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31
아이반이 그리 물었으나 파라스가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우리의 영역이야. 자네들이 도와줄 것은 많지 않아. 은빛 용광로에는 다른 재료도 풍부하고.”
옆에서 그냥 구경이나 하라,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자리를 비켜 달라. 대장일에 익숙하지 못한 자가 어쭙잖게 도와주려고 해봐야 방해만 될 뿐이었다. 싸우는 것이 전사의 영역이듯, 만드는 것은 장인의 영역이었다. 아이반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지극히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뭐 필요한 것 없나? 아다만트와 용의 가죽, 뼈라니. 이만한 재료도 흔치 않아. 나중에 난쟁이를 만나 부탁할 재료를 빼놓더라도 제법 양이 되는데 무엇을 만들기 원하는가? 작업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거라네.”
아이반은 미리 부탁했던 대로 쓸 만한 창을 원했다. 손에 쥐고 휘두르기에 좋고, 때로는 집어 던지기도 편한 창. 사나운 이빨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방패를 원했다. 공격보다는 방어에 더 집중하겠다는 의미였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행을 위해서.
“그건 오히려 장점을 버리는 일이 아니오? 지금껏 잘해왔는데.”
“하지만 내가 아니면 지킬 수 있는 자가 없다!”
“용의 심장과 어울리지 않소. 그 오만한 기운이 남을 지키기 위해 굽힌다는 것을 받아들이겠소?”
화염 드래곤의 심장은 적을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에 어울리지, 상대의 공격을 버티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다.”뭐, 좋아. 나의 신은 아니지만, 적당히 만들어볼 수 있겠소. 당신은 어찌할 생각이오?”
생명의 구슬과 오래된 성자의 지팡이를 받은 피알라르가 이레인을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거절했다.
“나는 괜찮아. 팔라시온의 활이 있으니까.”
“그래도 이번 기회를 그냥 넘기기에는······.”
“필요 없어. 자잘한 것을 만들어봐야 활용도가 떨어지니까.”
하긴, 이레인은 최초의 일곱 요정 중 하나의 후손이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장비들은 모두 최상품 중에서도 최상품. 특별히 장비 욕심을 낼 이유가 없었다.
“좋소. 그러면 우리에게 보름의 시간을 주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보일 테니까.”
피알라르와 파라스가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고, 그동안 다른 일행은 마을에 머물면서 자신을 가다듬었다. 그동안 몰아치듯 달리고서 얻은 잠깐의 휴식인 셈이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깡! 아이반이 창으로 후리자 사나운 이빨이 이를 악물었다. 단단히 쥐고 있던 방패가 들리고 자세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틈으로 아이반은 창을 쑤셔 넣었다. 방패로 단단히 보호해야 할 가슴에 창날이 스치고 지나갔다. 끼기긱! 묘한 소리와 함께 사나운 이빨의 가슴에서 창날이 튕겨 나왔다. 아무런 마력을 담지 않은, 보통의 창날로는 반쯤 드래곤처럼 변한 그의 가죽을 뚫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처는 입지 않았으나 치명적인 공격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대련이 아니었으면 마력을 듬뿍 머금은 창이 가슴을 쭉 찢어버렸을 테니까.바닥에 창을 박아 넣어 밀려나던 몸을 멈춰 세운 아이반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건 놀라웠소. 그 순간에 페이크라니, 정말로 속아버렸어.”
“그래도 제대로 한 방 먹이지는 못했다! 방패를 회수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사나운 이빨은 훌륭한 전사였다. 익숙하지 않은 방패를 쓰는 것이 당연히 자연스럽지는 않았으나 무척이나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방패를 다루는 것은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간간이 날카로운 공격을 성공시키고는 했다.
“이제 한 단계 높여도 될 것 같은데, 어떻소?”
“나는 언제나 환영한다!”
치지직! 화르륵!아이반의 몸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사나운 이빨의 몸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서로를 노려보다 무기를 휘두르려 할 때, 저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멈춰 섰다. 익숙한 기운, 파라스와 피알라르. 장비를 만들겠다고 그들이 공방에 틀어박힌 것이 어느새 보름이 지난 모양이었다. 아무리 대련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새로운 장비가 오는데 계속할 수는 없었다. 아이반과 사나운 이빨은 장난감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환영했다.
“어서 오시오! 고생하셨소!”
“피곤해 보인다! 먼저 목욕하는 것이 어떤가?”
