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20
“파라스는?”
“뒤따라오고 있다!”
아이반이 힐끔 그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서 파라스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폐가 터질 만큼 달렸음에도 사나운 이빨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중간에 퍼진 모양이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다 켁켁 기침을 하고 또 숨을 고르는 것을 보니 얼마나 필사적으로 달린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망, 할··· 후우, 뒈질, 뻔, 흐읍, 했, 허억! 네. 후우······.”
일행이 멀쩡한 것을 보고 천천히 걸어왔음에도 호흡이 진정되지 않아 파라스는 한 문장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서야 평상시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수염 날리며 달려왔건만, 혹시 별거 없었나?”
“드래곤이 찾아왔었소. 조금 귀찮고 까다로운 의뢰를 하고 떠났지.”
“의뢰? 드래곤이 뭔가를 부탁했다고?”
“놀랍지만, 그렇소.”
천 년 동안 대주술사의 육신에 영혼이 묶여있으면서 드래곤이 그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처음 봉인될 때부터 그리 험악한 분위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드래곤의 의뢰는 받아들일 셈이야?”
이레인의 물음에 아이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다면 모르되, 일단 알게 되었다면 무시할 수는 없소. 용의 둥지에는 보물이 많다던데, 어쩌면 대가로 그런 보물들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 말하면서 아이반은 힐끗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랜만에 퀘스트 창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경험치나 골드만 툭툭 던져주더니 이번에는 왠지 보상이 컸다. 익숙한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용의 뼈, 가죽의 등급 상승. 강철 모루에서 던전의 힘으로 부활한 화염 드래곤에게서 얻은 재료들이 더욱 실제 용의 것과 흡사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다.
한동안 조용하다가 갑자기 또 이렇게 직접 개입하는 것을 보면 이번 일이 범상치 않은 수준이거나, 앞으로 닥칠 일이 지금 수준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이 아닐까? 빌어먹을 시스템도, 망할 아스가르드의 신들도 자신을 어떤 방향으로 몰아가는지 알았기에 아이반은 그 호의가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받는 것이 많을수록 찝찝하기만 할 뿐이다.
아이반은 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떨떠름한 마음을 털어냈다. 그리고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시스템의 존재를 잊었다. 초월적인 존재에게 떠밀려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움직이는 것이라 되뇌었다.
“그래, 용의 둥지가 대체 어디에 있소?”
“정말 괜찮겠소? 이대로 가면 당신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데. 이건 계약에 들어있지 않은 일이오.”
“괜찮습니다. 이 땅을 위한 일인데 저도 한 손 거들어야죠. 그리고 카림을 생각해서라도 빠질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점쟁이 할멈이 직접 용의 둥지로 안내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주술사라 할지라도 그녀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때 아딜이 나섰다.
갑자기 모래폭풍이 마을을 덮친 것을 보고 또다시 용이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찾아온 것이다. 사정을 들은 그는 자신이 대신 안내하겠다고 했다.
아직 메마른 땅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자신의 길잡이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며 합류하기를 원했다. 순수하게 고향을 지키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용의 의뢰를 수행한 이후, 혹시 드래곤에게서 동생 카림을 치료할 수 있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 그도 점차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용의 둥지라면 무언가 방법이 있으리라. 그는 지푸라기를 쥐는 심정으로 그렇게 믿었다.
용의 둥지가 메마른 땅에 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이미 한 번 드래곤을 마주한 적이 있는 아딜이라면 길잡이로 제격이었다.
점쟁이 할멈은 그를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용의 둥지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아딜이 다시 합류했다.
“조금 길을 틀기는 했지만 원래 계획했던 것과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쪽으로 가다 보면 점쟁이 할멈이 말한 장소가 나올 겁니다.”
그러면서 아딜은 크게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부터는 길을 알아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이곳은 함부로 들어가면 방향을 잃고 영원히 사막을 떠돌게 된다는 소문이 가득한 곳입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것도 용의 둥지 때문이었던 모양이군요.”
