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19
“들어오려면 얼른 들어올 것이지 뭘 그리 보고만 있누? 찬바람 들어오니 어서 문을 닫으시구려!”
마지막으로 들어온 델피노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니 흐릿하던 양초가 갑자기 불꽃을 키웠다. 그 은은한 불빛으로 점쟁이 할멈의 몸이 반짝거렸다. 어제는 보지 못했던 다양한 장신구를 하고 있었는데, 아이반은 그 모든 것들에서 마력을 느낄 수가 있었다. 즉, 모두가 마법 아이템이란 소리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더니 화려하게도 하셨소.”
“흘흘흘, 그럴만한 상대이니 예를 갖추어야지.”
그녀는 웃는 낯으로 아딜을 바라보았다.
“얘야, 부엌에서 차나 한잔 내오너라. 그리고 카림이 기다릴 터이니 집에 돌아가도 좋다.”
사실상의 축객령이었다. 이곳은 아딜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평소와 다른 점쟁이 할멈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아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눈치가 없지 않았다.
“나갈 때 문 옆에 있는 탕약은 챙기고. 카림에게 좋은 것이니 꼭 챙겨먹여라. 요즘 녀석이 쓰다고 조금씩 약을 멀리해. 네가 따끔히 혼을 내야겠다.”
자주 들렀기 때문인지 자기 집처럼 자연스럽게 차를 내어온 아딜이 떠났다. 점쟁이 할멈은 아무렇지 않게 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실력이 죽지는 않았구먼. 아주 맛이 좋아.”
먼저 맛을 본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이자 델피노와 이레인이 찻잔을 들어올렸다. 투박한 아딜의 모습과는 달리 맛은 아주 섬세한 것이 제법이었다. 그러나 티타임을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아이반은 찻물을 마치 술처럼 털어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대접은 잘 받았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싶은데.”
“흘흘흘, 마음이 급하시군. 그래, 그럴 수 있지.”
“용에 대해 알고 있소?”
“물론, 이 땅에 사는 자가 어찌 주인에 대해 모를까?”
점쟁이 할멈은 입가에 가득한 미소를 지우고 유리구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은은한 마력이 흘러나와 집을 감싸고 있는 결계와 공명했다. 아이반은 그것이 외부와의 연결을 차단하는 결계임을 알아차렸다. 이제 이곳은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이계나 다름없었다.
“평범한 주술사는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참 기묘하군. 자연스럽게 대지의 기운을 빌려 쓰고 있어. 이곳이 드래곤의 영역이라면, 어떻게 그게 가능한 일이오?”
드래곤은 이 세상의 창조자라 할 수 있는 태초의 드래곤들이 남긴 그들의 분신이었다. 그들은 신격이 아님에도 이 세상의 법칙을 움직일 수가 있는 관리자 권한이 있었고, 그것이 용언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대지가 스스로 빚었다는 힘의 망치, 갈라로자와 같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는 용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점쟁이 할멈은 용의 영토에서 자연스럽게 힘을 빌려 쓰니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나는 이 땅에서 나고, 자랐으며, 늙어가고 있다오. 이 땅이 나를 거부할 이유는또 무어란 말이오?”
“그리 이야기를 돌릴 거라면 찾아온 이유가 없소.”
“흘흘, 재촉하지 마시구려. 다 이야기를 해줄 터이니.”
습관처럼 유리구슬을 쓰다듬던 점쟁이 할멈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용이 이 땅에 자리를 잡은 것은 벌써 천 년도 더 지난 일이외다. 정확히는 모르나, 전해지기로 용은 아주 오랜 세월 잠들 곳을 찾아 왔다고 했소.”
“잠들 곳?”
“용은 그저 깨어있는 것만으로 막대한 마력이 필요한 존재라오. 용의 심장이 무한한 마력을 전해준다고 해도 지금의 시대는 용이 마음껏 활동하기엔 너무나 척박한 모양이지.”
그 말에 이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그래서 대부분의 드래곤이 수면기에 들었지. 조금이라도 마력소모를 줄이기 위해서.”
지난 천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드래곤의 모습을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드래곤의 활동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드래곤 역시 시기적으로 보면 얼추 비슷했다.
“하지만 용이 날뛰고자 하는 마음이 없더라도 이곳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소. 용의 마력은 몬스터들을 끌어들이니까.”
