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28
그리하여 짐승의 모습이 되어 본능에 사로잡힌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달의 마력에 취해 영원히 광기에 물들어서.
“이것이 신벌이라면 우리가 개입해도 되는 일입니까? 하물며 그것이 신을 우습게 알고 더럽히려던 자들이라면······.”
델피노가 우려의 목소리를 내뱉었다. 신을 모시는 자이기에 신벌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괜히 잘못 개입했다가는 신의 분노가 일행에게 미칠 수가 있었다. 정말로 불쌍한 자들이라면 모르되,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는 자들이라면 개입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고민 중이라는 것이오.”
종족 전체가 신벌을 받을 만큼의 죄업을 얻었으나, 또한 그만큼 여신과 가까운 자들이었다. 죄를 털고 나온다면 가장 신실한 아군이 될 것이요, 죄업에 짓눌려 어둠에 물든다면 가장 위험한 적이 될 것이다. 아이반은 이들이 얼마나 명예로운 행동을 하였는지 알았고, 이들이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지도 알았다. 과연 자신의 선택으로 이들의 미래가 바뀔 수 있을까? 이들의 성향이 바뀔 수 있을까? 그것이 고민스러웠다.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하라는 말인가. ‘소두린이 원하는 것이 대체 뭐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늙은 드워프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이반이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길고 긴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우우우- 멀리서 울려 퍼지는 늑대의 울음소리에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의 존재가 알려졌음이 분명했다.
“그놈 목소리 한번 우렁차군.”
언어학 스킬이 늑대의 울음소리마저 해석해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뜻이야 뻔하지. 덤벼들거나 물러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가. 아이반은 쓰러져있는 라이칸스로프들을 바라보다가 목숨을 끊지 않고 지나쳤다. 결국 어려운 길로 가려는 것이다. 낯선 선택은 아니었다. 항상 가장 어려운 길에서 답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계곡의 중심부에 이들이 모여 있을 거요. 일단 그곳으로 가봅시다.”
아이반의 결정에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반의 선택을 존중했다. 사나운 이빨이 커다란 검을 집어넣고 이레인은 활을 내려놓았다. 자칫 상대를 죽일 수가 있으니 아예 무기를 치운 것이다. 다소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흔들림이 없었다. 본능만 남은 라이칸스로프가 아무리 많아도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컹컹! 게리과 프레키가 낮게 짖으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사방에 날카로운 시선이 가득하다는 것을 녀석들은 알고 있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후긴과 무닌의 시야를 통해 라이칸스로프들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아이반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바로 덤벼들지 않고 주변만 맴돈다고? 생각보다 신중하군. 광기의 저주에 걸렸으면 금방 덤벼들 법도 한데.’ 원래 늑대가 똑똑하기는 했다. 그래도 저주받아 이성이 빼앗긴 자들치고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이성이 남아있나?’ 그런 것 치고는 처음에 덤벼들었던 놈들의 눈깔이 정상이 아니었다. 이건 무리의 우두머리가 장악력이 좋다고 봐야 했다. 한동안 묘한 긴장감 속에서 걸었다. 다른 짐승이나 몬스터들이 라이칸스로프 무리에 밀려서 사라졌기에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계곡이 눈에 보일 정도까지 가까워지자 주변을 맴돌고 있던 라이칸스로프에게서 흉포한 살기가 점점 짙어졌다. 가다듬어지지 않은 짐승의 살기. 하나하나가 마수나 다름없는 놈들이라 그 압박감이 만만치 않았지만, 일행 중 누구도 움츠러드는 자가 없었다. 드래곤이 내뿜는 살기 속에서도 무기를 휘둘렀는데 겨우 이 정도로 몸이 굳는다면 그동안의 경험이 너무나 허무한 일이다. 탁! 보이지 않는 어느 경계, 아이반이 그것을 넘어 한 걸음을 내딛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라이칸스로프들이 한 번에 덤벼들었다. 타닷! 웬만한 황소만 한 놈들이 땅을 박차고 날아오는 기세가 상당히 강력했다. 