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2
“먹고 왔소. 하지만 이곳 음식도 궁금하기는 하군.”
맞은편에 앉은 아이반이 가볍게 식사주문을 마치자 에민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는 정말 며칠 만에 편하게 잤습니다. 언데드에게 위협당하지 않는 밤이라는 건 정말 행복한 것이더군요.”
“그거 부럽군. 나는 어제도 밤잠을 설쳤는데.”
“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원치 않은 밤손님이 몇 찾아왔소. 술이 들어가니 랄프의 입이 가벼워지더군.”
” 그렇군요.”
구운 소시지와 달걀프라이, 하얀 밀빵과 샐러드, 거기에 호박으로 만든 스프까지.
간단한 식사였지만 맛이 깔끔했다.
확실히 고급여관의 음식이라 수준이 높았다. 물론 가격도 높았다. 아이반이 묵었던 여관의 몇 배쯤.
“청색 마탑으로는 언제 돌아갈 생각이오? 이번에 얻은 유물들을 청색 마탑에 팔고 싶은데.”
그 말에 에민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그렇습니까?”
이번 일에 아이반의 활약이 무척이나 뛰어났던 만큼 그가 가져간 몫이 상당히 많았다. 그걸 모두 청색 마탑에 팔겠다니 그보다 기쁜 일이 없었다.
“오늘 오후에 바로 출발할 생각이었습니다. 밥 먹고 마차를 구하려고 했죠. 같이 가시겠습니까?”
“빨라서 좋군.”
이곳에서 청색 마탑까지의 거리는 대략 7일이 걸렸다. 말 두 마리에 마차 하나, 마부까지 포함해서 4실버로 협상을 마친 둘은 각자 2실버씩을 꺼내 지불했다. 탈탈탈탈, 탁! 다닥다닥, 탁! 싸구려 짐마차를 대충 손봐서 만든 마차는 쿠션감이 전혀 없어서 움직일 때마다 끊임없이 엉덩이를 두들겼다.
이걸 타고 일주일이라니, 차라리 곤장 몇 대를 맞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천천히 멀어지는 성벽을 보던 아이반이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강도 대가리를 넘기고 받아야할 보상금을 챙기지 못했군.’ 3실버 75코퍼.
아주 하찮고 하찮은 누군가의 목숨 값. 그것을 떠올리던 아이반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숨 값이 잊혔다. 팅! 슈우욱! 푹! 화살 한 방이 사슴의 미간을 꿰뚫었다.
펄쩍 뛰어서 도망가려던 녀석이 풀썩 바닥에 쓰러진다.
살을 가르고, 내장을 버리고, 피를 빼고.
빠르게 그 작업을 진행하고선 고기를 한 덩이 크게 썰어내어 불판위에 올렸다. 치익, 치이익! 익어가는 고기 위에 소금과 후추, 허브를 뿌렸다. 그 옆에 버섯과 양파, 감자까지 곱게 익어가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사방으로 번진다. 인벤토리에서 포크와 나이프, 접시까지 꺼내 완벽히 세팅하고 내밀자 에민이 허허 웃으면서 받아들였다.
“아공간이 있으니까 좋기는 좋군요. 길바닥에서도 그럴 듯한 요리를 먹을 수가 있다니.”
“뭐, 그렇지. 아무래도 많은 짐을 가져다닐 수가 있으니 말이오.”
아이반이 인벤토리를 사용한 것은 던전에서 마지막에 새로운 검을 꺼낼 때 딱 한 번 밖에 없었는데 그걸 에민이 봤던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은 마법이 걸린 검이라 허공에서 나타났다고 여겼지만 마법사인 에민의 눈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흔한 것이 아닌 만큼 숨길 수 있으면 숨기고 싶었지만 이미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
아이반은 더 이상 그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하게 인벤토리를 쓰고 있었다. 휙! 남은 사슴 고기를 인벤토리에 던져놓은 아이반은 사슴 스테이크를 한 입 깨물어 삼켰다. 확실히 야생에서 살던 녀석이라 질기고 잡내가 났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은 했다.
