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27
대륙이 엉망으로 변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무력의 가치가 무척이나 높아진 시기, 당연히 드워프가 만들어내는 질 좋은 장비를 원하는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았다.
가장 많은 물량을 찍어내서 판매하던 강철 모루가 문을 닫았으니 다른 드워프 왕국이 바빠질 수도 있지. 그러나 청동 망치라면 몰라도 은빛 용광로는 아니었다. 원래 이곳은 외부에 판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가끔 적은 물량을 내놓을 뿐 강철 모루처럼 대량으로 판매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무슨 일일까? 치익- 보통 드워프는 땅딸막한 몸에 근육이 옹골차게 들어차 단단한 느낌을 주었지만 어째 그 남자는 홀쭉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특별히 체격이 왜소한 것이 아님에도 살이 쪽 빠져있어서 비실비실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가 앞에 다가와 입을 열자 그런 느낌은 완전히 사라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안색이 좋지 않고 무척이나 피곤한 모습이었으나, 눈빛이 워낙 강렬하고 목소리에 힘이 가득해서 외형을 잊을 정도였다.
“그대들이 이번에 들어온 손님인가? 파라스가 데려왔다는?”
피곤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러하기 때문인지 드워프의 말투는 다소 딱딱했다. 그러나 그가 등장하자 파라스의 허리가 풀어져 그대로 꾸벅 숙였다.
“아니, 첫 번째 망치께서 이곳에는 어떻게···?”
“나의 땅에 내가 있는 것이 이상한가? 쯧, 괜히 예의 차리는 척하지 말고 허리나 펴라. 젊은 녀석이 구부정하게 등이 굽어서는.”
파라스는 꽤 장수하는 드워프의 기준으로도 사실 마냥 젊은 나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를 어린아이 취급하다니. 아이반은 그가 누군지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이렇게 뜬금없이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레인 역시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는 결례라는 것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앙그소두린!”
고대 드워프식 발음으로는 흐앙크-쓰오두린. 뜻은 위대한 소두린. 신화시대가 끝나자마자 태어나 엘프는 물론이고 웬만한 드래곤보다도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은빛 용광로의 왕이자 영웅이었다. 그 이름은 인간의 전설은 물론이고 요정의 옛이야기에서도 새겨져 있었다.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물의 등장인 셈이다.
“앙그소두린이라, 이제 나를 그리 부르는 자가 많지는 않는데······. 출신이 어떻게 되는가? 어린 엘프야.”
“···팔라시온의 이레인이라고 합니다.”
“팔라시온? 일곱 요정의 후예가 숲을 떠나있다니 놀랍구나. 하긴,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그럴 수밖에.”
터덜터덜 걸어온 소두린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가 갑자기 찾아올 줄은 전혀 몰랐기에 아이반의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해졌다. 대체 무슨 의도로 찾아왔다는 말인가.
“별것 아니니까 그리 고민할 것 없다, 인간아. 아니, 인간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소두린이 독한 술을 콸콸 따르더니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한 모금에 불과한데도 짙은 술 냄새가 널리 퍼졌다.
“그대들이 강철 모루에서 활약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리하여 그대들에게 하나 부탁하고자 하니, 들어주겠는가?”
은빛 용광로의 첫 번째 망치, 소두린의 부탁이라니. 아이반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무슨 부탁이오?”
그의 말투에 뒤에 있던 드워프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지만 정작 소두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돌 하나만 가져와 주게. 공들이고 있던 녀석인데 웬 괴물 놈이 터를 잡았어.”
“우리도 갈 길이 먼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은 할 수 없소. 이미 예정보다 많이 지체되었······.”
까딱까딱 목을 풀던 소두린이 덧붙였다.
“그리하면 가지고 있던 아다만트를 조금 내어주지.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론 양이 좀 부족하지 않은가?”
아이반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으니 빨리 출발해야겠군. 어디로 가면 되오?”
목적지는 은빛 용광로에서 며칠쯤 걸어가면 나오는 계곡이었다. 거기서 괴물을 물리치고 문스톤을 가져오면 된다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아. 도대체 첫 번째 망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 거지?”
일행이 떠나기 직전, 파라스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와 피알라르는 은빛 용광로에 남아 아다만트를 제련하고 장비를 제작하기로 했는데, 일행을 떠나보내려고 하니 영 찝찝한 모양이었다.
“무슨 괴물이 자리를 잡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어떤 놈이든 은빛 용광로가 감당하지 못할 리가 없어. 귀한 아다만트를 내주면서까지 자네에게 의뢰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이지.”
그것만이라면 모를까 소두린이 직접 찾아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그리 가볍게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파라스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다.
“어떻게 보면 시험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호의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겠지.”
“호의? 첫 번째 망치께서 호의를 베풀 이유가 무엇인가?”
아이반은 의자에 앉아 갑옷의 조임쇠를 가다듬으면서 덤덤하게 대답했다.