커다란 덩치를 가졌음에도 늑대 특유의 탄력적인 움직임이 있어 참으로 재빨랐다. 바람처럼 다가와 이빨을 들이미는 녀석을 바라보던 아이반이 두 손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허리를 반 바퀴 돌리면서 한 발 앞으로. 유연한 허리의 움직임과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녀석의 이빨과 발톱을 피한 아이반이 벼락같이 옆구리를 후려쳤다. 크엑! 켕! 주먹 너머로 녀석의 갈비뼈가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앞선 경험으로 웬만한 상처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터프한 놈들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아이반은 망설이지 않고 추가 타를 날렸다. 아무렇게나 자란 녀석의 털가죽을 붙잡고 바닥에 처박은 후 발로 후려쳐 날렸다. 그리고 뒤를 노리고 있는 다른 녀석의 머리를 팔꿈치로 내려찍고 무릎으로 차올렸다. 한껏 자세를 낮춘 라이칸스로프 하나가 입을 쩍 벌리고 아이반의 발목을 씹으려 했다. 그러나 아이반이 손을 흔들자 바닥에서부터 돌기둥이 솟아나 녀석의 아랫배를 찔렀다. 끝이 뭉툭해서 가죽을 뚫지 못했으나, 그것 역시 아이반의 의도였다. 낮게 깔려오던 녀석이 펄쩍 뛰어오르자 주먹질을 하기 한결 편했다. 사나운 이빨도 부지런히 놈들을 때려눕히고 있었다. 그가 꼬리로 후려치면 터프한 라이칸스로프도 깨갱 신음을 흘리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커다란 주먹이 움직일 때마다 하나씩 바닥에 쓰러졌다. 델피노의 방어막은 너무나 단단해 라이칸스로프의 이빨이 박혀 들지 않았고, 활을 내려놓은 이레인의 주위엔 정령들이 꺄르르 웃으면서 늑대를 저 멀리 집어 던지고 있었다. 라이칸스로프의 수가 제법 많았지만, 그 정도로는 일행의 걸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이반이 방패를 꺼내 들고 밀어붙이니 앞을 막고 있던 놈들이 몇이나 튕겨 나갔다. 이미 아이반의 육신은 초인의 영역에 올랐다. 그의 실드 차지는 말을 탄 기사보다도 묵직했다. 덤벼든 라이칸스로프의 절반이 바닥을 뒹굴었다. 뛰어난 회복력 덕분에 멀쩡해졌지만 한 번쯤은 모두 뼈가 부러지거나 가죽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본능이 강한 자들이니 불리하다는 것을 진작 느꼈을 텐데도 여전히 놈들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하고, 흉포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아니면 적을 앞에 두고 눈이 돌아가 버렸든지.
“짐승도 이 정도면 도망갈 텐데, 역시 이성이 없는 자들이라 소용이 없나. 다 때려눕혀야만 길이 열리겠군.”
아이반이 그리 중얼거리자 사나운 이빨이 더운 콧김을 내뿜으며 소리쳤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그가 강하게 발을 구르고 주먹을 휘두르려는데, 갑자기 라이칸스로프들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앞으로 달려들기만 할 뿐 물러섬을 모를 것 같았는데 살기를 억누르고 거리를 벌리는 모습에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야 나오셨군.”
황소만 한 늑대들이 양옆으로 갈라지고 어느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다소 안색이 좋지는 않았지만, 온몸에 근육이 빼곡하게 들어찬 자였다. 상처가 가득한 몸에 이름 모를 가죽을 대충 둘러쓴 것이 참으로 야성적이었다. 늑대의 모습을 하지는 않았으나, 이곳에서 가장 늑대 같은 자였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그리 경고를 했건만, 기어이 나의 형제들을 때려눕히고 다가왔군. 혹시 알아듣지 못했단 말인가?”
“다짜고짜 이빨을 들이미는 것이 경고의 방식이라면 알아듣고 싶지 않소. 저주받은 자들이라 짐승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나 보지?”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군?”
“뭐 그리 대단한 비밀이라고.”
아이반이 남자와 대화를 하고 있으니 사나운 이빨과 이레인이 슬그머니 무기를 꺼내 들었다. 상대가 만만치 않은 실력자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저 덩치 크고 힘 좋은 짐승 같던 라이칸스로프들과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아니, 저것이 라이칸스로프의 원래 모습이었다. “형제의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은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더 가까이 오는 것은 원치 않으니, 이만 물러가라.”
“그럴 수 없소. 우리는 은빛 용광로의 첫 번째 망치, 소두린의 의뢰를 받아 이곳에 있는 문스톤을 가져가려고 왔으니.”
그 말에 남자는 깊은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줄 수가 없다.”
