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16
델피노가 마치 감동이라도 받은 듯 중얼거렸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듯한 깨달음이라는 표현은 무척이나 많이 들었습니다만, 그게 얼마나 갑갑하고 답답한 상황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것인지,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습니다.”
지금 일행이야 물이 부족할 일은 없겠지만, 보통은 넉넉한 편이 더 드물 것이다. 그런 사막의 여행객들에게 오아시스는 정말 천금 같은 가치가 있겠지. 그렇게 델피노가 갑자기 종교적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음미하는 동안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오아시스를 바라보았다.
“오아시스라, 엿 같은 티셔츠와 포스터가 사고 싶어지는군.”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니오. 다행히 신기루는 아닌 것 같은데, 여기가 휴식지요?”
“가능하면 그랬으면 좋겠군요. 여기가 아니면 이제 한동안 쉴 곳이 없습니다. 하룻밤은 머물다 갈 겁니다.”
길잡이 아딜은 그리 말하면서도 섣불리 오아시스에 다가가지 않았다. 멀리서 그쪽을 요리조리 살피며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오아시스는 생명의 땅이지만, 그것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는 듯한 갈증과 더위에서 벗어나는 대신 다른 위험이 기다리고 있죠.”
사막은 보통 죽음이 가득한 곳이라 생각하지만, 이런 곳에서도 살아가는 생명이 있었다. 작게는 손가락 크기의 도마뱀이나 전갈, 크게는 샌드웜 같은 커다란 덩치의 괴물들까지. 물이 필요한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라 오아시스를 발견했다고 아무 생각 없이 바로 달려가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이곳은 비교적 초입에 있어서 수많은 카라반이 오가며 정리를 한 곳입니다. 보통은 위험한 녀석들이 없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는 알 수가 없죠.”
초입에서는 볼 수가 없다던 샌드웜까지 출몰했다. 평소 괜찮았다고 지금도 그러리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꼼꼼히 살펴보니 검붉은 바위인 줄 알았던 것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바위 전갈입니다. 바위처럼 우둘투둘하고 단단한 껍질을 가지고 있어서 무기가 쉽게 박히지 않아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들이죠.”
“다른 특징은?”
“강하지는 않아도 녀석의 꼬리에는 마비독이 있습니다. 녀석의 집게발 역시 바위를 부술 정도로 강력하죠.”
거기까지 말한 아딜이 아이반을 바라보다 덧붙였다.
“물론 당신이라면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선 것은 아이반이 아니라 이레인이었다. 가까이 다가갈 것도 없이 그녀가 화살을 쏘아 보냈기 때문이다.
피우웅- 바위 전갈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머리에 화살이 박혔다. 아무리 녀석들의 껍질이 바위처럼 단단하다고는 해도 실제 바위조차 수월하게 꿰뚫는 이레인의 화살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가 잘려도 잠깐은 날뛸 수 있는 터프한 녀석들이었으나, 이레인의 화살에 담긴 정령의 힘이 내장을 갈아버렸기에 꿈틀거리지도 못했다.
“화살로 잡을 수 있는 녀석들이 아닌데······.”
아딜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이레인을 바라보았다. 범상치 않은 자들이라고는 생각했으나, 겪으면 겪을수록 신기했다.
이런 자들이 지금 같은 시기에 사막을 건너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문득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과도한 호기심을 생명을 위태롭게 했다.
그는 그저 어서 빨리 집에 도착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오아시스에 도착한 그들은 텐트를 펼치고 야영 준비를 했다.
한동안 모래만 밟다가 풀을 밟는 느낌이 참으로 각별했다. 바닥으로 푹푹 꺼지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아이반과 이레인이 텐트를 치고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아딜과 파라스가 바위 전갈을 갈무리했다. 녀석들의 껍질이 아주 고급 재료는 아니더라도 은근히 유용하게 쓰인다고 했다.
사나운 이빨은 오랜만에 물웅덩이를 보니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몸을 담그고 싶은 모양이었다. 온몸에 까슬까슬한 모래를 씻어내고 싶겠지. 그러나 오아시스에 함부로 몸을 담그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오아시스라고 마냥 깨끗하지는 않았다. 흐르지 않는 물은 언제나 위험했다.
