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29
“알겠다. 깔끔히 청소를 해서 비켜주지.”
“시간이 없소. 달빛이 가장 강한 시기를 놓치면 다시 그만큼의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오.”
이틀 뒤가 보름이었다. 그 사이 제단을 쌓고 의식을 치르려면 서둘러야만 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볼타르가 그들을 계곡 가장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드워프가 만들어둔 것인지 제법 깔끔한 단상이 있었다. 원래라면 저곳에 문스톤이 있어야겠지만 치운 것인지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모르니 주변을 경계해 주시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헛짓거리를 할 수도 있소.”
아이반이 리자드맨의 언어로 은밀히 말하자 사나운 이빨이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면 늑대 가죽이 많이 늘겠군. 알겠다. 걱정하지 마라.”
사나운 이빨에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할 것을 부탁한 아이반은 델피노에게 도움을 청했다. 신앙심이 쥐뿔도 없는 그는 단 한 번도 제단을 쌓고 정식으로 신에게 기도를 올린 적이 없었다. 솔직히 지금 하는 일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자신만만하게 나서더니 어딘가 모르게 어설픈 모습에 델피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정말로 여신이 대답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형식은 중요하지 않소. 조건이 갖춰지면 여신은 반드시 대답할 것이오.”
자잘한 돌을 치우고 바닥을 정리했다. 나무를 쌓아 제단을 만들고 바닥에 빼곡하게 룬 문자를 새겼다. 달의 여신을 맞이하는 정통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아이반은 자신이 있었다. 이틀이 흐르고 달이 가장 밝은 저녁. 구름이 살짝 있어서 과연 제대로 의식이 될까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 밤이 깊을수록 구름이 멀리 물러났다. 화르륵! 달빛을 가리지 않을 만큼만 횃불을 피웠다. 그 흔들리는 불빛 너머로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달의 정기가 가득한 곳이라 라이칸스로프들의 저주가 약해져서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불안감과 기대가 공존하는 표정으로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흔들리는 눈빛에 간절함이 가득했다아이반은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적당히 어두워지고, 달이 높이 떠오르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의식을 시작하겠소.”
사람의 모습을 한 라이칸스로프 사내 둘이 커다란 사슴 한 마리를 들고 들어왔다. 커다란 사슴은 외상 하나 없이 잠든 듯 숨이 끊어져 있었다. 볼타르가 직접 나서 목을 졸라 잡아온 녀석이었다. 사슴을 제단 가장 높은 곳에 내려놓고 그 앞에 피를 뿌렸다. 볼타르가 이끄는 라이칸스로프 부족 모두의 피였다. 제단에서부터 흘러내린 핏물이 미리 새겨둔 룬 문자에 닿았다. 음각으로 새겨둔 룬 문자를 붉게 채우고 원을 그리듯 감싸 안았다. 우웅- 달빛을 받은 룬 문자가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이반이 그것에 감응하듯 마력을 끌어올리고 검을 뽑아들었다. 신기로 각성한 피의 검 브리카. ‘제발 지금은 나대지 마라. 그러면 정말 용광로에 집어던질 테니까.’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아이반이 브리카를 제단에 꽂았다. 그리고 오래된 노르드의 언어로 주문을 외웠다.
“비느 스탈라(Vinr stalla:제단의 친구).”
제단이 푸른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영감이 발달한 자들은 무심코 몸을 떨었다. 무언가 초월적인 존재가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바디 비트니스(Vaði vitnis:늑대의 적수).”
아이반이 주문을 읊자 이곳을 지켜보던 시선이 확 줄었다. 그러나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물론 아이반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는 덤덤하게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발드르 바근브라우타르(Valdr vagnbrautar:천상의 지배자).”단 하나의 시선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노르드의 주신, 오딘. 그가 아이반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길을 열어주시오. 대신 앞으로도 피와 전투, 죽음을 바치겠소.”
그것은 이미 나의 것이다. 대가가 되지 못한다.
“그러면 무엇을 원하시오?”
너의 운명, 의지, 미래.
“그것은 수지가 맞지 않소. 나의 일도 아니거늘.”
