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17
맑은 목소리, 그러나 무심하고 딱딱한 말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딱히 위협적인 태도가 아니었음에도 저절로 몸이 위축되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아이반이 경계심을 숨기지 않고 뾰족하게 묻자 그녀의 시선이 스치고 지나갔다. 낡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으나 아이반은 그녀의 시선을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객이 주인의 정체를 묻다니, 무엄한 자로다.”
순간적으로 압력이 강해졌다. 자신을 내리누르는 힘에 허리가 꺾여버릴 듯했으나 아이반은 애써 버텨냈다.
‘먼저 공격해야 하나?’
아이반은 순간 전투를 고민했다. 그의 투기에 반응하듯 허리춤에 매달려있던 피의 검 브리카가 요사스러운 기운을 흩뿌렸다. 쩌저적! 검집이 갈라지고 검붉은 힘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무심하던 여인의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깃들었다.
“어디서 그런 추잡한 것을 내 땅에 가져왔느냐?”
주변 공기가 그를 아이반을 적대하듯 날카롭게 변했다. 유유히 흐르던 마력이 거칠어지고 그를 거부했다. 아이반은 이를 악물고 급히 힘을 불러냈다. 천둥신의 권능이 그의 몸에 들어차고 적대적인 마력에 대항했다. 치지직! 거친 스파크가 위협적으로 번졌다. 아이반의 존재감이 커지고 그를 내리누르는 기운을 밀어냈다.
‘먼저 공격해야···!’
탁! 그가 검을 휘두르려 할 때,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붙잡았다. 굵고 억센 손아귀. 사나운 이빨이었다. 사나운 이빨이 그를 막아선다는 것은 몹시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전투를 멈춘다니, 보통이라면 있을 수 없었다. 아이반이 흘깃 그를 바라보니 사나운 이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의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리고는 그가 앞으로 나섰다.
“그대가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미 한참이나 전에 공격했을 것임을 알고 있다. 원하는 바를 말하라.”
드물게 차분한 태도로 그가 말하자 여인이 살짝 고개를 꺾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저 익숙한 기운이기에 나와 봤을 뿐이다. 그런데 참으로 과분한 것을 가지고 있구나, 리자드맨.”
여인은 사나운 이빨의 심장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용의 심장은 누구나 탐낼만한 보물인지라 사정을 알고 있는 일행의 미간에 땀이 찔끔 흘러나왔다.
“혹여 새로운 동족이 탄생하였나 싶었더니, 심장을 갈아 끼운 리자드맨이라. 허, 오랜 삶에 모처럼 신선한 기분이로다.”
동족. 그 말에 길잡이 아딜을 제외한 모두가 침을 삼켰다. 이제 그녀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왜 사나운 이빨이 전투를 만류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럴만한 상대였다.
‘메마른 땅에 드래곤이 있었다고?’
지난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드래곤을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뜬금없이 마주한다는 말인가. 던전의 힘으로 부활한 드래곤도 아니고 멀쩡히 현대에 존재하는 드래곤이라니. 그때처럼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가 함께 싸워주는 것도 아니었다. 힘의 망치 갈라로자처럼 용언을 막지 못한다면 승산이 전혀 없었다.
“심장을 되찾을 셈인가!”
사나운 이빨이 소리치자 여인, 드래곤은 그것을 부인했다.
“내 것도 아니거늘 되찾을 이유가 무엇이냐? 리자드맨이 용의 심장을 박고도 살아있다니, 오히려 흥미가 생기는구나.”
지금껏 무심하던 시선의 성질이 바뀌었다. 탐욕스럽고 잔인한 관찰자의 시선. 어린아이처럼 순수했으나, 그렇기에 끔찍하고 오만했다. 동족을 살해하고 심장을 뺏었다는 분노는 아니었다. 애초에 드래곤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외적에게 살해당하는 경우도 없었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동족의 죽음에 분노할 자들이 아니었다. 드래곤은 모두가 태초의 드래곤이 남긴 분신이며, 태어날 때부터 그 지식을 건네받는 완성된 자들이었다. 성장기라는 것이 거의 없이 눈을 뜰 때부터 자아가 단단히 자리 잡힌 그들에게는 부모와 자식이 의미가 없었고, 형제자매도 그러했다. 동족의식이 희박하고 죽음조차 각자의 것이라 여겼으니 이름 모를 리자드맨이 용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새삼스럽게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오랜 기억과 수많은 죽음을 반복한 나의 삶에도 존재하지 않던 기사로다. 잠깐 살을 가르고 해부를 해보고 싶건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레인이 자신의 손등에서 고대 요정의 활을 꺼냈다. 여차하면 요정의 숲에서 지원을 받아 팔라시온의 활을 가동하겠다는 의미였다. 비록 요정의 숲이 외부와 연결을 끊은 채로 차원 좌표를 옮기는 중이었지만, 이레인이 세계수와의 연결을 다시 잇고 도움을 요청한다면 즉시 힘을 보탤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드래곤이 강력하다고 해도 세계수의 백업을 받아 발동하는 팔라시온의 활을 맞고도 멀쩡할 수는 없었다. 그건 엘프라는 종족 전체와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레인이 활을 꺼내 들자 순간 불쾌한 기색을 보이던 드래곤이 그것을 알아보고 다소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팔라시온의 활? 고대 요정의 보물이 아닌가? 너 또한 그저 평범한 엘프는 아니었구나.”