“오아시스의 물을 사용하려면 정화를 거치고 끓여야 합니다. 그래야 마시거나 몸을 씻을 수 있죠.”
갈무리한 재료를 세척하던 아딜이 그리 말하자 사나운 이빨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저 찝찝할 뿐이다.”
푸석푸석한 모래 먼지에 목이 칼칼하다는 이유로 저녁 메뉴는 뜨끈한 국물 요리였다. 혹여 모래가 들어갈까 간이 결계까지 사용해 바람을 막고서 만든 아주 사치스러운 식사였다. 뜨거운 곳에서 뜨끈한 국물이라니 괜찮을까 싶기도 했지만, 이열치열이라고, 일단 만들고 보니 썩 만족스러운 저녁이었다.
사방에 가리는 것이 없어서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지는 편이었으나, 그렇다 해도 밤은 길었다. 쉼 없이 바람이 몰아쳐서 텐트를 뒤흔드는 곳이라 더욱 그러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홀로 불침번을 서고 있던 아이반은 슬그머니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검을 무릎 위에 올렸다. 얼마 전, 피 웅덩이를 통째로 흡수한 피의 검 브리카였다.
그때부터 브리카에 요사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워낙 막대한 힘을 삼켰기에 소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그걸 그대로 몸속에 집어넣기는 좀 찝찝해서 우선 파라스가 검집을 만들어 줬는데, 살기가 너무 짙어서 함부로 뽑아 들기가 그랬다. 피의 검 브리카는 영성이 있는 검이기에 혹여 피 웅덩이의 요사스러운 기운에 물들어 요검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물론, 이미 마신이나 다름없는 신들의 축복을 잔뜩 받은 상태이기에 뒤늦은 걱정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브리카를 바라보며 기운의 흐름을 가늠해보던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 아직 난쟁이에 대한 단서가 명확하지 않았다.
읽어야 할 자료가 많았다. 마력으로 빛의 구슬을 만들어내 책을 읽던 아이반은 문득 하늘이 흐려졌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쏟아질 듯 반짝이던 별들이 모두 사라지고 훤한 달빛마저 어둑해진 것이다.
사전에 아딜에게 경고를 들은 아이반이 대뜸 소리쳤다.
“모래폭풍이 온다!”
그 소리에 잠에서 깬 일행이 눈을 비비면서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아이반의 지시에 따라 바짝 엎드리자 거친 바람이 그들을 후려쳤다. 쉬이익! 바람이 빨라지다 못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아시스의 나무에 부딪히거나, 그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내뱉는 높은 톤의 소음이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시야가 가려졌다.
흙먼지가 세상을 시꺼멓게 칠했다. 천으로 얼굴을 완전히 감싸고 숨을 멈추고 있었음에도 모래 알갱이가 코와 입으로 들어왔다.
귓바퀴를 타고 양쪽 귀에도 모래가 쌓였다. 그렇게 바닥에 엎드려서 모래폭풍을 견디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사나운 이빨이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아이반이 기감을 조금 더 예민하게 가다듬어 그를 살폈다.
사나운 이빨이 마력을 내뿜어 거친 바람을 밀어내고 모래폭풍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낮에 경험했던 것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이 흐르고, 바람이 잠잠해졌다.
마침내 모래폭풍이 지나간 것이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찾아서 들어간 모래를 털어내면서 아이반이 사나운 이빨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오?”
“폭풍 속에 누군가 있었다.”
“뭐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있기는 했다. 틀림없다.”
사나운 이빨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반의 감각에도 걸리지 않는 것을 그가 혼자 알아차렸다는 것이 이상했다. 아무리 모래폭풍에 마력이 요동쳐 기감이 흐려졌다고는 해도 그럴 수가 있나? 그러나 사나운 이빨이 말없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자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주제였다.
“모래폭풍 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단 말입니까?”
아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뭐라고 입을 열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왜? 뭔가 알고 있소?”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런 소문이 있기는 하더군요. 황폐한 신의 분노를 이끄는 신의 사자가 있다고.”
