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30
“상관없는 일이다. 그랬다면 그들은 벌을 받은 셈이니. 아니, 오랜 신벌에 고통받던 목숨을 끊어주었으니 자비를 베푼 셈이 아닌가?”
순순히 문스톤을 넘겨준 것치고는 꽤 험한 대답이었다.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 번 더 물었다.
“···당신은 그들과 무슨 상관이기에?”
“그들과는 상관없지. 하지만 셀룬과는 인연이 있었다.”
셀룬, 그 말을 듣고도 언뜻 알아차리지 못한 아이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니 옆에 있던 이레인이 그것이 달의 여신이 가진 옛 이름이라고 알려주었다.
“달의 여신과?”
“그래. 셀룬이 아직 신격을 획득하기 전에, 필멸자이던 시절에 짧은 인연이 있었지.”
소두린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달의 여신이 한때 필멸자였다는 사실도, 그와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던 아이반은 물론이고 다른 일행까지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제법 즐거운 듯, 소두린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뭐, 옛날 일이지.”
물론 그럴 거다. 달의 여신이 필멸자이던 시절이라니, 대체 얼마나 오래된 일이란 말인가? 아이반은 새삼스럽게 소두린이 대륙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자라는 것을 실감했다.
드르륵, 드르륵. 큼지막한 문스톤을 손에서 굴리던 소두린이 그것을 옆에 있던 드워프에게 대충 던져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드워프답지 않게 근육이 거의 없이 비쩍 말라 있었으나, 눈빛이 워낙 강렬해서 힘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본래 몇 번쯤 더 부려 먹으려고 했지만, 일 처리가 좋았으니 넘어가기로 하지.”
그저 소탈한 늙은이처럼 앉아있던 모습을 버리고 드워프의 영웅이자 왕, 은빛 용광로의 첫 번째 망치다운 위엄 어린 모습으로 소두린이 말했다.”따라오라. 우리의 용광로로 안내하겠다.”
뒷짐을 지고 걸어가는 소두린을 따라 일행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소두린은 그리 빠르게 걷는 것 같지도 않은데 휙휙 거리가 벌어져 저 멀리 앞서 나갔다. 처음에는 천천히 걸어가던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달려가야만 했다. 마치 예술품과 같은 은빛 용광로의 풍경은 아주 아름다웠으나 한 걸음을 나아갈 때마다 주변 풍경이 일그러지며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이반은 몇 개의 결계를 통과하는 감각을 똑똑히 기억했다. 은빛 용광로의 예술적인 아름다움 속에 숨겨져 있던 환상과도 같은 마법이 그들을 새로운 길로 안내하고 있었다. 아주 신비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드워프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네. 사실이니까. 우리는 만들고 부수는 것은 잘하지만 이런 재주는 없지. 옛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만든 곳이야.”
저 멀리 앞에서 걷던 소두린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그리 말했다. 흘흘 웃으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마치 생각이라도 읽고 있는 것 같아서 아이반은 괜히 섬뜩한 기분이었다.
“옛 친구라니, 달의 여신과 같은 자들?”
아이반이 다소 딱딱하게 물으니 소두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셀룬도 조금 거들기는 했지.”
이제는 뭐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소두린이 그야말로 신화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똑똑히 알았으니까.
“다 왔군. 이제는 나도 관절이 쑤셔서 얼마 걷지도 못하겠어.”
소두린이 짐짓 약한 소리를 내며 걸음을 멈추자 일행은 말없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 웅장한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해서였다. 강철 모루가 산 하나를 통째로 깎아서 공방을 만들었다면, 은빛 용광로는 마치 거인이 하늘에 손을 뻗고 있는 듯한 거대한 탑을 만들었다. 단순히 규모만 따지면 강철 모루 쪽이 몇 배나 크겠지만, 하늘 높이 서 있는 건축물이 주는 아름다움은 또 남달랐다. 아이반 역시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고층 건물이었다. 이 빌어먹을 땅에서 눈을 뜬 후로는 처음이다.
“이곳이 바로 은빛 용광로, 이 땅의 시작이라네.”