“쓸데없는 탐욕을 부리지 마라, 드래곤. 요정의 화살은 용의 가죽조차 꿰뚫을 수가 있으니. 세계수가 나와 함께한다.”
“내가 그깟 장작더미를 두려워할 성싶으냐? 너야말로 나를 자극하지 말라. 용의 분노는 너희의 하찮은 생각보다 더욱 진한 법이니.”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며 긴장감이 점차 고조되었다. 아이반이 검을 휘두를 틈을 노리고, 델피노가 오래된 성자의 지팡이를 굳게 쥐었다. 이레인이 정말로 정신을 열고 세계수와 연결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마치 김이 샜다는 것처럼 드래곤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런 시기가 아니라면 한 번 몸을 푸는 것도 좋으련만, 지금은 놓아주마. 그러나 또다시 그런 건방진 태도로 나를 맞이한다면 너희들은 결코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떠나기 전 사나운 이빨을 바라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용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용뿐이다. 심장의 힘을 끌어내려면 조금 더 노력해야 할 것이야.”
휘이잉- 다시 바람이 분다. 강력한 바람에 몸이 흔들리고 짙은 흙먼지에 시야를 가렸다. 마치 던전에 들어온 것 같은 이질감이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왔다. 모래폭풍이 멀리 떠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레인이 손을 내젓자 바람의 정령이 흙먼지를 걷어냈다. 아이반이 저 멀리 사라지는 모래폭풍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아딜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그거. 혹시 드래곤이었습니까? 설마, 정말로?”
그는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자신이 평생을 살아온 땅에 드래곤이 있었다는 것도 믿기 힘들었고, 그것을 실제로 보았다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드래곤을 마주하고 무기를 들어 올리던 이 자들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적의를 내보였음에도 드래곤이 스스로 물러났다는 사실은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범상치 않은 자들이라는 생각은 했으나 대체 이 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자신이 이들을 사막으로 끌어들인 것이 옳은 결정이었을까?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건만, 오늘은 온통 이해되지 않는 일투성이였다.
“오늘 본 일은 어디서 함부로 떠들지 마시오. 그리 좋을 것이 없으니.”
아이반이 무거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아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것이 함부로 말할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알지 못할 것을 알면 위험하지 않을 위험이 생긴다. 쓸데없이 귀가 밝은 것이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어수룩한 자가 아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을까?’
아이반은 그를 바라보며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버렸다. 입을 확실히 막으려면 결국에는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이런 시기란 것은 뭘까? 드래곤이 대체 뭘 신경 쓰고 있었던 거지?’
아이반은 드래곤의 말을 곱씹다가 아딜에게 물었다.
“이 지역에 드래곤과 관련된 이야기가 혹시 있소?”
“그,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할멈이라면 알 수도 있겠지만······.”
“할멈?”
“점쟁이 할멈이라고, 저희 고향의 주술사입니다. 이것저것 아는 것도 많고 옛이야기에 정통합니다. 우리 고향에서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할멈에게 꼭 물어보곤 했지요.”
“고향이라면 검은 바위 마을?”
“그렇습니다.”
검은 바위 마을은 메마른 땅 한가운데에 있는 곳인데, 어차피 일정상 그곳을 거쳐야만 했다. 아니라도 길잡이 아딜이 가족에게 약을 전해줘야 한다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드래곤이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이미 깊숙이 들어온 상태에서 되돌아가기도 좀 그랬다.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밀고 가야지. 뜨거운 사막의 태양 아래에서도 흘러나오지 않던 땀이 드래곤을 만나고 잔뜩 흘러나왔다가 바람에 날아갔다. 한 번 땀을 흘리고 뜨거운 모래바람이 달라붙으니 온몸이 끈적끈적했다.
“어서 서두릅시다. 또다시 원치 않는 만남을 하기 싫다면.”
그리고 고개를 돌려 용마를 보았는데 녀석들이 혀를 빼고 쓰러져서 죽어있었다. 아까 전 드래곤이 아이반에게 기세를 집중했을 때, 그 뒤에 있던 놈들이 여파를 못 견디고 숨이 끊어진 듯했다.
“···빌어먹을.”
녀석들을 모래 속에 대충 묻어주고 다시 길을 나섰다. 물기 하나 없는 마른 계곡을 타고 위쪽으로 걸었다. 스스슥- 벽을 타고 돌아다니는 묘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역시 모래와 같은 밝은 갈색이었지만 그렇다고 웬만한 강아지보다 커다란 개미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 저 녀석들이 이곳에는 어떻게···?”
아딜이 크게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혹시 포위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저 녀석들은 뭐요?”
