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18
쓱쓱 모래에 꼬리를 비벼서 더러운 것을 닦아내는 그를 바라보던 이레인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물의 정령이 나타나 일행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라락! 시원하고 깨끗한 물이 감싸고 빠져나가자 몸에 덕지덕지 묻어있던 오물이 그대로 씻겨나갔다. 그렇게 몸을 씻으니 사막에서는 쉽게 느끼기 힘든 청량감이 느껴졌다.
물론 덥고 푸석한 모래바람에 금방 사라졌다.
“이놈들이 원래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 혹시 심각한 상황이오?”
강철 턱 개미는 한 번 모습을 드러내면 적어도 수백 마리는 무리 지어 움직이는 녀석들이었다. 그렇게 떼를 지어 공격하는 강철 턱 개미는 샌드웜조차 피해갈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일행이 쉽게 처리했다고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길잡이 아딜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모래폭풍이 몰아칠 때도 강철 턱 개미가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메마른 땅 초입에 샌드웜이 나타난 것부터 이상하더라니, 강철 턱 개미에 밀려난 듯했다. 그러면 대체 강철 턱 개미는 무슨 이유로 이곳에 나타난 걸까?
“혹시 드래곤의 수작은 아닐까요?”
델피노가 조심스럽게 그리 말했지만 이레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존심 강한 드래곤이 그럴 리가 없어. 그럴 거면 아까 만났을 때 그냥 공격했겠지.”
드래곤이 몬스터를 이용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번거로운 일 처리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일단 가던 길은 계속 가지. 서둘러 검은 바위 마을에 도착해서 상황을 좀 알아봐야겠소.”
아이반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끝없는 모래 바다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모래폭풍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으나, 그조차 거대한 폭풍을 맞이하기 전의 짧은 평화로만 느껴졌다.
‘부디 우리와 큰 관련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아이반이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지만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냥 곱게는 넘어가지 못하리라. 또 지독한 사건에 휘말리고 말겠지. 천상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신들의 존재가 느껴졌다.
흐릿하게나마 그들이 즐거워하는 감정이 전해졌다. 자신의 전사를 끝없이 시험하고, 지독한 전장에 밀어 넣은 후, 결국 도와 달라 자신의 이름을 외치게 만드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었다.
그런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번 일이 어찌 흘러갈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망할······.”
입안이 텁텁했다. 그게 단지 흙먼지 가득한 모래바람 때문은 아닐 터였다.
“조금만 더 가면 검은 바위 마을에 도착합니다.”
길잡이 아딜의 말에 모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걸음을 멈추고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드래곤을 만난 이후부터 계산해도 여기까지 오는데 열흘이 넘게 걸렸다. 타고 갈 용마가 죽어버린 데다 이리저리 개판으로 흩어진 몬스터 무리를 피해 움직이느라 시간이 더 걸렸기 때문이다.
그냥 몬스터고 나발이고 직선으로 관통해서 움직이고 싶기도 했지만, 사막이 심상치 않았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려니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움직였음에도 그들은 두어 번쯤 더 몬스터의 공격을 맞이해야만 했다.
아무리 모래폭풍이 부는 시기에는 개판이 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희 마을에 도착하면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아딜의 말에 사나운 이빨이 반응했다.
“식사보다 목욕이 필요하다! 온몸을 듬뿍 적실 수 있을 만큼의 물과 욕조가!”
리자드맨은 원래 축축한 늪지에서 생활하는 종족이라 이렇게 극단적으로 수분이 적은 환경은 익숙하지 않았다. 하긴,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사막에 익숙하겠냐마는. 아무리 물의 정령이 있다고는 해도 온몸을 물에 담그고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가 목욕을 소리쳐 부르자 아딜이 어색하게 웃었다.
“으흠, 몸을 듬뿍 적실 수 있는 욕탕이라니······.”