‘요리 스킬이 있었으면 이것도 맛있게 변했을 텐데.’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아이반은 이내 머릿속에서 털어버렸다. 지금도 온갖 스킬트리를 다 타고 있는 중이었다.
요리 스킬이 생존에 크게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스킬 포인트를 사용해서까지 습득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스킬 포인트를 좀 아껴야해.’ 원래 스킬 포인트가 그렇게 빡빡한 게임은 아니었지만 잡캐라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스킬 포인트가 없다고 아예 스킬을 익히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노력과 재능에 따라서 얼마든지 상위 스킬을 익힐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당장의 생존이 급해서 이리저리 쓰기 바빴지만 지금이라도 아껴놓아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노력만으로는 결코 닿을 수가 없는 강력한 스킬들을 익히지.
아이반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금방이라도 스킬창으로 가려는 손을 억눌렀다.
“이게 물을 만한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탑에서는 기초 마법서를 팔기도 한다고 들었소. 그건 좀 쓸 만 하오? 너무 어렵게 적혀 있거나하면 좀 그런데.”
그 말에 에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마법서가 쉬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만 . 혹시 마법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누구나 관심은 있지. 그야말로 마법 아니오?”
“아이반 씨는 아스가르드 신을 모시는 전사가 아닙니까? 그런데 또 마법을 배운다는 것은 .”
“오딘께서는 마술신이자 지혜의 신이시오. 언제나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것은 그분을 모시는 자의 숙명이지.”
신앙심은 개뿔도 없으면서 말은 청산유수로 흘러나왔다. 누가 보더라도 신에 대한 믿음이 투철한 전형적인 노르드 전사로 보이겠지.
“으흠, 그렇군요. 저도 노르드 신화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습니다.”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에민이 흔쾌히 대답했다.
“원래 기초 마법서라고 해도 아무나에게 판매를 하지는 않습니다만, 아이반 씨가 이번에 세운 공도 있고, 유물을 저희 마탑에 판매하시기로 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거 다행이로군.”
“만약 정말로 기초 마법서를 구매하시면 제가 잠깐이나마 교육을 해드리죠. 겨우 며칠 수업을 듣는다고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마법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한결 편하실 겁니다.”
마법사에게, 그것도 마탑의 마법사에게 과외를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식으로 입문한 것이 아니라면 과외비로 골드깨나 깨졌으리라. ‘이참에 마법을 익혀서 광역기 하나쯤은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 물론 기초 마법서에 쓸 만한 공격기술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게 얼마나 하찮은 것이든 스킬 포인트를 아끼면서 새로운 기술을 추가할 수가 있다면 도전해볼 가치가 충분했다.
또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닌가, 아이반에게 숨겨진 대마법사의 재능이 있었을지.
그런 희망적인 상상을 하면서 아이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맙소.”
“아이반 씨가 없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는데요. 생명의 은인에게 이 정도밖에 못한다는 것이 오히려 죄송하네요.”
“그거면 충분하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이니까.”
그때 멀리서 느껴지는 시선에 아이반이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보았다. 눈에 마력을 집중해 시력을 끌어올리고 저 멀리 능선을 바라보니 큼지막한 덩치의 오크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온몸에 화려한 염료로 그림을 그린 채 창을 들고 있는 오크 전사.
그는 한동안 아이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사라졌다.
“원래 이 근방이 오크들의 영역이었소?”
“예? 아닙니다. 하지만 요즘 영역싸움이 치열하다고는 들었죠. 아시다시피 그린스킨과의 사이가 점점 악화되고 있잖습니까?”
오크와 고블린, 트롤, 그 외 몇몇.
인간들의 패권 행보에 반발하여 세력을 일으킨, 초록색 피부를 가진 자들.
“그린스킨이라 .”
그러고 보니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고 있었지.
그러면 조만간 큰일이 하나 벌어지겠군.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새로운 전장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다그닥, 다그닥. 털털털털.
며칠 동안 계속 마차에 타고 있으니 엉덩이가 마비될 것 같았다. 허리도 욱신거리는 것 같고.