아딜이 한참 주위를 둘러보다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일행이 보기에는 온통 모래밖에 없는 똑같은 풍경이었으나 그에게는 뭔가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껏 잘만 일행을 이끌고 다녔던 그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워졌다.
“길을 쉽게 잃는다면 결계인가? 혹시 알아볼 수 있겠소?”
아이반이 턱을 긁적이며 묻자 이레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딱히 이상한 점은 모르겠어. 결계가 천 년을 넘게 이어지며 자연에 동화되었다면 한눈에 알아볼 방법이 없어.”
“하긴, 대주술사가 목숨을 바쳐서 만들었다는 봉인인데 어설프지는 않겠지.”
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내리쬐는 햇볕만큼이나 짙은 그의 그림자에서 두 마리 까마귀 정령이 튀어나왔다. 후긴과 무닌. 세상을 두루 살피고 오딘에게 소식을 전해준다는 신화 속 까마귀와 같은 이름을 가진 녀석들이 힘차게 날아올랐다.
“무언가 변화가 있으면 알아차릴 수 있을 거요. 결계가 나의 감각을 속일 수는 있어도 까마귀들의 눈을 가릴 수는 없을 테니.”
그러면서 아이반은 날카로운 눈으로 땅을 바라보았다. 이 땅을 타고 흐르는 영맥의 흐름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대주술사의 봉인이 천 년이나 유지된 것은 영맥을 끌어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 그 흔적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영맥과 닿아있겠지. 시야를 가리는 모래언덕이 아니라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영맥을 따라 움직여야만 했다.
아딜이 대략적인 방향을 잡으면 아이반이 영맥을 추적했다. 한참을 쫓다 보니 밤이 되고 또 낮이 되었다.
나흘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야 용의 둥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영맥이 이쪽으로 이어지고 있소. 이곳에 용의 둥지가 있는 것이 분명하오.”
아이반이 그리 말하자 파라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여기 말인가? 온통 모래밖에 없는데?”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래밖에 없는 사막 한가운데. 지금껏 며칠이나 돌아다녔던 곳과 다를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아이반은 확신했다. 용의 둥지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이상하지 않았으나, 용의 둥지가 있다면 그 장소는 이곳일 수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겠지.”
아이반은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감에 잡히지는 않지만, 이 아래에 있으리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품에서 유리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보존처리가 된 피가 병 속에서 찰랑거렸다.
점쟁이 할멈이 직접 뽑아준 그녀의 피였다. 대주술사의 피와 주술의 맥을 잇고 있는 후손이 길을 열어줄 거다.
차르륵! 아이반이 바닥에 피를 뿌리고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니 사막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모래가 소용돌이치며 그들을 끌어당겼다.
“위험합니다!”
아딜이 소리쳤지만 아이반이 손을 들어 그를 진정시켰다.
“이게 숨겨진 용의 둥지로 가는 방법이오.”
물에도 사람이 뜨는데 모래라고 다를까. 원래는 모래 수렁이라고 해도 사람이 날뛰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어느 정도 빠지다가 멈추기 마련이다. 그러다 하반신이 완전히 파묻히면 빠져나오는 것이 무척이나 곤란하겠지만 더 밑으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일행을 모두 지하로 끌고 가는 모래 수렁의 규모 자체가 비상식적이었다.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란 소리다.
흐읍! 아이반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다물었다. 두 손으로 귀와 코를 막고 온몸을 내리누르는 모래의 압력이 사라질 때까지 견뎠다.
사방에서 조이는 모래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가 답답함을 느낄 때쯤 탁 트이는 감각과 함께 몸이 떨어져 내렸다. 탁! 꽤 높은 곳에서 떨어졌지만, 밑은 푹신하게 모래가 깔려있어서 충격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다쳤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일행 중 평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틈이 있었는지 신발 속에까지 가득 들어찬 모래를 털어내면서 주변을 살폈다.