황폐한 신의 분노, 지독한 모래폭풍이 부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 움직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모래폭풍을 마주했다면 물과 식량도 다 날아가 버리고 생명이 간당간당한 경우가 많았고. 사막에서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방황하다 겨우 목숨을 건진 자들의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지독한 탈수를 겪으면 헛것이 보이는 것이 아주 평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죽을 위기를 벗어나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은 지나가는 벌레조차 신의 사자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 소문이 있어도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모래폭풍이 몰아칠 때는 시야가 가리고 마력이 요동쳐서 착각하기 쉽습니다. 아니면 거친 바람에 빨려 들어간 식물 같은 것일 테죠.”
아이반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런 게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나운 이빨이 그런 평범한 것을 보고 착각할 자가 아니었다. 다만 용의 심장과 관련된 이야기는 무척이나 비밀스러운 일이라 말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쯧, 그러면 모래폭풍이 물러났으니 다시 잠이나 잡시다.”
그리고 텐트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텐트는 모래폭풍에 이리저리 찢겨서 완전히 걸레 조각이 되어있었다. 두어 개 정도는 바람에 날아갔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무척이나 난감한 일이었겠지만 아이반은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텐트와 침낭을 꺼냈다.
“아직 밤이 남았소.”
물론 그의 불침번은 진작 끝났다. 흙먼지가 가득한 하늘은 별이 보이지 않았다.
간밤에 스치고 지나간 폭풍에 모래언덕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고 지형을 바꾸어서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딜은 그런 것조차 익숙한 일이라는 듯 수월하게 길을 안내했다. 사막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의 경험과 지혜 덕분이었다.
그는 어제만큼이나 빠르게 이동하기를 원했다. 목표로 잡은 계곡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이유고, 날씨가 심상치 않은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하늘이 맑지 않고 계속 어둡습니다. 모래폭풍이 계속 근처에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 모래폭풍이라고는 해도 너무 빈도가 잦았다. 지금도 언제 모래폭풍이 덮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모래폭풍과 같은 방향이 잡힌 모양입니다. 빠르게 계곡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계속 괴로울 겁니다.”
모래폭풍에 뒤를 쫓긴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압박감이었다. 이전과 달리 휴식도 거의 없이 가능한 한 빠르게 달렸다. 그렇게 혹사했기 때문인지 용마들의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혀를 밖으로 쭉 내밀고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녀석들의 몸이 잘게 떨리고 호흡이 거칠었다. 그래도 덕분에 까마득하기만 하던 계곡이 눈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계곡에 도착하자 모래가 줄어들고 돌바닥이 나타났다. 계곡을 타고 이동하려니 바람은 훨씬 강해졌지만, 그래도 모래가 날리는 것은 덜해진 것 같기도 했다.
제대로 길이 닦여있지 않아서 좁고 험했다. 도저히 용마를 탄 상태로는 갈 수가 없어서 내린 후 녀석들을 끌고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한층 거센 바람 소리와 돌이 구르는 소리가 가득했다. 아이반은 이상하게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때 아딜이 하늘을 바라보다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벌써? 이건 아무리 그래도 주기가 너무 짧은데······.”
아딜이 모래폭풍이 다가온다고 소리쳤다. 계곡 벽 쪽에 바짝 붙어있으니 순식간에 세상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몰아쳤다.
‘이렇게 또 수십 분은 고생하겠지.’
그런 생각을 부인하듯 갑자기 세상이 고요해졌다. 그렇게 거세던 바람이 뚝 끊어지고 오히려 외부의 소음을 밀어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이상 사태에 일행은 누구랄 것도 없이 무기를 뽑아 들고 사방을 경계했다.
그들에게는 지금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현실과는 다른 답답한 느낌, 이질적인 분위기. 마치 던전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그때 짙은 흙먼지를 헤치고 누군가 걸어왔다.
낡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여인이었다. 맨발로 거친 돌바닥을 딛고 선 채,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나풀거리며 나타났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위험한 느낌이었다. 지금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를 만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여 찾아왔거늘, 헛된 걸음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