안으로 들어가니 수많은 드워프들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지나가다 소두린을 발견하고는 살짝 머리를 숙여 인사한 후에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인간들의 법도로는 왕을 배알하는 백성의 모습이라 하기에 무척이나 불경스러운 것이었으나, 드워프의 예절과 인간의 예절이 같을 수는 없었다. 하물며 소두린은 왕이라는 단어조차 거부하고 그저 첫 번째 망치라는 말로 불리길 원한 자가 아닌가. 어쨌든 거대한 로비를 가로질러 가장 깊은 곳, 은밀하고 화려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급스럽게 치장된 조그마한 방, 그러나 아무런 가구도 없는 곳. 아이반은 그곳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엘리베이터로군.’ 우웅- 낮은 기계음과 함께 승강기가 움직인다. 약간의 마력도 느껴지는 것을 보니 기계장치와 마법을 함께 쓰는 모양이었다. 탁! 묘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러자 둘이서 한참 무언가 쑥덕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파라스와 피알라르가 그들을 발견하고 크게 소리쳤다.
“이제 도착했구먼! 딱 좋을 때 돌아왔네!”
“이제 준비가 거의 되었소!”
자신을 반기는 그들에게 대충 인사를 하면서 아이반은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대장장이의 공방답지 않은, 무척이나 몽환적인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탑의 최상층에서 반쯤 열린 천장으로 빛이 흘러들어왔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거울에 몇 번이나 반사되어 거대한 수정으로 모였다가 다시 사방으로 흩어진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의 방향이 변할 때마다 천장에 매달려있던 거울들이 조금씩 움직이면서 완벽한 각도를 유지했다. 탑 자체가 거대한 기계장치이면서, 아주 치밀하게 설계된 마법진이었던 셈이다.
“달빛을 모아 용광로를 달구고, 햇빛을 모아 쇠를 두드리지. 은빛 용광로에서도 가장 귀한 것을 다룰 때 사용하는 곳이야. 이곳이야말로 아다만트를 제련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지.”
파라스는 다소 흥분한 듯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로 한쪽을 가리켰다. 길고 긴 관을 타고 검은색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제련된 아다만트라고 했다.
“뭔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데.”
아이반이 턱을 긁적이며 그리 중얼거리자 피알라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럴 수 있소. 나도 이런 방식은 처음 보니까. 은빛 용광로 특유의 방식이라 하오. 달빛으로 아다만트만 녹여 빼낸다니, 참으로 신기하지. 일반적인 방법이라면 아다만트를 제련하는 것에만 몇 달은 걸릴 거요.”
그러자 뒷짐을 지고 있던 소두린이 흘흘 웃었다.
“최근에 쓸 일이 있어서 아다만트를 녹일 수 있도록 조정이 되어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리 쉽지는 않았을 게야.”
아다만트는 존재 자체가 무척이나 귀한 재료였다. 쓰임이 너무나 많지만, 귀하기에 오히려 함부로 쓸 수가 없는 재료. 그런 아다만트가 쓰일 일이라면 역시 드워프의 삼신기, 그중 은빛 용광로에 있다는 대지의 방패 팔그로인 밖에 없었다.
“대지의 방패 팔그로인이 그리 쉽게 수리가 되지는 않을 텐데, 어찌 성과는 있으셨소?”
아이반의 물음에 소두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노력은 하고 있지. 성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네.”
딱! 소두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공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이 갈라지고 바닥에서부터 방패가 떠올랐다.
“은빛 방패군.”
“자주색이 아주 진하군요.”
“크기가 너무 큰데, 저게 원래 크기인가?”
“너무 작다! 저것으로는 아무것도 막지 못한다!”
대지의 방패 팔그로인을 보고 한 마디씩 내뱉던 일행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같은 물건을 보고 묘사가 전부 달랐기 때문이다. 크기도, 형태도, 색상도 모두 달랐다.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이것이 방패라는 사실 뿐이다.
“어떻게 된 일이오?”
아이반의 물음에 소두린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싱긋 웃었다.
“대지의 방패 팔그로인은 이 땅에서 태어난 최강의 방패야. 그 무엇도 막아낼 수 있는 절대 방어의 상징. 그것을 위해 형태도 버렸고, 색상도 버렸지. 남은 것은 방패라는 개념뿐. 그래서 이건 그냥 방패야.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화려하기도 하고, 단순하기도 한 그냥 방패.”
소두린이 뒤에 주절주절 덧붙이는 말이야 어쨌든, 아이반에게는 마냥 낯선 것은 아니었다. 무척이나 비슷하지 않은가, 난쟁이에 대한 묘사와.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소두린을 바라보았다.
“난쟁이와 비슷하군. 혹시 무언가 관계가 있소?”