안 그래도 척박한 땅에 몬스터가 들끓으면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어딘가 아득한 옛날을 바라보듯, 오래된 이야기를 읊던 점쟁이 할멈의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는 한층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나의 선조께서 나섰소. 가만히 있어도 흘러나오는 용의 마력을 억누르기 위해 본인의 목숨을 바치셨지.”
그 말에 델피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의 마력을 억누른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강철 모루에서 폭주하는 용의 심장을 막지 못해서 모두가 죽을 뻔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때 사나운 이빨이 자신의 가슴을 가르고 용의 심장을 품어서 제어하지 않았다면 강철 모루라는 나라가 사라졌을 것이다. 하물며 죽은 지 한참이나 된 용의 심장이 그러했는데 살아있는 용의 심장을 외부에서 억누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인가. 그걸 드래곤이 가만히 보고 있을 것도 아니고.
“어려운 일이지만 성공하였소. 나의 선조는 당대의 대주술사였으니. 그분께서는 다른 영웅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용을 봉인하는데 성공하였다지. 흘흘,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오?”
“용을 봉인했다? 하지만 우리는 드래곤을 봤어. 모래폭풍 속에서 그녀가 우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나보구려. 그건 드래곤의 본신이 아니외다. 천 년 전, 대주술사였던 그분의 육신이지.”
“그게 무슨 뜻이지?”
“그분께서는 자신의 육신에 드래곤의 영혼을 봉인하셨소. 그리하여 드래곤의 마력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만들었지.”
그건 이레인조차 몰랐는지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드래곤의 영혼이 너무나 커서 자신의 육신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드래곤 정도 되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는 거나 분신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령 영혼과 육신의 부조화를 느끼더라도 크게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으리라.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반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몇 번 입안에서 할 말을 고르다가 대뜸 뱉었다.
“대주술사가 목숨을 바쳐서 봉인했다고 한들 영원하지는 않겠지. 이제 그 봉인이 풀리고 있는 거군. 내 말이 맞소?”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이야기에 모두의 시선이 아이반을 향했다. 그러나 아이반은 덤덤하게 점쟁이 할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점쟁이 할멈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오. 얼마 전부터 그 조짐이 보이긴 했지.”
“조짐이라면?”
“카림의 병. 그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오. 오래도록 미뤄뒀던 업의 영향이지.”
드래곤이라는 거대한 존재의 영혼을 붙잡아 봉인한 것이 천 년. 그 오랜 세월 주술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의 영맥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한 순간의 파멸을 멀고 먼 미래로 유예한 대가로 영맥은 점차 말라가고, 마침내 그 위에 살아가던 사람들의 영력마저 빼앗았다. 다른 이들은 조금 피곤하고 말 것이 카림에게는 크게 작용해서 태어날 때부터 영혼의 그릇이 깨진 상태로 나타난 것이다.
“잘못을 깨달았으나 너무 늦은 상태였다오.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앞으로는 점점 더 그런 아이들이 많아 질 거라오.”
날 때부터 영혼의 그릇이 깨진 상태임에도 지금껏 버티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땅이기 때문이라 했다. 애초에 카림은 사막을 돌아다닐 만큼의 기력이 없지만, 설령 그런 체력이 된다고 해도 이곳을 벗어나는 즉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그릇의 틈이 벌어져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원래라면 이런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겠지만, 지난 천 년간 이 땅이 너무나 많이 황폐해졌소. 영맥의 힘이 주술력을 이기지 못할 만큼 약해졌단 말이오.”
메마른 땅은 그 이름대로 점점 더 메말라가고 있었다. 천 년 전에는 이렇게까지 악화되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몬스터들이 평소보다 훨씬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도 혹시 드래곤의 봉인이 풀리기 때문이오?”
“아마도 그렇겠지. 용의 기운이 퍼지는 순간 조용하던 사막이 뒤집어질 거라오.”
거기까지 말한 점쟁이 할멈이 문득 표정을 굳히고 입을 다물었다.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크게 당황한 듯했다.
“이야기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결계를 쳤는데도 알아차렸단 말인가!”
휘이잉- 거센 바람소리가 들렸다. 점쟁이 할멈의 거처를 둘러싸고 있던 결계가 모래폭풍에 밀려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찌이익! 색색으로 길게 늘어진 천이 바람을 못 이기고 결국 찢어지는 소리가 늘렸다. 결계를 만드는 핵심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 외부의 힘이 이곳까지 스며든다는 의미였다. 챙! 아이반이 창을 뽑아들었다. 이레인이 활시위를 당기고 밖을 노려보았다. 델피노가 기도문을 읊고 일행의 몸에 축복이 내렸다.