물이 귀한 곳이었다. 리자드맨이 만족할 만큼 거대한 욕조를 가지고 있으려면 적어도 마을 유지 정도는 되어야 했다. 웬만큼 부유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었다. 아딜이 곤란해하는 표정을 본 아이반이 툭 말을 내뱉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물과 욕조는 우리가 가지고 있으니. 그저 괜찮은 여관이나 소개해주면 충분하오.”
검은 바위 마을은 꽤 큼지막한 곳이었다. 커다란 오아시스를 끼고 있는 이 마을은 메마른 땅 한가운데에 있어서 수많은 카라반과 사막의 여행객이 거쳐 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당신들은 어떻게 이곳에 온 거요?”
마을 사람들은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이런 시기에, 용마나 낙타도 없이 걸어서 찾아온 일행에게 몹시 놀란 듯했다. 이 마을 출신인 아딜이 옆에 붙어있지 않았다면 한참이나 질문을 던져댔을 거다.
숙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는 손님 하나 없이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손님이 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여관 주인이 서둘러 영업 준비를 하느라 더 오래 걸렸다. 사나운 이빨은 서둘러 목욕을 하겠다고 남았고, 파라스 역시 무언가를 만들어보겠다고 방에 틀어박혔다.
바위 전갈이나 강철 턱 개미, 샌드웜에서 얻은 재료들을 보고 뭔가 영감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아니, 이걸 진짜 사용할 거요?”
“물론이다! 신상은 써야한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사나운 이빨에게 모래 향 입욕제를 건네준 아이반은 델피노, 이레인과 함께 아딜을 따라나섰다. 동생이 아파서 약을 구하러 밖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는 그의 사연을 듣고 혹시 도와줄 일이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딜은 몇 번이나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들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여기는 듯했다.
“그, 몇 번 사제를 모셔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태생이 연약해서 신성력으로도 큰 효험이 없다더군요.”
“그래도 보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제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마시죠.”
아딜의 집은 검은 바위 마을 외곽에 있는 조그마한 곳이었다. 거친 모래바람에 깎이고 외벽이 쩍쩍 갈라진 것이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아딜의 실력이라면 이런 곳에서 살 필요는 없을 텐데······.’
이미 몬스터들을 상대하면 몇 번 확인한 것이지만, 아딜은 웬만한 전사들과 비교해도 실력이 뛰어났다. 스스로 말하길 혼자서도 샌드웜을 잡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딜의 실력이라면 원하는 곳이 많을 터였다.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그의 집이 이리 허름하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여기가 제 동생입니다. 카림, 인사드려라. 이분들 덕분에 집에 올 수 있었어.”
그가 카림이라고 소개한 동생은 몸이 크게 왜소한 어린아이였다. 눈 밑에 검은 기운이 가득하고 기력이 약한 것이 척 보기에도 건강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카림입니다.”
앉아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아이를 바라보다 아이반은 슬쩍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그는 아이를 대하는 것이 어려웠다. 차분한 눈으로 아이를 살피던 이레인이 곧 그를 뒤따라 나왔다. 스읍, 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는 그녀에게 아이반이 질문을 던졌다.
“어떤 것 같소?”
“뭐? 저 애?”
힐끔 뒤를 살피던 이레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혼의 그릇이 깨졌어. 기력이 자꾸 빠져나가니 생명력이 사그라지지. 태생이 그러하니 쉽지 않겠어.”
아이반 역시 영혼의 그릇이 깨져나간 경험이 있었다. 과도한 신력을 받아들여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지 않았던가.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일인지 알았기에 아이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저런 상태로 지금껏 버틴 것이 신기한 일이야. 아무래도 아딜이 그동안 노력을 많이 한 모양이지.”
영혼의 그릇이 깨져서 기력이 빠져나가니 영약으로 그것을 계속 채워줄 수밖에 없었다. 아딜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영약을 구한 모양이다.
