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23
쉬이익! 쿵! 커다란 모래 언덕이 몸을 일으켰다. 드래곤의 모습을 복사하듯 똑같이 변한 모래 드래곤이 입을 쩍 벌려 드래곤의 몸을 베어 물고 그 막대한 무게로 짓눌렀다.
“이거, 설마 드래곤이 지는 것 아닙니까?”
아딜의 물음에 아이반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소. 드래곤은 겨우 저 정도로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를 받았다는 왕의 위엄은 대단했다. 사막이 모두 그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드래곤을 쓰러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승부가 기울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방법이 없군. 이미 드래곤이 깨어났으니 의뢰는 실패한 셈이오.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그대의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일행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기척도 없이 가까이 다가온 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표정을 굳혔다. 낡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맨발의 여인. 천 년 전 대주술사의 육신에 봉인된 드래곤.
“당신은 이미 봉인이 풀린 것 아니오? 그런데 왜 이곳에 있소?”
“아직 봉인은 풀리지 않았다. 내 육신이 위험을 느끼고 깨어났을 뿐이로다.”
“뭐?”
“영혼을 잃은 육신이 그저 본능으로 날뛸 뿐이니 제어할 수가 없다. 내가 다시 육신으로 돌아가면 끝날 일이나, 이 몸에 갇혀있으니 당장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로다.”
드래곤의 영혼이 드래곤의 육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디 나를 막아라. 내가 이 땅을 파괴하기 전에.”
드래곤을 막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볍게 입에 올릴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본능만 남은 드래곤은 주변의 모든 위험을 제거할 때까지 날뛸 것이라 했다. 사막이 온통 불바다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부터 도망간다고 해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망할, 잠꼬대 한번 거하게 하시는군.”
아이반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리 말하자 드래곤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천 년이나 영혼 없이 방치된 몸이다. 다소 거칠게 반응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라.”
“하나 확인해야 할 것이 있소.”
“무엇인가?”
“설마 저 상태로 용언을 사용하지는 못하겠지?”
“그러하다. 용언은 육신의 힘이 아니니 걱정할 바가 아니다.”
“그러면 되었소. 다소 거칠어도 원망하지 마시오.”
아이반이 앞으로 나섰다. 델피노가 그 뒤를 따르고, 사나운 이빨이 검을 굳게 쥐었다. 이레인이 활시위를 당기며 최적의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파라스와 아딜, 피알라르가 나서려 했지만 아이반이 그들을 막았다. 냉정한 말이지만 그들의 실력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시오. 근처 마을로 달려가 위험을 알리는 것도 좋고.”
“아니, 자네들을 놔두고 어찌 도망을 간다는 말인가!”
“지키면서 싸울 상대가 아니오.”
그 말에 파라스와 피알라르, 아딜이 모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본인들이 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괴로운 모양이었다. 괜히 더 붙잡아봐야 의미 없이 시간만 흐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파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몸조심하게.”
“당연한 소리를. 괜찮은 술집이나 알아두시오. 한바탕 하고 나면 목이 마를 테니까.”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비상식량과 물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들은 그것을 챙기고 빠르게 이곳을 벗어났다.
아딜이 길을 인도한다고 하더라도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사막을 움직인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지하에 숨겨져 있던 사라진 왕국의 궁전이 떠오르고 방향감각을 흐리게 만들던 결계가 사라졌으니 마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으리라.
“이제 넷뿐이군. 드워프 병사들도, 브릭타와 갈라로자도 없소. 던전의 힘으로 부활한 드래곤도 아니지. 어때, 떨리오?”
아이반의 물음에 사나운 이빨이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며 웃었다.
“전사의 싸움이 나를 기다린다!”
델피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룬께서 지켜보시는데 어찌 두렵겠습니까?”
이레인이 자신의 손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차하면 신기를 쓰지, 뭐.”
던전에 묶여있던 녀석이기는 하지만 한 번 드래곤과 싸워봤다고 일행의 표정에 여유가 있었다. 하긴, 목숨 걸고 싸우는 짓이 어디 한두 번이었나.
“시작은 내가 하겠소.”