분명 튼튼한 몸이라 멀쩡할 텐데도 아이반은 마차가 영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다음부터는 싸구려 마차대신 그냥 말을 타고 다녀야겠군.’ 그렇게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데 조금씩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웬만한 국경도시보다 웅장한 성벽이었다.
“드디어 블루라인이 보이는군요!”
블루라인은 청색 마탑이 위치한 마탑도시였다. 에민 입장에서는 힘들고 거친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셈이니 오죽 기쁠까. 그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제대로 배움을 얻고 돌아왔군.”
“하하, 덕분에 한동안은 마탑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죠. 저는 역시 연구실이 편한 것 같습니다.”
원래 이불 밖은 위험한 법이다. 이 망할 세계에서는 이불을 덮고 있어도 습격 받을 수 있는 동네고. 아이반도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따뜻한 침대에 몸을 파묻고 누워서 귤 까먹으며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나 보고 싶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그리움이 밀려왔다. 괜히 입맛이 쓰다.
‘씨부럴.’ 아이반은 시선을 돌려 블루라인을 바라보았다. 도시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딱 보기에도 구획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청색 마탑이 세워지고 나서 도시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외딴 곳에 세워졌던 마탑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시가 생기는 과정에서 중구난방으로 만들어질 법도 한데, 마탑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덕에 마치 계획도시처럼 발전한 것이다. 오래된 마탑이 있는 도시들은 대개 이런 경우가 많았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마법진을 그리도록 만든 곳도 있으니까.
“혹시 아이반 씨는 이전에 블루라인에 방문한 적이 있으십니까?”
“처음이오. 그동안은 인연이 없었지.”
“그렇습니까? 하하, 그러면 제가 안내해드리죠. 블루라인에는 맛있는 음식점도 많습니다.”
성문에는 무기를 든 병사들이 주르륵 서서 출입심사를 하고 있었는데 대기하고 있는 줄이 상당히 길었다. 마탑도시는 중앙정부에 세금도 내지 않는 자치도시라 출입심사가 상당히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탑 소속 마법사인 에민과 함께 움직이니 그 모든 것이 쉽게 통과되었다. 애써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었고, 출입심사도 간편하기 짝이 없었다. 에민이 수더분하게 행동해서 그렇지 사실 마탑 소속 마법사는 어디를 가나 준귀족 취급을 받았다. 하물며 이곳은 청색 마탑이 다스리는 도시가 아닌가? 편할 수밖에.
“바로 마탑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조금 쉬었다가 하시겠습니까?”
“길게 끌 것 없지. 일단 거래부터 끝내겠소.”
“알겠습니다. 하하, 어르신들이 좋아하시겠군요. 설마 제가 정말로 던전을 발견했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청색 마탑은 블루라인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다. 오망성을 그리며 서있는 부속 건물과 중앙에 높이 솟은 메인 건물.
웅장하기로는 웬만한 대영주의 영주성보다도 웅장한 맛이 있었다. 푸른색으로 반짝이는 외벽과 화려한 무늬덕분에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도 상당할 듯 했다.
‘그저 보기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 청색 마탑의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이반의 눈에 건물을 타고 휘몰아치고 있는 마력의 움직임이 보였다. 수많은 마법이 중첩되어 있는 요새와 같은 건물이었다. 아이반이 다소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에민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이 바로 청색 마탑입니다. 대륙 최고의 마탑이자 제 집이기도 하죠.”
그러자 옆쪽에서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흥, 대륙 최고는 무슨. 아직은 아니야. 간신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면 몰라도.”
감히 청색 마탑의 코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고개를 돌려보니 웬 꼬장꼬장하게 생긴 노인이었다. 백발을 아무렇게나 길러두고 입에 곰방대 비슷한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늙은 마법사. 그가 입고 있는 로브나 가슴의 브로치를 보면 청색 마탑 소속의 마법사인 듯싶었다.
“이 녀석아, 자랑도 정도껏 해야지. 내 낯이 다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