그러면 너는 무엇을 나에게 바칠 수 있느냐? 하찮은 너의 무엇으로 나를 만족시키려 하느냐?
“달이 또다시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보고 싶소? 그렇다면 나도 더는 말하지 않겠소.”
찌릿- 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쑤실 듯이 아팠다. 그러나 그 고통에도 아이반은 웃었다. 오딘이 크게 동요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노르드 신화에서 태양과 달은 괴물 늑대에게 쫓기는 신세였다. 신을 잡아먹는 늑대, 펜리르의 자식들은 태양과 달을 잡아먹기 위해 쫓아다녔고, 마침내 라그나로크가 시작되면 두 늑대가 해와 달을 삼켜 온 세상을 암흑으로 이끈다고 했다. 지금의 오딘은 그런 라그나로크를 겪고 다른 세계로 넘어온 상태였다. 이곳의 달은 그때의 달과 전혀 상관이 없었으나, 오딘의 심경을 건드리기에는 충분했다. 예전 세계수를 보고도 이그드라실을 떠올렸던 오딘이 아닌가.
“이곳의 늑대를 내버려 두면 또 다른 하티 흐로드비트니손이 될 뿐이오. 하지만 당신이 길을 열어주면 그 운명을 바꿀 수 있겠지.”
하티 흐로드비트니손(Hati Hroðvitnisson)은 노르드 신화에서 달의 신 마니를 잡아먹은 늑대의 이름이었다. 하티는 증오하는 자, 흐로드비트니손은 유명한 늑대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물론 유명한 늑대란 펜리르를 의미했다. ···건방진 전사야. 너의 청을 들어주마. 허나 대가를 받아야만 하겠다. 오딘의 손이 뻗어졌다. 예전 아이반의 한쪽 눈을 앗아간 것처럼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것이다. ‘망할, 싫으면 그냥 갈 것이지 또 뭔 헛짓을 하려고?’ 눈을 회복하기 위해 신성의 조각을 사용했다. 또다시 상처를 입는다면 무엇으로 지울 수 있을까? 아이반이 이를 악물고 그냥 의식을 엎어버리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등 뒤에 서서 오딘의 손길을 막아냈다. 헛된 손길은 그만두라. 이번 일은 내가 주재하겠다. 익숙한 존재감, 그러나 너무나 낯선 분위기였다. 언제나 장난기 많던 로키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로키는 펜리르의 아버지, 곧 하티 흐로드비트니손의 할아버지였다. 옛 기억을 떠올린 것이 오딘만은 아니라는 소리다. 한때 라그나로크를 일으켜 이그드라실과 아홉 세계를 불태웠던 그가 오딘을 똑바로 바라보고 아이반에게 힘을 더했다. 스스슥- 아이반의 영혼과 육신에 새겨지던 오딘의 성흔이 지워진다. 탈진하려던 몸에 새로운 힘이 가득 차올랐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오딘이 한 걸음 물러났다. 온 사방에 가득하던 그의 존재감이 흐려졌다. 흥미를 잃은 오딘이 시선을 돌린 것이다. 그러자 로키가 다시 장난스러운 기색을 되찾고 아이반의 등을 후려쳤다. 탁! 저 딱딱한 녀석을 저리 동요시킬 수 있다니, 너는 어쩌면 오딘보다 나와 어울리는구나. 앞으로도 지켜보겠다. 로키마저 떠나자 온몸을 내리누르던 압박감이 확 사라졌다. 여기저기서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리 가쁜 숨을 내뱉던 사람들조차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서 짙은 달빛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라이칸스로프는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절을 올렸다. 달의 여신이 부름에 응답하여 이곳에 왔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신이시여! 위대한 달이시여! 죄 많은 자들이 달빛을 뵙나이다!”
모두 머리를 박고 울부짖으며 용서를 구했다. 여신의 처분을 기다리며 몸을 떨었다. – 너희들의 벌은 아직 끝나지 않았거늘 어찌하여 나를 불렀느냐? 분노가 가득 담긴 여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내뱉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했던 말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아이반이 허리를 반듯이 펴고 여신을 맞이했다. 여신이 아이반을 바라보며 말했다. – 네가 나를 불렀구나. 또 다른 신으로 하여금 잠들어 있는 나를 깨웠음이다. “가장 가까운 신도를 잃어버리고 이제 진심으로 그대를 숭배하는 자가 없소. 이리 깨어나지 않았다면 대답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 아니오?”
