으, 윽!”
몸이 수십 개로 찢어질 때도 아무렇지 않던 녀석이 몸을 비틀거렸다. 잘려 나간 팔이 회복되지 않고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피 웅덩이가 더는 그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한한 생명력이 사라지자 녀석의 얼굴에 공포가 새겨졌다.
아득한 시간 죽음을 회피해온 녀석에게 죽음이란 단어가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흡혈귀라는 본체도 잃어버리고 피 웅덩이의 일부로 살아가던 녀석이 그곳에서 쫓겨나자 자신의 목을 노리는 검에 대항할 생각마저 잃어버리고 덜덜 떨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반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인간을 가축으로 삼아 군림하던 괴물의 최후로는 참으로 한심하군.”
넘치는 여유와 오만한 미소, 귀족적인 태도는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그저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낱 괴물에 불과했다. 이렇게 하찮은 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나, 피 웅덩이에 담긴 힘과 원혼, 저주가 그저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탁! 흡혈공 아키우스의 목이 잘렸다. 녀석의 머리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바닥을 구르다가 이내 한 줌 핏물이 되어 피 웅덩이에 녹아들었다.
아이반은 녀석의 영혼이 피 웅덩이에 새겨졌음을 깨달았다. 수많은 원혼의 주인을 자처하던 녀석은 결국 원혼의 일부가 되었다.
아이반은 피 웅덩이에 담긴 녀석의 영혼을 쥐어짜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 아아악! 영혼이 비틀리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던 녀석의 목소리가 점차 흐려졌다.
지하 공동을 가득 적시던 피 웅덩이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그 모든 힘을 흡수한 피의 검 브리카가 요사스럽게 빛났다.
‘이래서야 정말 마검이나 다름없군.’
하긴, 아스가르드 신들의 힘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그건 그랬지. 아이반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돌리자 일행들이 모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토록 끈질기게 버티던 흡혈공 아키우스가 단번에 쓰러진 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아이반이 피 웅덩이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도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사나운 이빨만이 그럴 줄 알았다며 크게 웃었다.
“생각보다 늦었다! 그 정도는 단숨에 제압했어야지!”
“몸에 나쁜 것을 한껏 집어먹은 느낌이오. 내 취향은 아니었소.”
아이반이 너스레를 떨면서 그리 대답하자 잔뜩 굳어있던 분위기가 풀렸다. 철혈기사 데니스 로이어는 혹시 아이반의 정신이 무너져 내려 피 웅덩이의 마력에 홀린 것은 아닐까, 흡혈공 아키우스에게 몸을 빼앗긴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듯했지만 이내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성흔에서 신성력을 한껏 뿜어내고 있는 델피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놈이었습니다.”
“별로 강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질긴 녀석이었지. 봉인이 길지 않았다면 훨씬 위험한 놈이었을 거요.”
“힘을 모두 흡수한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델피노는 요사스러운 마력을 흘리고 있는 피의 검 브리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피 웅덩이가 가지고 있는 기운이 너무나 지저분했다. 끊임없이 그를 유혹하고 괴롭히리라.
“거친 놈이니 서서히 조련해야지. 물론 그동안 쓸 칼집은 있어야겠지만.”
아무리 아이반이라고 해도 이걸 몸속에 보관하는 것은 좀 찝찝했다. 피 웅덩이의 유혹이나 저주가 무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당히 기운이 갈무리될 때까지는 그냥 들고 다닐 수밖에 없을 듯싶었다.
‘그것보다 아까 전 보였던 풍경은 뭐였지?’
발할라와 에인헤랴르. 오딘의 궁전과 그를 모시는 전사들. 갑자기 왜 그들의 모습이 보였던 걸까? 그들이 했던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아이반은 무심코 오른쪽 눈을 쓰다듬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딘의 시선이 느껴졌다.