우웅- 인벤토리가 열리고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워프가 투창용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것이 여섯 자루. 아이반은 마력을 끌어올려 옛 노르드의 주문을 읊었다.
“게이를로드니르(Geirl?ðnir:창을 부르는 자).”
여섯 자루 창에 룬 문자가 새겨진다. 안 그래도 명품이었던 창이 더욱 날카로워지고 튼튼해졌다.
휘익! 아이반이 손짓하자 여섯 자루의 창이 일제히 쏘아졌다. 길게 마력을 내뿜으며 날아간 창이 드래곤의 등을 후려쳤다.
탕! 마력을 듬뿍 담아 날려 보낸 여섯 자루의 창은 튼튼한 용의 가죽을 뚫고 피를 뿌렸다. 그러나 깊이 박히지 못하고 곧바로 튕겨 나오는 것을 보니 큰 상처는 아닌 모양이다. 애초에 치명상은 기대도 하지 않은 아이반은 그대로 땅을 박차고 달렸다.
왕을 때려잡으려던 드래곤이 시선을 돌린 것만으로 충분했다. 치지직! 쾅! 하늘이 아니라 땅을 타고 번개가 흘렀다.
아이반이 사용하는 천둥걸음은 이미 새로운 경지에 도달해서 번개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푸른빛이 번뜩이는 것 같으면 아이반은 어느새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천둥을 발판으로 삼아 번개처럼 움직이는 기술, 속도는 곧 힘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만큼 그의 공격도 매서웠다.
쿵! 마력을 듬뿍 머금은 검이 마치 망치처럼 드래곤의 가슴을 후려쳤다. 드래곤은 잠깐 뒤로 밀려났다가 앞발을 휘둘렀다.
아이반이 빠르게 방패를 꺼내 막았으나, 용의 발톱은 방패를 마치 종잇장처럼 가볍게 찢고 아이반의 가슴을 노렸다. 그 짧은 틈에 방패를 버리고 뒤로 튕겨 나가지 않았으면 그대로 몸이 갈라졌으리라.
모래 병사 사이에 처박힌 아이반은 자신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그들을 후려쳐 부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제사장을 공격한 무뢰한이 아닌가? 비천한 자여, 어찌하여 나의 싸움에 끼어드는가?
“당신이 깨운 드래곤을 막기 위해.”
– 용은 나의 것이다! 내가 직접 징벌하여 그 심장을 삼키겠노라! 덤벼드는 모래를 박차고 날아오른 아이반이 욕설을 내뱉었다.
“무지한 백성을 현혹해서 신이라 숭배를 받더니 간이 부었군! 드래곤은 당신이 감당할만한 존재가 아니야!”
– 이곳은 나의 땅, 나의 성지, 나의 신전이다! 어찌 드래곤 하나를 감당하지 못한단 말이냐! 모래언덕이 꿈틀거리다 새로운 모습이 되었다. 검을 들고 있는 거대한 사막의 전사. 모래로 만들어진 녀석 같지 않게 유려한 검술을 뽐내며 움직였다.
부웅-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모래 칼. 아이반은 마력으로 발판을 만들어내 그것을 밟고 공중에서 몸을 틀었다. 그리고 피의 검 브리카를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어리석은 왕이 사막을 불태우는구나!”
우웅- 피의 검 브리카에 신력이 깃든다. 프레이가 귀찮다는 듯 던져주었던 그의 무기, 스스로 움직여 거인을 베는 검이 피의 검 브리카에 덧씌워졌다.
거인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신검의 힘은 상대가 크면 클수록 강해졌다. 신이나 다름없다는 원시 거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정도인데 이깟 모래로 만들어진 거인이야 어렵지도 않았다.
스걱! 거대한 모래 거인의 몸이 반으로 잘려서 무너져 내렸다. 사라진 옛 왕국, 사샨트의 왕이 또다시 새로운 모래 거인을 만들어내려고 했으나, 그사이 이레인의 화살이 그를 꿰뚫었다.