“어째서? 그게 당신들의 것은 아닐 텐데.”
“···그것을 가져가려 한다면 싸울 수밖에 없다. 그냥 물러나길 바란다.”
그 말에 아이반은 코웃음을 흘리면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여신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고 저주가 풀릴 줄 아시오? 헛된 희망이요.”
공격적인 아이반의 말에 남자가 사나운 얼굴로 노려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늑대들이 일제히 으르렁거리며 살기를 피워 올렸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외부인이 우리의 사정을 어찌 안다는 말이냐!”
“모를 건 또 뭐요? 당신들이 개지랄하다가 저주받았다는 사실은 알만한 자들은 모두 아는데.”
“뭣이···!”
“닥치고 길이나 여시오. 내가 어쩌면 당신 종족의 은인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 말에 금방이라도 덤벼들려던 남자가 움찔하고는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 엿 같은 저주에서 벗어날 방법. 그걸 내가 알려주겠다는 말이오.”
궁금하면 길을 열고, 아니라면 덤벼라. 나는 두렵지 않으니 어떤 선택을 하든 받아들이겠다. 아이반이 삐딱한 자세로 툭 말을 내뱉었다.
“어쩌시겠소?”
한참을 고민하던 남자가 입술을 깨물더니 길을 열었다. 저주에서 벗어날 방법이라니, 그것이 헛소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만큼 라이칸스로프에게는 간절한 일이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당연한 소리를.”
남자는 일행을 계곡으로 데려와 쉴 자리를 내주었다. 당연히 손님이 머물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있을 리가 없었고, 그저 적당한 크기의 굴을 하나 가리켰을 뿐이다.
“저곳에서 쉬어라. 때가 되면 그대들을 부르겠다.”
“적당히 쉬고 나면 찾아가겠소.”
남자가 떠나고, 그 자리를 다른 라이칸스로프들이 채웠다. 커다란 덩치의 늑대들이 배를 깔고 이쪽을 힐끔 보는 것이 감시라도 하는 모양이다. 물론 아이반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싸우느라 제대로 식사도 못 했군. 밥이나 먹읍시다. 저들이 바로 덤벼들지는 않을 테니.”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식자재를 꺼내 늘어놓았다. 이레인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면서도 바깥을 흘깃 살폈다.
“저 남자는 뭐지? 이성을 빼앗기는 저주를 받았음에도 어째서 멀쩡한 거야? 이곳에 있는 다른 라이칸스로프들도 모습만 늑대일 뿐 생각보다 멀쩡한 것 같고. 내가 아는 라이칸스로프와 다른데.”
냄비에 고기를 숭덩숭덩 썰어 넣던 아이반이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문스톤 때문이오. 드워프가 달빛의 정기를 받기 위해 이곳에 두었다는 돌.”
문스톤 자체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귀한 보석이기는 했지만, 존재 자체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문스톤은 이름 그대로 달을 닮았기에 달의 정기를 받기 가장 좋은 보석이었다. 은빛 용광로는 이렇게 달의 정기를 받은 문스톤을 마법적으로 가공하여 사용하고는 했다.
“문스톤에 담긴 달의 정기는 달의 여신이 가진 힘과 무척이나 성질이 비슷하오. 그래서 라이칸스로프의 저주를 일시적으로 약하게 만들 수 있는 모양이지.”
그런 이유로 라이칸스로프는 달의 정기가 강한 곳을 찾아서 대륙을 돌아다녔다. 더는 그들을 비추지 않는 달의 여신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고, 잃어버린 이성을 조금이라도 되찾기 위해.
“소두린이 직접 챙길 정도의 물건이오. 문스톤에 담긴 달의 정기가 어마어마하겠지. 이곳이라면 라이칸스로프도 한 달의 절반 정도는 제정신으로 돌아올지도 모르겠소.”
그러니 라이칸스로프가 문스톤을 쉽게 포기할 리가 없었다. 결국 다 때려눕히고 가져가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했고. 그러나 이미 다른 선택을 했으니 그 방법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앞으로 할 것만 생각하면 된다. 어느덧 완성된 스튜를 한 스푼 입에 집어넣으면서 델피노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달의 여신이 내린 저주입니다. 해주를 하려면 쉽지 않을 텐데······.”