“강철 턱 거대 개미입니다. 수가 워낙 많은데다 쇠도 갉아먹을 만큼 강한 입을 가지고 있는 위험한 녀석들이죠. 녀석들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데······.”
“모래폭풍이 부는 시기에는 몬스터들이 이동한다면서?”
“그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땅속에 자기들의 왕국을 만든 개미들이 이리 멀리까지 나올 리가 없습니다. 수가 불어나지 않도록 전사들이 계속 감시하는데······.”
어쩌면 샌드웜이 초입에서 튀어나온 것도 개미들의 영향일지 모르겠다며 아딜이 중얼거렸다. 그만큼 위험한 놈들이란 소리다.
“이미 마주친 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지.”
아이반은 검을 뽑아 들었다. 피의 검 브리카는 아직 요사스러운 기운을 다 갈무리하지 못했기에 강철 모루에서 얻은 다른 검이었다.
“안 그래도 기분이 나빴는데 마음껏 날뛸 수가 있겠어.”
“동의한다!”
아이반이 검을 휘두르고 사나운 이빨이 앞으로 달려갔다.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슬금슬금 다가오던 거대 개미를 베어내고 용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불꽃이 녀석들을 태워버렸다. 이레인이 불러낸 정령이 놈들을 짓누르고, 파라스가 휘두른 도끼가 개미를 쪼개버렸다. 치이익! 누런 체액이 흘러나와 바닥을 적시고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를 맡은 개미들이 점점 더 모여들고 있었다. 거대 개미 왕국의 병사들은 아직도 너무나 많았다.
“더럽게 많군. 적어도 천은 되겠는데?”
“그래서 버거운가!”
“설마. 몸을 풀기에 딱 좋은데.”
아이반이 창을 꺼냈다. 그의 몸을 휘감고 세찬 바람이 불었다
거센 바람이 거대 개미의 몸을 밀어낸다.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덤벼들던 녀석들이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순간, 아이반이 창을 찔러 넣었다.
거대 개미의 머리를 꿰뚫은 창이 뽑히는 것과 동시에 그 뒤에 있던 녀석이 턱을 쩍 벌렸다. 강철도 갉아먹는다는 흉악한 입이 절그럭 움직였다. 그러나 녀석이 한껏 벌린 입에 들어간 것은 이레인의 화살이었다.
정령의 힘을 담은 화살이 녀석을 그대로 관통하고 뒤로 날아가 폭발을 일으켰다. 쾅! 한껏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오고, 다닥다닥 붙어서 달려오던 개미들의 몸이 산산이 조각나서 흩어졌다.
거칠 것 없이 밀려오던 거대 개미들의 군세가 일순간 혼란에 빠질 정도였다. 사나운 이빨이 큼지막한 검으로 개미의 몸통을 잘라내고, 바닥을 구르는 녀석들의 머리를 후려 차 날렸다.
그가 빙그르르 몸을 돌려 꼬리를 휘두르자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놈들이 한 번에 휩쓸려 나갔다. 쉬이익! 그 와중에 녀석들이 사나운 이빨의 꼬리를 깨물었으나, 화염 드래곤의 심장을 이식한 뒤로 점점 용과 비슷해지고 있는 그의 가죽에 상처를 낼 수는 없었다.
웬만한 창칼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나운 이빨의 가죽이 질기고 튼튼해졌다. 진짜 용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전신에 갑옷을 두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부족하다!”
용의 발톱에 한 번 잘려 나갔다가 재생된 그의 꼬리는 몽둥이나 다름없었다. 강철 턱 거대 개미를 몇이나 후려쳐 죽여 버렸기에 놈들이 남긴 노란 체액이 그의 꼬리를 더럽히고 있었다.
평소라면 무척이나 민감하게 반응했겠지만 일단 전투에 들어가면 그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적의 몸을 찢고 그 피로 자신의 몸을 적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치지직! 쾅! 아이반의 허벅지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가 마치 공간을 뛰어넘듯 앞으로 달려가 개미들의 몸을 꿰뚫었다.
천둥걸음. 그의 발걸음에서부터 번져 나온 번개가 그가 달려온 길을 따라 퍼졌다. 개미들이 감전되어 풀썩 쓰러졌다.
움찔 몸을 떨고는 있었으나 이미 목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마치 계곡을 뒤덮을 듯 몰려들던 녀석들이 이제는 눈으로 대충 셈을 할 수 있을 만큼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불리함을 느낀 것인지 녀석들이 왔던 길을 되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소 늦은 반응이었으나,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탁! 누런 진물을 털어내고 창을 어깨에 걸친 아이반이 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몇 남지는 않았으나 굳이 추격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어차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을 거다. 여기서 몇 마리 더 잡아 죽인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 그렇게 해서 얻을 이득이 크지도 않고.
“흠! 형편없는 놈들이었다!”
전투의 흥분이 가라앉고 서서히 평상시 모습으로 되돌아가던 사나운 이빨이 불쾌한 듯이 소리쳤다. 아무래도 그의 꼬리에 가득 묻은 거대 개미의 흔적이 슬슬 찝찝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