– 그렇다고 죄를 범한 자들을 용서하라는 말이냐? 나를 잡아먹으려 하던 자들을 다시 안으라는 말이더냐?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소. 죄 많은 이들은 이미 죽어 사라지고, 그저 업만을 짊어지고 사는 이들이오. 벌이 또 다른 죄를 낳으려 하니 거둬주시오. 달빛의 인도를 잃은 이들이 어둠을 헤매고 있소.”
– 스스로 어둠으로 걸어 들어간 자들을 어찌 다시 인도한다는 말이냐? 신의 분노가 그리 가벼운 줄 아느냐? 그 말에 아이반이 라이칸스로프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그저 무릎 꿇고 엎드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해야 한다니.’ 아이반은 몹시 떨떠름했으나, 그것을 깊숙이 억누르고 달의 여신에게 말했다.”이들에게 당신의 시련을 내려주시오. 그것으로 죄를 씻고,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오.”
여신은 저주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라이칸스로프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줘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했다. 그녀는 선택받은 라이칸스로프 전사에게 시련을 내리고, 그것이 달성될 때마다 조금씩 저주를 거두기로 했다.
위대한 업적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위대한 여신에게 영광이 돌아가도록 빈다. 그것으로 과거의 죄업을 씻고 명예를 회복한다.
본래라면 쉽게 굽힐 것이 아니었으나, 달의 여신도 사정이 좋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신도를 잃어버리고 신앙이 쇠퇴하여 신격으로서의 입지가 점차 약해졌기 때문이다.
드높은 신격의 자존심은 한때 자신에게 죄악을 범했던 자들을 용서하기 어려웠지만, 적당히 시간이 지났으니 분노가 식을 때도 되었다. 다만 그냥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으니 명분이 필요했다. 그것을 아이반이 적당히 긁어준 것이다.
정해진 흐름이었다. 원래라면 그것이 너무 늦어서 아주 많은 라이칸스로프가 아예 어둠에 물들어버렸지만. – 한 번 나를 저버린 어리석은 죄인들아. 너희들이 저지른 죄업이 깊으니 시련도 깊으리라.
여신의 옥음에 라이칸스로프 족장 볼타르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소리쳤다.
“그 어떤 시련이라도 마땅히 견디겠습니다! 다시 한번 어리석은 자들에게 달빛을 내려주소서!”
쿵, 쿵! 단단하게 다져진 계곡의 흙바닥이 파이고 볼타르의 이마가 찢어져서 피가 흘렀다. 라이칸스로프의 단단한 육신이 상처를 입을 정도니 얼마나 강하게 머리를 찧었는지 알 수 있었으나 그것으로 여신이 동요하지는 않았다.
라이칸스로프는 돌바닥에 머리를 저리 찧는다고 크게 다치지도 않았다. 그 간절함이 그저 꾸며낸 것이 아님을 알았지만 아직은 믿음이 부족했다.
– 나의 자비에 감사하라. 그러나 두 번은 없음이니, 내가 너희를 지켜보겠노라. 짙어진 달빛이 떠났다.
여신의 존재감이 흐려지고 제단을 감싸던 신비로운 마력이 사라진다. 그러자 제단을 둘러싸고 엎드려 있던 사람들이 픽픽 옆으로 쓰러졌다. 식은땀을 흘리며 기절하는 것이 보통이고 그나마 똑바로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자들도 얼굴이 창백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비록 여신의 시선과 목소리만 불러낸 불완전한 강신이라고는 해도 신을 불러낸 것이다. 영적으로 크게 충격을 받아 기력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하자면 신병(神病)이었다. 아이반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달의 여신을 불러오기 위해 이곳에 있는 라이칸스로프 전원의 피를 받아 영적으로 연결했다.