신이 내려주는 성흔과는 달랐다. 받는 입장이야 어쨌든 성흔은 신의 선물 같은 거고, 저주는 벌이었다. 성흔을 지우는 건 신이 딱히 뭐라 하지 않겠지만 저주를 지우는 것은 신의 심기를 건드릴 수가 있었다.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저주를 내린 사람이 거두는 것이 가장 깔끔하지. 그러니 일단 달의 여신을 불러야겠소.”
그 말에 델피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신을 부른단 말입니까?”
자신이 모시는 신을 애타게 찾아도 그 목소리 한 번 들어보기 힘든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본인이 모시는 신도 아닌데 부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곳이라면 가능하오. 라이칸스로프는 어쨌든 달의 여신에게 가장 가까운 자들이니 몇 가지 조건이 갖춰진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
조금 귀찮기는 하겠지만. 아이반은 뒷말을 삼키면서 접시를 벅벅 긁었다.
달이 떠오르고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일행이 식사를 마치자마자 남자가 다시 찾아왔다. 그는 이전에 보였던 흥분을 가라앉히고, 적어도 겉으로는 몹시 차분한 기색이었다.
“편히 쉬었는가?”
그의 목소리에서도 동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기대가 강하면 실망도 강하기에 억지로 멀쩡한 척하고 있을 뿐이겠지. 일행이 식사를 마치자마자 달려온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럭저럭. 보는 눈이 많은데 우리끼리만 식사하려니 영 입맛이 없더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직 우리는 그대들을 신뢰할 수가 없다.”
“이해하오. 하지만 이제는 그 태도도 바꿔야 할 거요.”
아이반은 힐끗 달을 바라보았다. 거의 보름달에 가까웠다. 달의 마력이 가장 강해지는 시기란 소리다.
“먼저 말하는 것이지만, 내가 저주를 단번에 없앨 수는 없소. 그건 달의 여신이 내린 벌이니까. 괜히 심기만 건드릴 뿐이오. 어쩌면 다시 저주가 내릴지도 모르고.”
“···알고 있다. 우리의 죄가 그리 쉽게 용서받지 못하리란 것쯤은.”
“나는 달의 여신을 불러서 길을 만들어줄 뿐이오.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당신들의 몫이지.”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분을 부른다는 말인가? 우리가 그토록 오랜 세월 그분을 부르짖었음에도 대답하지 않으셨거늘!”
“대답할 수 없었던 거요. 당신들의 죄 때문에.”
그 말에 남자는 깊은 회한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가? 우리의 죄는 그토록 깊었던가?”
라이칸스로프는 한때 힘에 취해서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다. 여신의 살을 뜯고, 피를 마셔서 신성을 획득하려고 했다. 그건 여신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하극상이었고, 결국 라이칸스로프는 지독한 저주를 받아 이성을 빼앗기고 한낱 짐승이 되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달의 여신을 부른다 하여도 그녀가 용서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죄를 범한 라이칸스로프는 까마득한 옛 선조였고, 이들은 그저 그 죄를 대물림받았을 뿐이다. 여신의 분노도 거의 가라앉았음을 아이반은 알고 있었다. 비록 아이반이 알고 있는 미래에서 대부분의 라이칸스로프는 저주를 벗어나기 위해 아예 암흑에 물들어버렸지만, 소수의 라이칸스로프는 그 죄를 씻고 여신의 전사가 되었다.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란 소리다.
“나는 볼타르,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다. 그대의 이름은?”
“아이반 에시르손. 당신들을 깨울 남자요.”
둘은 악수 대신 강렬한 눈빛으로 인사했다. 손을 잡는 것은 결과가 나온 뒤에 하면 된다. 지금은 적의와 호의가 뒤섞인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여신을 부르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오. 상처가 없는 사슴을 제물로 바쳐야 하니 준비해 주시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또 다른 것은?”
“용서받을 자의 피가 있어야겠지.”
“심장이라도 꺼내 바쳐야 하나?”
“그럴 필요는 없소. 그저 바가지 하나에 가득 담아주시오. 당신 부족 모두에게 피를 조금씩 모은다면 금방 채워질 테니.”
거기까지 말한 아이반은 시선을 돌려 계곡 가장 깊숙한 곳을 바라보았다. 달빛의 정기가 가장 강한 곳.
“문스톤을 달라고는 하지 않겠소. 그러나 저 장소가 필요하오. 여신을 부르려면 그에 어울리는 제단이 있어야 하니.”
볼타르는 아이반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