‘사나운 이빨과 파라스는 괜찮을까?’
함께 오지 않고 숙소에 남은 그들을 걱정하던 아이반이 잡념을 털어버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모래폭풍이 시야를 가렸다. 온통 흐릿하고 어두컴컴한 흙색 안개를 가르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은 맨발의 여인. 오래 전 대주술사의 육신에 갇힌 드래곤.
“···설마 또 만날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무슨 이유로 나타나셨소?”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아이반이 그리 묻자 드래곤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치욕스럽구나. 그러나 내가 이리 부탁하노라.”
“···부탁?”
“내가 부활하지 않게 도와다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자신이 부활하지 않게 도와달라니. 당장이라도 이 거추장스러운 봉인을 풀어버리고 본신을 되찾겠다고 날뛰지나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자신을 막아달라고 할 줄이야. 혹시 그 행간에 숨겨진 뜻이 있는지 잠시 곱씹어보았으나 아이반은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저쪽··· 역시 무슨 뜻인지 모르는 눈치로군.’ 힐끔 점쟁이 할멈의 표정을 살폈으나 그녀는 드래곤을 직접 마주했다는 사실에 몹시 놀라서 거의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기도 했다. 대지의 도움을 받아 결계를 펼치고, 자신을 숨겼지만, 그조차 드래곤의 시야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항상 용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확인하는 것이 대주술사 사후 천 년간 이어진 임무라고 했다. 천 년의 세월이 그리도 길었다.
드래곤이 어떤 존재인지 짐작할 수 있는 자들은 이미 옛날 옛적에 죽고 사라져서 의미 없는 의무만 전해진 것이다. 점쟁이 할멈은 훌륭한 솜씨를 지닌 주술사였으나, 드래곤과 비교하자면 하찮을 정도에 불과했다.
비록 그 용이 대주술사의 몸에 갇힌 상태라고 할지라도.
“당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소, 드래곤. 대체 무엇을 도와달라는 말이오?”
“나의 육신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 그들을 쫓아주었으면 하노라.”
“육신을 노리는 자들? 용이 내쫓지 못하는 자들을 우리가 어찌 물리칠 수가 있다는 말이오?”
“내 육신이 위험을 느끼면 나는 깨어나게 된다. 그것을 너희들은 감당할 수 있겠느냐?”
순간 아이반의 눈빛이 변했다. 드래곤이 하는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깨어나는 것으로 메마른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해를 입는 것을 꺼리는 듯한 말투가 아닌가. 태어날 때부터 완성되어 혼자서 살아간다는 드래곤의 오만함에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다.
“천 년이 길기는 긴가 보군.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드래곤의 오만함도 변하는 것을 보니.”
“흥, 유약한 마음의 찌꺼기지. 본신으로 돌아가면 사라질 일순간의 변덕이로다.”
코웃음을 흘린 드래곤이 진중하게 덧붙였다.
“파멸의 뿔피리가 울리는 그날까지 우리는 잠들어있어야만 한다. 비록 아주 잠깐의 유예에 불과하지만, 아직은 이르구나.”
“그건 도대체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이오?”
“온 세상이 어둠에 잠길 때. 곧 들이닥칠 암울한 시대로다.”
아이반은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드래곤은 질문을 받지 않았다. 휘이잉- 드래곤이 나타나는 것과 함께 잠시 멈췄던 바람이 다시 거세게 변하고 흙먼지가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드래곤이 떠나려는 것이다.
“어디서 무엇을 막아야만 하는지 말해주시오!”
“이 몸의 핏줄에게 물어보라. 내 육신을 봉인한 자의 후손이 나의 잠자리로 인도할 것이다.”
드래곤이 떠나고 사방에 가득하던 모래바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모래폭풍이 저 멀리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사나운 이빨이 거친 기세로 달려왔다.
“방금 그것은 무엇인가! 혹시 드래곤이 또 나타난 것인가!”
커다란 검을 들고 있는 사나운 이빨의 눈이 붉게 변했다. 심장으로부터 끌어올린 용의 마력이 그의 눈을 통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숙소에 있다가 급하게 달려왔는지 그의 호흡이 무척이나 거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