물론 그렇게 구한다고 해봐야 아주 대단한 물건을 구할 수도 없으니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없이 버티고만 있었던 거지. 사실 그렇게라도 버텼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동안 초빙한 사제들이 고개를 흔들었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끝없이 영적으로 단련을 거듭하는 사제들도 영혼의 그릇이 깨지면 쉽게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어린아이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겠지. 그때 아이반의 기감에 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진한 것 같으면서도 흐릿하고, 흐린 것 같으면서도 선명한 존재감. 아이반이 눈을 뜨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보라색 베일을 뒤집어쓴 노파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 역시 아무런 생각 없이 걷다가 아이반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했다.
“영 낯설고 신기한 손님이로고. 아딜이 모셔온 분들인가?”
세월의 흐름에 씻겨 탁해진 목소리였으나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것이 퍽 신비로웠다. 노파는 힐끔 이레인을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숲이 없는 땅에 숲의 딸이 오셨구려.”
이레인은 거의 항상 변신 마법을 통해 자신의 종족을 숨기고 있었다. 숲을 떠난 수호자에게 주어지는 요정의 마법을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기에 아이반의 눈빛이 가늘게 변했다.
“주술사로군. 혹 당신이 점쟁이 할멈이오?”
“흘흘흘, 그저 구슬이나 닦는 노인네지.”
“잘되었군. 물어볼 것이 있었는데.”
점쟁이 할멈이 아딜의 집을 빤히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내일 오시구려. 손님 맞을 준비를 해둘 터이니. 내 거처는 아딜 녀석에게 물어보면 된다오.”
“우리가 무엇을 물을 줄 알고 그러시오?”
아이반이 의심스럽다는 듯 그리 묻자 점쟁이 할멈이 거친 기침을 토해낼 때까지 웃다가 말했다.
“물론 이 땅에 얽힌 가장 비밀스러운 이야기겠지.
다음 날, 일행은 아딜의 안내를 받아 점쟁이 할멈의 거처로 향했다. 점쟁이 할멈이 사는 곳은 아딜의 집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그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인연이 있어서 아딜이 외부로 일을 나갈 때면 그녀가 카림을 돌봐 주었다고 했다. 처음 카림의 병을 진단하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것도 점쟁이 할멈이라고. 아마 어제 그녀가 나타난 것도 카림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방문했기 때문일 터였다.
‘분위기가 묘하군.’
보통 이곳은 사람이 살 수 있는 터가 부족해 집을 다닥다닥 붙어서 짓기 마련인데, 어째 점쟁이 할멈의 집은 홀로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리 크지도 않고 허름한 곳임에도 그렇게 덩그러니 있으니 평범한 집 같지가 않았다. 어찌 보면 어제 보았던 점쟁이 할멈의 분위기와 몹시 어울리는 장소였다. 펄럭펄럭! 멀리서 볼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집을 둘러싸고 다양한 색상의 천이 길게 늘어져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레인이 한쪽 눈썹을 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결계네. 수준이 낮지도 않아.”
천이 흔들릴 때마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마력이 자연스럽게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주술사가 작정하고 만든 자신의 영역, 위압적인 기세는 없었으나 섣불리 들어가기엔 꺼려졌다.
‘점쟁이 할멈의 정체가 뭐지? 이런 곳에 파묻혀있기엔 지나치게 훌륭한 주술사인데.’
아이반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당당히 문을 두드렸다. 열두 명의 대주술사 중 하나가 될 자연의 구도자 테잔 앞에서도 굽히지 않았는데 이런 시골 주술사에게 겁을 먹을 리가 없었다. 똑똑똑!
“약속대로 찾아왔소!”
문을 두드리며 그리 소리치자 안에서 흘흘거리는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려있으니 들어오시구려!”
아이반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짙은 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빛이 들어오지 않게 창문을 다 막았는지 어두컴컴한 실내에 흐릿한 양초 하나만 흔들리고 있었다. 차라락!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발을 가르고 점쟁이 할멈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