“소두린은 암흑의 시대를 몇 번이나 건너온 자가 아니오? 무언가 느끼는 것이 있겠지.”
앙그소두린, 위대한 소두린은 대륙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였다. 선주종족이나 신격 같은 예외를 제외한다면 그보다 나이가 많은 자는 아주 오래된 용들을 제외하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초월성을 잃어버린 초월자였고, 한때는 드워프의 종족신이 될 수도 있었던 위대한 영웅이었다. 그 오래되고 깊은 지혜 속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소두린의 생명이 끝나가오. 강철의 영웅은 자신이 죽은 다음을 대비하고 있는 거요.”
아이반이 대뜸 폭탄 발언을 내뱉자 파라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경악 어린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들으신 그대로.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오.”
드워프들 사이에서는 거의 반신으로 추앙받는 것이 소두린이었다. 대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소두린의 죽음이라니. 파라스는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빼액 소리쳤다.
“헛소리하지 말게!”
화가 난 듯 그리 소리치는 파라스의 얼굴이 우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외쳤지만, 그도 느꼈기 때문이다. 아이반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파라스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이레인이 대신 물었다.
“앙그소두린의 생명이 끝나간다니,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이야?”
“대지의 방패 팔그로인을 다시 만든다고 하지 않소? 그게 바로 증거지.”
대지가 스스로 빚었다는 드워프의 삼신기, 그게 부서졌다고 뚝딱뚝딱 고칠 수 있는 물건이었으면 애초에 삼신기라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미 몇 번을 시도했음에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저 미루고 미루던 것을 지금에서 다시 시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소두린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팔그로인이 있었기 때문이오. 모든 것을 막아낸다는 최강의 방패가 시간마저 끊어서 세월의 흐름을 막았기 때문이지.”
소두린은 팔그로인의 주인이었다. 대지의 방패가 가진 힘으로 영생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으나 이제 그것도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러면 앙그소두린이 팔그로인을 다시 고쳐서 생명 연장을 노린다는 말이야?”
“내가 그의 생각을 어찌 알겠소?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군. 그러기에 소두린은 너무나 지쳤소.”
다시 그 짐을 짊어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누군가에게 얼른 넘겨주고 싶지 않을까. 아이반은 내뱉지 못한 말을 입안에서 굴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답잖은 일이지만, 보상이 탐나니 어쩔 수 없군. 잠깐 맞춰줄 수밖에.”
탁탁! 신발을 조여 맨 아이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제대로 길들이지 못한 피의 검 브리카 대신 다른 검을 허리춤에 차고 말했다.
“금방 다녀올 테니 일을 하고 계시오. 열심히 망치질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도착해있을 것이니.”
그렇게 파라스와 피알라르를 남겨두고 아이반과 델피노, 이레인과 사나운 이빨이 길을 나섰다. 목적지인 달빛이 비추는 계곡까지는 길이 제대로 닦여있지 않아서 마차를 타고 갈 수는 없었지만, 다들 걷는 것에는 이골이 났다. 겨우 며칠 거리 정도는 산을 탄다고 해서 힘들어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온통 푸석푸석한 모래밖에 없던 메마른 땅과 달리 이곳은 푸른 나무가 가득해서 제법 걸을 맛이 났다. 그렇게 몇 개쯤 산을 넘어서 소두린이 말한 계곡이 가까워지자 긴장감이 절로 높아졌다. 이상하게 음산한 것이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짐승의 누린내가 난다. 하지만 처음 맡아보는 향이다. 늑대 같기도 하고······.”
아직 계곡이 보이지도 않았음에도 사나운 이빨이 그리 경고했다. 뛰어난 전사이자 뛰어난 사냥꾼인 그가 느끼기에 이미 괴물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흑마력의 흔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썩 밝지도 않는군요. 어떤 괴물일까요?”
“정령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니 사령계열은 확실히 아니야. 그러면 크게 걱정할 것도 없겠네.”
델피노와 이레인이 나름의 방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아이반 역시 정령을 소환했다. 게리와 프레키, 두 마리 늑대 정령과 후긴과 무닌, 두 마리 까마귀 정령. 푸드득! 그의 그림자에서부터 날아오른 까마귀 정령이 하늘에서부터 살피고 늑대 정령이 코를 벌렁거리며 주변을 뛰어다녔다. 주변에 가득한 정보가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아이반이 어느 나무 앞으로 가서 일행을 불러 모았다. 날카로운 발톱이 긁고 지나간 모습, 풀을 헤집고 바닥에 새겨진 커다란 발자국.
“늑대 발자국 같은데, 더럽게 크군. 이렇게나 덩치가 커다란 놈이 있을 수가 있나?”
“마수일지도 모르겠네. 평범한 짐승은 확실히 아니야.”
“마수라면 자연발생? 아니면 누군가의 수작?”
“젠장, 적이 무엇인지라도 알려줄 것이지. 굳이 귀찮게 하는군.”