흡혈공 아키우스를 물리친 이후 일행은 재빨리 주변을 수색했다. 넓은 공동 구석구석을 뒤지고 혹시 챙겨야 할 물건은 없는지 살폈다. 던전의 핵이었던 아키우스와 피 웅덩이가 사라졌으니 곧 공간이 무너져 내리고 원래의 현실로 돌아올 것이었다. 아주 촉박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넓은 곳을 다 뒤지기에는 시간이 많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방 몇 개를 돌아다니니 생각보다 소득이 짭짤했다. 시커먼 지하공동 한쪽 구석에 귀금속이 잔뜩 쌓여있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지. 녀석이 그리 근검절약하는 성품은 아닌 것 같았어.”
아이반이 그리 중얼거리며 금덩이를 챙기고 있으니 이레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피의 성자 알베르홈이 녀석을 봉인했었다면서? 왜 이렇게 많이 남았지? 그가 들고 가지 않았나?”
물론 아키우스의 말을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녀석의 말이 진실이라면 알베르홈은 원래 녀석의 밑에서 도시를 관리하던 자였다. 아키우스가 쌓은 재물에 대해서도 당연히 잘 알 텐데 왜 이렇게 방치되어 있었던 걸까?
“글쎄, 피 묻은 재물에는 손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뱀파이어 밑에서 죄업을 쌓던 자가 어떻게 불의 신 쿤다라의 선택을 받아 성자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역시 무척이나 길고 복잡한 사정이 있을 거다. 그가 흡혈공 아키우스를 봉인하고 다른 전리품을 챙기지 않은 것도 그런 사정의 일부일지도 모르지. 아이반은 솔직히 그것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귀찮은 마음이 더 컸다. 괜히 그것에 대해 파헤치다가 흡혈공 아키우스 같은 녀석이 더 튀어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그래도 대단찮은 것은 없어. 그런 것들은 알베르홈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나 보지. 남은 것들은 그냥 비싸기만 할 뿐이야. 흠, 난쟁이의 흔적이 더 있을까 싶었더니. 책은 많던데, 그쪽은 좀 다르려나?”
파라스가 묘하게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과 달리 철혈기사가 이끄는 기사들은 크게 흥분한 표정이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모두 해치운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세상을 크게 어지럽힐만한 흡혈귀를 처리하고 전리품을 탐색하는 중이 아닌가. 명예와 재물을 동시에 취했으니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지금도 충분히 대박이었다. 아이반의 일행이 가치 없다고 평가한 잡동사니마저 제법 비싸게 거래가 되었으니까. 몇 상자나 되는 물건들을 챙긴 철혈기사가 흡족한 듯이 웃었다.
“던전이 무너지고 나면 이곳에 들어가는 것이 좀 힘들기는 하겠지만, 충분히 발굴할 가치가 있소. 이렇게나 커다란 지하공동이라니, 전략적인 가치도 상당하지.”
어디까지나 첫 번째 목표는 난쟁이의 흔적을 찾는 것이었던 아이반의 일행과 철혈기사의 입장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장기적으로 유적지를 발굴하고 가치를 뽑아낼 수 있었으니 지금 보이는 것보다 수확이 더 크다고 여기겠지.
“위쪽에 있는 성도 수색하면 적지 않은 재물이 나올 거요. 던전이 돈이 된다더니 과연 그렇군.”
지하를 수색하다 보니 생존자도 몇 명쯤 발견할 수가 있었다. 나중에 피를 빨기 위해 감옥 같은 곳에 가둬둔 모양인데, 다행히 목숨을 잃기 전에 그들을 구출할 수가 있었다.
“이걸 정말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
기사 하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리 중얼거렸다. 뱀파이어가 포로의 취급을 신경 쓸 리가 없었고, 그들의 상태는 무척이나 엉망이었다.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해 기력이 없는 것은 둘째치고 고통과 공포에 미쳐서 정신을 놓아버린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자들조차 뱀파이어가 그들의 정신을 아무렇게나 주물러 놓아서 기억이나 사고방식이 멀쩡하지 않았다.
“괜히 도망치겠다고 날뛰면 귀찮으니 그냥 정신을 파괴해버렸어. 지독한 꼴이야.”