푸슉! 사샨트 왕의 몸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렸다가 슬금슬금 모래가 밀려와 그것을 메웠다.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는 크게 분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 오랜 세월이 흘러 무도한 자가 날뛰는구나! 짐의 영토에 너희 같은 불한당은 필요없······. 쾅! 모래 병사들의 방해를 뚫고 드래곤이 발톱을 내리찍었다. 사샨트 왕의 몸을 휘감고 모래로 된 방어막이 만들어졌으나, 용의 발톱은 수월하게 찢어발겼다.
온갖 황금으로 치장한 사샨트 왕의 몸이 그대로 조각나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사이 사나운 이빨이 드래곤의 등에 올라타 검을 박아 넣었다.
치이익! 용의 피는 너무나 짙은 마력으로 이루어져 지독한 독성을 품고 있었다. 모래를 녹이고, 검을 부식시키고, 갑옷을 상하게 했지만 이미 한 번 용의 피에 듬뿍 적셔졌던 사나운 이빨의 육신을 녹일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의 가슴에 박혀있는 용의 심장이 드래곤의 피를 만나 더욱 활발하게 마력을 토해냈다.
“흐, 본능만 남은 용은 짐승이나 다름없다!”
사나운 이빨이 그리 외치며 칼을 더 깊이 쑤셔 넣었지만, 아이반은 오히려 그에게 물러나라 소리쳤다.
“뛰어내리시오!”
사나운 이빨이 기척을 느끼고 몸을 굴러서 드래곤의 등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바람의 칼날이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등이 갈라지는 것은 사나운 이빨이 되었으리라.
“저 마법은 뭐야! 영혼이 없는데 어떻게 마법을 쓰고 있는 거야!”
이레인이 경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여기저기 마력이 뭉쳐서 마법이 발현되려는 것을 화살로 꿰뚫어 흩어버리느라 그녀의 이마에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에게 마법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니라. 저 정도는 본능만 남아도 어렵지 않구나.”
대주술사의 몸에 봉인된 드래곤의 영혼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대꾸했다. 남은 바쁘게 싸우고 있는데 홀로 여유로운 모습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젠장! 그렇게 있지만 말고 뭐라도 해보시오! 당신 몸이 아니오!”
“이래 보여도 나도 노력 중이니라. 나의 육신이 하늘을 날거나 숨결을 토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로다.”
“망할, 그래서 그게 다요?”
“최대한 마력을 억눌러 보겠다. 그때까지 내 육신을 붙잡아 놓아라.”
투두두두! 바닥에서 뾰족한 돌기둥이 솟아오르고 하늘에서는 날카로운 얼음 화살이 떨어진다. 이것들이 정말 영혼과 의식이 없이 그저 몸에 새겨진 본능만으로 가능한 현상인가? 영혼도 없이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화아악! 어두운 밤하늘을 뚫고 신성한 태양이 떠올랐다. 델피노가 피로 신성한 문자를 새기고 빛의 신 아룬에게 기도하여 만들어진 신성력의 태양. 쏟아지던 얼음 화살이 녹아내리고 솟구치던 칼날 바위가 흩어진다.
성지 선포. 외력을 막고 신력을 가득 채우는 최고위 신성 마법. 그러나 델피노 혼자서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입가에 피가 흘러나오고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생명의 구슬에서 최대한 힘을 끌어내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가 무너지기 전에 승부를 봐야만 했다.
탁! 아이반이 손을 뻗자 허공을 날아다니던 피의 검 브리카가 날아와 잡혔다. 프레이의 검을 강림시켰으니 보통은 내부가 텅 비어서 한동안 쓰지 못할 법도 한데, 피 웅덩이에 저장된 힘을 끌어 썼기 때문인지 아직 멀쩡했다.
이 정도라면 한 번쯤 더 소환해도 상관없겠지. 우웅- 피의 검 브리카가 격하게 요동치며 새로운 검이 덧씌워졌다. 영웅 시구르드의 검, 그람. 한때 용을 베었던 분노의 마검이 다시금 휘둘러졌다.
드래곤의 질긴 가죽을 가르고 강철보다 단단한 뼈를 끊······. – 나의 성지에 어떤 자가 침범하느냐! 어느새 회복을 마친 사샨트의 왕이 소리치자 성지가 흔들렸다. 밝고 신성하던 태양이 붉은색으로 물들고 음침하고 어두운 마력을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