아이반이 불만스럽게 욕설을 내뱉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을 포함해서 소두린의 시험인 셈이니까. 사실 그렇기에 아이반은 이것이 단순히 힘을 쓰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지금껏 무슨 일을 했는지 안다면 평범하게 괴물 몇 마리를 때려죽이고 돌을 가져오는 것이 전부일 리가 없으니까. 까놓고 말해서 드래곤이랑 드잡이질을 하던 그들이 어려워할 괴물이 얼마나 되겠나? 웬만큼 강하다고 해봐야 순식간에 깍둑썰기로 해치워버릴 텐데. ‘아다만트만 아니면 그냥 집어치우라고 소리쳤을 텐데······.’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 흔적이 더욱 많이 보였다. 이리저리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으나 아이반과 사나운 이빨은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무리를 짓고 있다.”
“여러 번 반복해서 흔적이 남았소. 돌아가며 순찰이라도 하는 모양이오. 똑똑한 녀석들이군.”
한참 흔적을 살피고 있으니 하늘을 날고 있던 후긴과 무닌에게서 신호가 왔다. 무언가 그들을 노리고 달려오고 있다는 뜻이다.
“늑대. 더럽게 덩치가 큰 놈들이오.”
챙! 아이반이 검을 뽑아 들었다. 두렵지는 않았다. 겨우 늑대 몇 마리로 두려워하기에는 그동안 경험한 적들이 너무 대단했다. 쉬이익! 그대로 덤벼드는 기척을 향해 검을 휘두르던 아이반이 슬쩍 눈을 가늘게 뜨고는 검을 비틀었다. 날이 아니라 면으로 녀석을 후려치고 일행에게 소리쳤다.
“죽이지 마시오! 생포해야겠소!”
그 말을 들은 사나운 이빨은 검을 휘두르는 대신 한 손으로 늑대의 목덜미를 붙잡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쿵! 웬만한 황소만 한 크기의 늑대가 컹 소리를 내면서 몸을 비틀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사나운 이빨의 몸을 긁고 지나갔지만 거의 용의 가죽과 비슷해진 사나운 이빨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는 없었다. 쾅! 사나운 이빨은 검을 땅에 박아서 세워놓고는 맨손으로 늑대의 머리를 후려쳤다. 녀석이 입을 쩍 벌리고 어떻게든 그를 씹어 삼키려 했으나, 사나운 이빨은 아무렇지 않게 주먹으로 녀석을 쓰다듬었다. 사나운 이빨이 마음껏 귀여워 해주자 늑대가 피거품을 물고 그대로 뻗었다. 날카롭던 이빨이 몇 개나 부러지고 앞발 두 개가 모두 꺾여있었다.
“평범한 놈들이 아니다. 회복 속도가 무척이나 빠르다!”
부러진 앞발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오고, 부러진 이빨마저 재생된다. 사나운 이빨이 나름 힘 조절을 했다고는 해도, 원래라면 아예 뼈와 살이 분리되었을 것이 멀쩡하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컹컹! 기절했던 녀석이 다시 기운이 되살아나 소리를 질러댔다. 사나운 이빨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녀석을 바라보자 그제야 몸이 뻣뻣해지며 조용해졌다. 석화의 마안으로 죽지 않을 만큼만 몸을 굳게 만든 것이다. 그 사이 아이반은 나무를 만들어내 늑대를 붙잡았고, 이레인은 정령으로 녀석을 완전히 억눌렀다. 보이지 않는 힘에 붙잡혀 입조차 열지 못함에도 눈에 핏줄이 설만큼 발악하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던 이레인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들, 늑대인간이지? 라이칸스로프.”
“그렇소. 수인과는 다른, 저주받은 밤의 종자지.”
하지만 아이반은 그리 말하면서도 녀석들의 목을 베지 않았다. 적에게는 자비심이 없는 그답지 않은 행동. 델피노가 그것을 눈치채고 얼른 물었다.
“이들에게 무언가 있습니까?”
“고민 중이오. 어떻게 처리해야만 하는지.”
가장 쉬운 길은 그냥 다 죽여 버리고 돌을 가져가는 거다. 그리고 약속했던 보상을 챙기면 그것으로 끝. 더 어려운 것이 없이 아주 깔끔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가장 어려운 길이 가장 보상이 좋았다. 그리하여 고민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바디 비트니스(Vaði vitnis:늑대의 적수).”
아이반이 옛 노르드 주문을 외우며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완전히 광기에 물들어 날뛰던 녀석들의 눈에 힘이 빠지며 순식간에 툭 쓰러졌다. 아이반이 녀석들의 힘을 빼앗고 기절시킨 것이다.
“이들은 달의 여신에게 저주를 받았소. 이성을 빼앗기고 광기에 물들었지.”
“달의 여신에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주를 받았다는 말입니까?”
“숭배하던 마음을 잊고 달의 주인이 되려 했소. 신앙을 잃고 하극상을 벌이려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