“쉽게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가능하더라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델피노는 무척이나 착잡한 표정으로 그들을 챙겼다. 사실 그에게는 무섭도록 익숙한 일이었다. 악마를 마주한 이들의 최후는 대개 이런 법이니까. 이번에는 뱀파이어였지만, 사실 그리 다를 것도 없었다. 그들이 챙길 것을 다 챙기고 던전을 빠져나가자마자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 핵을 잃어버린 던전이 사라지고 세상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 거친 싸움의 흔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온갖 잡초와 흙더미로 뒤덮인 옛 도시의 풍경이 나타났다. 수백 년 전의 지옥 같던 모습은 어느새 세월에 씻겨나가고 아주 오래된 흔적만 남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던전에서 빠져나오면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대체로 아주 지독하고 더러운 악몽이었다. 수많은 죽음을 삼키고 사라진 던전을 바라보다가 아이반이 고개를 돌렸다.
“돌아갑시다. 피를 많이 뒤집어썼더니 씻고 싶군.”
사나운 이빨이 격하게 동의했다.
“뜨거운 물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다그닥, 다그닥! 규칙적인 말발굽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반이 책을 펼쳤다. 흡혈공 아키우스의 지하공동에서 많은 전리품을 얻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이 원했던 것은 정보였다. 녀석이 어떻게 피의 검 브리카를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
“어떻습니까? 좀 소득은 있습니까?”
마부석으로 넘어온 델피노가 묻자 아이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딱히. 아키우스가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자기 과시적인 문장을 즐겨 사용한다는 것 빼고는 건질만 한 것이 없소.”
문맹률이 높은 곳이었다. 수백 년 전, 전쟁이 활발하던 때는 더욱 그러했고. 한때는 문자를 알고 있다는 것, 그것으로 기록을 남긴다는 행위 자체가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런 옛 전통에 익숙한 아키우스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그것이 아이반에게는 반가우면서도 괴로운 일이었다. 크게 대접하겠다는 철혈기사를 뿌리치고 서둘러 전리품 분배를 마친 일행이 길을 나선 지 벌써 며칠째, 일행들은 던전에서 얻은 책을 뒤적이느라 눈알이 빠질 것만 같았다.
“분명 그 이야기도 어디엔가 쓰여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기록을 뒤진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재 사용하는 공용어가 아니라 서부 지역의 토착 언어, 그것도 최소 수백 년에서 천 년은 흐른 고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떠듬거리는 식이나마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언어학 스킬이 있는 아이반과 직업 특성상 고문 해석에 익숙한 델피노, 본인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레인밖에 없었다. 사나운 이빨과 파라스는 그저 눈만 끔뻑이며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크흠! 다른 언어였으면 손을 거들었을 텐데, 그건 너무 오래되었어. 내가 해석할 수준이 아니라네.”
갑자기 아이반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괜히 찔린 파라스가 그렇게 변명했다.
“누가 뭐라 그랬소? 한 문장 찾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뭐라고? 대체 무엇을 찾았는가?”
“아키우스는 자신에게 검을 만들어준 자가 난쟁이라는 것도 몰랐던 모양인데. 그저 신비로운 대장장이라고만 적어놓았소. 이렇게 중요한 일인데 묘사가 너무 흐릿해. 과시적인 문장을 즐겨 사용하던 녀석이 썼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짧고 간단하군.”
“그리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나? 아니면 감춰야만 하는 이유가 있거나.”
“글쎄, 그런가? 그나마 남아있는 기록도 서로 말이 달라서 잘 모르겠소.”
어떤 기록에서는 아키우스가 멍청한 모험가의 검을 빼앗았다고 적혀있고, 또 다른 기록에서는 그가 직접 자신의 피로 벼렸다고 했다. 그러다가 또 이름 모를 대장장이에게 의뢰했다거나, 그 시대에 가장 유명한 장인의 실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예전부터 전해지던 보물이라고도 했다. 심지어 흡혈공 아키우스 본인이 작성한 기록에서조차 서로 말이 달랐으니 그저 의문스럽기만 했다.
“난쟁이는 정말 실존하는 거요?”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으나 파라스는 오히려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난쟁이가 남긴 흔적의 특징일세. 기록이 중구난방이고 통일된 내용이 없지. 같은 사건이라도 다들 다르게 기록하고, 자신의 기억조차 순간순간 바뀌기 마련이야.”
그는 그것이 난쟁이가 손을 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