그 말에 소두린이 껄껄 웃었다. 너무 웃어서 마른기침을 몇 번이나 내뱉고 나서야 그는 답할 수 있었다. “관계? 물론 있지. 난쟁이와 만난 적이 있으니. 나는 그에게 팔그로인을 보여주었고, 그는 나에게 망치 하나를 보여주었어. 무식하게 튼튼한 망치였네. 그것 말고는 하나도 특별한 것이 없었으나, 그게 가장 특별하다고 그는 말했었지.”소두린은 아이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뇌신의 망치. 그는 자신의 작품 중 그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라 했네. 하지만 아직 미완성이라고도 했지.”
아이반은 낮게 중얼거렸다.
“묠니르.”
노르드 신화를 대표하는 최강의 무기. 접으면 주머니보다 작지만, 펼치면 모든 신을 태울 수 있다는 마법의 배, 스키드블라니르와 반드시 명중하는 마법의 창, 궁니르보다 훌륭한 보물로 꼽힌 것이 묠니르였다. 그동안 난쟁이가 남긴 물건들을 보면 옛 아스가르드의 보물을 재현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니, 어쩌면 묠니르를 만들려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그 난쟁이는 정말로 묠니르를 완성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나?’ 어설프게 만든다면 토르의 번개를 견딜 수가 없었다. 토르의 번개를 견디지 못한다면 결국 묠니르라 칭할 수가 없었고. ‘토르의 번개를 견딜 수가 있다면, 정말로 묠니르를 만들 수가 있다면.’ 아이반의 눈빛이 변하자 소두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은빛 용광로의 가장 비밀스러운 곳에서 나와 대면하면서도 결국 탐하는 것은 난쟁이의 보물이구나.”
은빛 용광로의 물건이라면 대륙의 모든 사람이 원하는 최고의 보물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눈앞의 물건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난쟁이의 것을 탐하고 있으니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은빛 용광로의 왕이자 모든 드워프의 영웅, 한때는 그들의 종족신이 될 수도 있었던 자에게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그제야 실수를 깨달은 아이반이 표정을 가다듬었으나 소두린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는 몹시 훌륭한 장인이었다. 그를 알고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천년을 넘게 노력했으나 우리는 아직도 그를 따라가지 못하는구나.”
그건 몹시 놀라운 고백이었다. 대륙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소두린이 난쟁이가 모든 드워프보다 우월한 장인임을 인정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난쟁이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소두린이 굽히고 들어갈 줄은 몰랐다. 드워프인 파라스는 크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난쟁이의 솜씨를 이었다는 피알라르 역시 한쪽 눈썹을 밀어 올리며 놀라움을 표했다.
“인간아. 아이반, 노르드의 신이 선택한 전사야. 너의 검을 꺼내 보아라. 난쟁이가 만들었던, 오랜 세월이 흘러 완성된 검을 보여라.”
그 말에 아이반은 망설임 없이 피의 검 브리카를 꺼냈다. 팔뚝에서 흘러나온 붉은 핏물이 검의 형상이 되어 허공에 떠올랐다. 비록 외관은 무척이나 단순하고 평범했으나, 젊은 신격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소두린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허공에 떠오른 검이 품은 막대한 힘과 그 아름다움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머리를 불쑥 내미는 작은 드래곤의 모습을 보았을 때는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것이 난쟁이의 검이다. 세상에 무수히 흩뿌린 그의 파편 중에서 적어도 하나는 훌륭하게 각성하였구나.”
소두린은 검을 보았다. 드래곤의 형상을 한 검의 영혼을 보았고, 검의 주인인 아이반을 보았으며, 검과 연결된 어느 드래곤의 존재도 보았다. 탕탕탕! 계속해서 망치를 두드리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가 예전에 했던 말 역시 떠올랐다. ‘운명을 이끄는 자가 자신의 작품을 깨운다고 했나.’ 천 년을 되씹고도 알 수 없던 뜻을 이제는 알 것만 같았다. 소두린은 그를 붙잡고 있던 오랜 번민을 벗어던지고 아이반에게 물었다.
“검은 이만하면 되었고, 창도 저들이 만드는 것이면 충분하겠지.”
소두린이 손을 뻗자 대지의 방패 팔그로인이 휘리릭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그것은 그의 몸을 온통 가릴 만큼 크기도 했고, 겨우 반지만큼이나 작기도 했으며, 태양보다 밝은 빛을 뿌리기도 했고, 깊은 지하보다 더욱 어둡기도 했다.
“그러면 방패는 필요하지 않나?”
흡사 팔그로인이라도 줄 생각이 있다는 듯한 물음. 다른 이들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삼키고 있는데 아이반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필요하지 않소.”