여신과 소통하는 데 필요한 힘을 전원이 나눠서 부담한 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힘은 뛰어나도 영적으로는 전혀 단련되지 않은 라이칸스로프에게는 몹시 피곤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오랜 염원이 이루어진다는 흥분, 여신을 마주했다는 감격,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한 상태에서 영력을 바닥까지 긁어 썼으니 그들이 탈진해서 바닥에 뻗어있는 것도 그리 놀랍지만은 않았다.
“쓰러진 이들은 하루나 이틀 정도면 정신을 차릴 거요. 신성의 그릇이 깨진 것도 아니니까 금방 털고 일어나겠지.”
깨어나면 오히려 이전보다 신성의 그릇이 커졌을 거다. 직접 여신을 배알하고 그녀를 부르는 데 일조하였으니 당연한 성과다.
“고맙다! 당신은 우리의 은인이다! 여신께서 다시 우리를 보신다!”
흥분해서 제대로 말이 이어지지도 않는 볼타르를 보면서 아이반이 손을 내저었다.
“죄업을 털고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아직 멀었소. 신격이 내려주는 시련이란 결코 우습게 볼 것이 아니오.”
“저주를 없앨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시련이라도 이겨낼 수가 있다!”
“흐, 그리 자신만만한 것도 오래가지는 않을 거요. 어쩌면 왜 시련을 가져왔냐고 내 멱살을 붙잡고 소리를 지를지도 모르지.”
아이반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볼타르는 그저 행복한 표정이었다. 여신에게 가장 가까운 종족에서 이성을 빼앗기고 한낱 짐승으로 떨어지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련은 분명 몹시 어렵고 고통스럽겠지만, 저주에 짓눌리고 있는 지금의 삶보다 힘들지는 않으리라. 탁! 제단에 박혀있던 피의 검 브리카를 뽑은 아이반은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되돌리고 동굴로 향했다.
라이칸스로프 앞에서는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괜찮으십니까?”
라이칸스로프의 시선이 사라지자마자 델피노가 아이반을 부축했다. 그의 몸이 휘청 쓰러질 뻔했기 때문이다. 이레인이 정령을 풀어 목소리가 흘러나가지 않게 결계를 만들었음을 확인한 아이반이 다소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소. 하지만 두 번 하고 싶지는 않군. 더럽게 힘들었소.”
달의 여신은 신격으로서 그리 대단한 존재도 아니었다. 이제 숭배하는 이가 거의 없어 반쯤 잠들어있을 정도가 아닌가.
겨우 목소리 하나 듣는 데 너무나 많은 힘이 필요했다. 라이칸스로프들에게 부담을 떠넘기고 그들의 영력을 바닥까지 긁어 쓴 것으로도 모자라 아이반 몸에 가득한 힘과 신기로 각성한 피의 검 브리카에 담긴 힘까지 끌어 썼는데도 간당간당할 정도였다.
“하긴, 이 정도는 받아먹어야지. 자기 신도에게 잡아먹힐 뻔했으니 쉽게 나타날 수가 있겠나.”
그리 중얼거리는 아이반을 보며 델피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가 보기에는 겨우 이 정도로 신을 부를 수 있었다는 것이 더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성황청에서는 고위 성직자 수천이 매일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려도 신의 음성을 듣는 것은 수십 년에 한둘 정도에 불과했다. 자신이 모시는 신이 아님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라니, 아이반은 대체 얼마나 신과 가깝다는 말인가? 신화나 역사에 기록된 반신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경우만이 그와 같았다.
그런 델피노의 생각을 알아차린 아이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꼭 그렇지도 않소. 이번은 아주 특별한 경우니까. 달의 여신이 그동안 고집을 부리고 있었지만, 어쩌면 신격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소. 적당히 명분이 갖춰지고 멍석을 깔아주면 모른 척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
물론 그의 말은 델피노에게 전혀 와닿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동안 아이반이 보여준 모습이 너무나 많았다. 그가 실시간으로 신과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일행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나저나 여신을 불러서 해결해야 하는 의뢰라니, 앙그소두린도 참 대단한 자야. 그 오랜 삶에서 기억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걸까?”