커다란 공동, 높은 천장과 그를 들어 올리듯 솟은 원형의 기둥. 분명 지하임에도 은은하게 빛이 감돌았다. 마치 지하 신전과 같은 분위기였다.
“내가 생각했던 용의 둥지와는 느낌이 좀 다른데?”
파라스가 그리 중얼거리자 델피노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있는 기둥, 조각들. 무언가를 숭배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하지만 어디에도 용의 모습은 없습니다.”
“용을 위해 지어진 곳이 아니라 원래 있던 곳에 용을 봉인한 것일지도 모르지. 이곳은 천 년보다 더욱 오래되어 보여.”
이레인은 기둥에 새겨진 문양을 꼼꼼히 살피다가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어때, 뭔가 알겠어?”
아이반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양, 흡혈공 아키우스가 남긴 기록에서 본 적이 있소.”
흡혈공 아키우스를 쓰러뜨리고 얻은 기록물은 무척이나 많았다. 그 당시에 유행하던 통속적인 소설에서부터 신화나 역사, 또는 기타 학문에 관련된 전문 서적까지. 일부는 흡혈공 아키우스가 직접 작성한 것들이었고, 나머지는 자신의 서재를 꾸미기 위해 여기저기서 모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수백 년 전에도 책은 무척이나 귀했다. 서재에 많은 책을 전시해놓는 것은 지적 허영과 물적 과시를 동시에 충족시킬 방법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그 많은 자료를 눈이 빠지라 읽었던 아이반에게 이곳에 새겨진 문양은 제법 익숙한 것이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난쟁이와 관련된 이야기였기에 다른 것은 대충 넘겼으나, 분명 본 적이 있었다.
“이것이었나? 아니, 이거였던 것 같은데······.”
아이반은 인벤토리를 뒤져 아주 낡은 책을 꺼내 들었다. 오래된 양피지들을 하나로 묶어서 만든 것이었는데, 워낙 세월이 많이 흘러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느 한 부분에 멈춰 섰다.
“왕의 문양이오. 아주 오래전 이 땅에 강림한 신으로 모셔지던 왕의 상징.”
예로부터 왕과 신을 연결하거나, 심지어 동일시하는 일은 무척이나 흔했다. 이곳 역시 그러한 일의 일부인 셈이다.
“이곳은 왕의 무덤이나 왕궁, 그와 비슷한 무언가인 모양이군.”
그 말에 아딜이 낮은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곳이 사샨트 왕국의 유적지일 수도 있겠군요.”
“사샨트 왕국?”
“아주 오래전에 메마른 땅에 존재했다고 하는 옛 왕국입니다. 당시 사샨트 왕국의 왕이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얼마나 오래된 왕국이오?”
“글쎄요, 멸망한 것이 벌써 이천 년은 되었을 텐데······.”
너무 오래되어 기록도 제대로 남지 않은 곳이라 했다. 그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과 같은 역사라고. 역사학자라도 있었으면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정도로 지식이 깊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 대주술사는 멸망한 왕국의 유적을 이용해 용을 봉인한 셈이군요. 혹시 드래곤을 노리고 있는 적들이 멸망한 왕국과 연관이 있을까요?”
델피노의 물음에 이레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 수 없는 일이지. 이천 년 전에 멸망한 왕국이라니,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평소라면 그럴 리가 없다고 딱 잘라 말했겠지만 최근 대륙의 정세를 보면 확신할 수가 없었다. 온 사방에서 던전이 만들어지고 옛 존재가 나타나지 않았던가. 신화시대에나 존재하던 원시 거인도 튀어나오는 판에 이천 년 정도야 그리 오래지도 않았다.
“이곳도 본질적으로는 던전과 다를 바가 없는 곳이야. 아니, 이미 던전에 들어왔다고 해야겠지. 이천 년 전의 망령들이 덤벼든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