이것 역시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라 다른 이들의 고개가 팍 꺾였다. 소두린 역시 단번에 거절당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은 듯 잠시 침묵하다가 되물었다.
“어째서 그런가?”
대지의 방패 팔그로인은 분명히 대륙 최강의 방패였다. 시간의 흐름마저 막아내고 소두린이 오래된 용만큼이나 긴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든 물건이 아닌가. 아이반은 정말로 생각이 없다는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약간의 경멸마저 담아 말했다.
“그거, 결국 저주잖소.”
필멸자로서는 거의 불멸에 가까운 삶을 살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소두린은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었다. 오히려 조금씩 쇠락해졌다. 발전하지 못한 영혼은 끊임없이 닳았고, 묶여있는 정신은 끊임없이 썩었다. 지금 그를 보고 누가 신격에 가장 가까웠던 사내라고 하겠나? 그에 소두린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건 나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긴 생명을 받았기에 퇴보한 것이 아니다. 신격을 눈앞에 두고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되었을 때, 드워프에게 종족신은 전혀 필요하지 않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종족신은 그 종족에게 더 큰 힘과 영광을 줄 수가 있었으나, 반대로 그 종족의 운명은 종족신에게 크게 얽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영원토록 자유로운 드워프를 만들기 위해서 소두린은 신격의 자리를 포기했다.최초의 드워프가 만들어낸 신기의 힘으로 신격이 되어봐야 드워프의 종족신이 될 수밖에 없었던 소두린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니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지.”
그런 소두린의 말에 아이반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것 역시 팔그로인의 함정 아니오?”
최강의 방패, 절대 방어의 상징. 그러나 대지의 방패 팔그로인은 소유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드워프라는 종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대지를 마음대로 조작하는 능력이 있는 갈라로자가 힘의 망치인데 팔그로인은 왜 대지의 방패겠나? 그건 대지의 종족, 땅의 정기가 모여 스스로 태어났다는 드워프를 위한 신기였다. 팔그로인의 힘은 궁극적으로 드워프라는 종족을 위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팔그로인이 그렇게 소유주를 이끌기 때문이다. 자유롭지 못한 힘의 주인이 과연 발전이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영원히 퇴보하는 길이었다.
“나를 얽매려 하지 마시오. 나는 자유롭기 위해 살고 있으니.”
아이반이 그리 말하자 종족의 자유를 위해 신격을 버린 늙은이가 빙긋 웃었다.
“훌륭한 선택일세.”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짓던 소두린은 은빛 용광로 최상층 작업실을 내주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가 아이반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대륙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소두린이 무언가 마음을 정했음을 모두가 깨달았다. 비록 지금은 죽음을 앞둔 쇠약한 늙은이 신세지만 한때는 신격의 자리에 가장 가까웠던 자였다. 필멸자를 넘어 불멸자에 한 걸음 다가간 위대한 초월자. 소두린의 지혜는 깊은 바다만큼이나 심유하고, 북풍 한파만큼이나 매서웠다. 그가 무엇을 결정하듯 대륙이 크게 요동치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무언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본 것만 같아.”
파라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나, 폭풍과 같은 무언가가 지나갔음을 느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반은 소두린이 사라진 자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악마가 손을 뻗고, 거인이 나타나고, 옛 신이 눈을 뜨고, 용이 깨어났소. 대륙에서 가장 경험 많은 자가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은빛 용광로는 이제 전쟁을 준비할 것이다. 그에 영향을 받은 다른 드워프 왕국도 밤낮없이 쇠를 녹이고 망치를 두드리겠지. 방관자에 불과하던 드워프들이 게임의 참여자로 들어온 셈이다. 신뢰의 연합, 피의 동맹, 그 외 세계를 노리는 다양한 초월자의 무리. 아이반이 알고 있는 미래보다 조금 이른 시점이었다. 물론 이제는 그 미래라는 것은 휴짓조각보다 못한 것이 되었지만. “신화시대가 끝나자마자 태어난 자가 눈을 감을 때가 되니 다시 신화시대가 돌아오려 하는군. 묘한 운명이야.”아이반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운명, 그런 엿 같은 단어를 본인이 내뱉었다는 것에 놀랐기 때문이다. ‘정해져 있는 것은 없다. 정해가는 것이지.’ 스스로 안심시키듯 속으로 그리 되뇌던 아이반이 파라스와 피알라르를 보았다. 이제 아다만트가 제련되었으니 그들이 본격적으로 작업할 때가 되었다.
“무언가 더 필요한 것은 없소? 우리가 도와줄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