이레인이 그리 말하며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은빛 용광로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번 일이 완전히 소두린의 의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글쎄, 정말로 이걸 예상해서 의뢰를 던져준 것인지는 모르겠소. 어쩌면 그냥 다 때려잡고 돌이나 가져오라는 단순한 의도였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하기에는 소두린의 이름값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맡긴 의뢰였으니 최대한 꼬아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여신을 불러서 라이칸스로프에게 걸린 저주를 해결할 방법을 만든다니, 일반적으로는 도저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이반이 어떤 능력을 갖추고, 어떻게 행동할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그러나 소두린의 깊고 넓은 지혜로는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늙은이의 지혜가 범인의 논리와 예측을 뛰어넘는 정확성이 있었으니까.하물며 대륙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소두린이라면, 가장 뛰어난 예언가가 훔쳐보는 미래만큼이나, 세상 모든 지성이 모인다는 현자의 탑만큼이나 대단할 터였다.
“후우······.”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던 아이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에 그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피로가 가득 덮쳐서 제대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일단 좀 자야겠소. 내가 깨어나면, 문스톤을 들고 복귀합시다.”
아이반이 침낭을 꺼내고 바닥에 누웠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기술은 이번에도 제 몫을 다해 그를 깊은 고요 속으로 데려갔다.
가장 밝은 달, 보름을 지나 달이 쇠락하는 시기였다. 마른 목을 적시기 위해 빗물을 받아먹듯 달의 정기를 끌어모아 간신히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왔던 라이칸스로프가 다시 짐승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러나 볼타르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았다.
그들을 조이고 있던 지독한 저주가 한결 약해졌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느 때보다 밝은 목소리로 달의 여신을 찬양했다.
희망이 생겼으니 그것을 놓칠 수가 없었다. 정말로 달빛을 머금은 것처럼 푸른빛을 뿌리는 문스톤을 건네주면서 볼타르가 말했다.
“지금은 은인에게 무엇도 보답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신의 시련이 끝나는 날, 우리가 비로소 오래된 죄를 씻고 명예를 되찾는 날, 그대를 찾아가겠다. 그때는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되찾을 테니.”
“당장은 시련이나 극복할 생각을 하시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쩌면 가끔은 마주칠지도 모르니.”
“우리는 한 번 명예를 잃었다. 다시 그것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반드시 보답하겠다.”
그들은 달빛의 인도를 받아 시련을 위해 떠난다고 했다. 라이칸스로프 무리는 하나가 아니니, 다른 무리를 찾아 신벌을 끝낼 방법이 있음을 알릴 의무도 있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은 없었으나 가볍게 돌아섰다.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또 만날 수 있겠지. 다시 며칠 동안 몇 개나 되는 산을 넘어 은빛 용광로로 돌아왔다.
파라스와 피알라르는 며칠째 공방에 박혀서 작업 중이라 그들을 맞이하지 못했으나, 대신 은빛 용광로의 첫 번째 망치인 소두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하긴, 그깟 돌멩이 하나 가져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소두린은 독한 술을 물처럼 마시면서 흘흘 웃었다. 그 모습이 어지간히 못마땅한지 아이반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돌 하나 가져오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한 일이었소.”
“그래서 내가 두둑이 대가를 준다고 하지 않았나? 돌 하나 가져오는 걸로 아다만트라니, 천 번을 생각해도 남는 장사지.”
한동안 끌끌 웃으며 아이반을 바라보던 그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층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들은 내 생각보다 잘했어. 훌륭한 결과야.”
“···우리는 아직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도 하지 않았소만.”
“그랬나? 늙으면 넘겨짚는 버릇이 생겨서. 하지만 틀리지 않았으니 넘어가자고.”
아이반은 뭐라 말을 내뱉으려다 그냥 속으로 삼켰다. 하긴, 은빛 용광로에서 겨우 며칠 거리였다. 따로 소식을 알아볼 방법이야 많겠지. 따지고 보면 드워프 왕국이 겨우 라이칸스로프 무리에게 문스톤을 빼앗긴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그들을 그냥 때려잡으면 어쩌려고 그랬소? 내가 그들의 저주를 해결할 방법을 몰랐다면?”
그 말에 소두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