피알라르와 파라스는 무척이나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동안 제대로 끼니도 챙겨 먹지 않았는지 볼이 홀쭉한 것 같기도 했다. 파라스가 끌끌 웃으면서 말했다. “난쟁이의 기술은 무척이나 오묘하군,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어. 그동안 내가 재현했던 것과 정말로 난쟁이에게서 이어받은 기술은 정말이지 너무나 달랐어.”무척이나 지친 목소리였다. 그러면서도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면 역시 얻은 것이 많은 모양이다. 하긴, 대를 이어 난쟁이의 흔적을 쫓던 자가 아닌가. 몸은 피곤해도 무척이나 기쁠 수밖에. 피알라르도 이번 작업에 만족했는지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훌륭한 솜씨였소. 은빛 용광로의 방식과 기술도 놀라웠고. 여러모로 나도 깨닫는 것이 많았소.”
서부 메마른 땅에서 돈을 밝히며 드워프의 왕국, 청동 망치보다 낫다고 스스로 붙인 이름이 황금 망치였다. 그것이 원래 피알라르의 미래였는데 이제는 그런 미래와 너무나 멀리 떨어진 듯했다.
“용의 뼈를 축으로 삼아 겉에 아다만트를 바르고, 창날 역시 아다만트로 만들었소. 또한, 겉에 난쟁이의 방식을 따라 룬 문자를······.”
한참 설명을 하던 피알라르는 아이반이 전혀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상자를 건네주었다. 아이반에게는 아주 길쭉한 상자, 델피노에게는 그보다 약간 작은 상자, 사나운 이빨에게는 아주 커다란 상자를. 사람을 몇이나 썰어버려서 이제 산타클로스에게는 선물을 받지 못하는 아이반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어두운 색깔의 창이 길게 누워있었다. 날카로운 창날이 빛조차 잘라버릴 듯 어둡게 반짝였다. 흡족한 표정으로 창을 들어 올리던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나치게 가벼운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벼울 수가 있나?’ 그런 생각을 읽은 피알라르가 흐뭇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당신의 창은 무게와 길이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소. 무척이나 튼튼하고, 무척이나 날카롭고, 무척이나 아름답지. 당신이 원했던 것 그대로요.”
“아름다운 것은 바란 적이 없는데······.”아이반은 그리 중얼거리면서 창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는 뛰어난 전사이면서 동시에 마법사였다. 오딘 이후 내려온 오래된 룬 마법의 계승자. 창에 마력을 흘려보내는 것만으로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알아차렸다. 쉬익! 창이 순식간에 몇 배로 길어졌다가 또 크게 줄어들었다. 그 속도는 무척이나 빨라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잔상만 보일 수준이었다. 최고로 길게 만들면 건장한 성인 열 명이 손을 뻗은 것만큼 길어졌고, 최고로 짧게 만들면 겨우 손바닥만 한 크기가 되기도 했다. 가볍기로는 깃털만큼 가벼웠고, 무겁기는 웬만한 바위보다도 무거웠다. 아이반은 몇 번 반복해서 확인하고는 창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무슨 게 불그 같은 것이 나올 줄 알았더니 여의봉이 나왔네.’ 성능이 불만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것을 보니 자신의 처지가 긴고아를 쓴 손오공과 비슷하지 않나 싶어서였다. ‘손오공은 깽판 치던 깡패 새끼고 나는 선량한 시민인데 같은 신세라니.’ 복잡한 표정을 숨긴 아이반은 창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손오공의 천축행이 끝났을 때처럼 부디 나의 여행 끝에도 자유가 있기를.
장비가 완성되었으니 더는 은빛 용광로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공방에서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며 작업을 하던 파라스가 기력을 되찾는 대로 길을 나서기로 했다. 그렇게 계획을 정리한 아이반이 피알라르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쩔 생각이오?”
파라스야 마경으로 들어가 난쟁이를 반드시 만나겠다는 목표가 있었지만 피알라르는 원래 일행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같이 행동한다는 약속은 없었다. 사실 아이반이 걷는 길은 워낙 험한 가시밭길이라 같이 가자고 권유할 수가 없었다. 피알라르 정도의 실력으로는 따라오는 것만으로 벅찰 테고. 이별은 정해진 결론이었다.
“나는 이곳에 남겠소. 난쟁이의 기술을 이어받았으니 욕심이 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내 몫이 아닌 듯하오. 이곳에서 다른 장인들과 교류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야겠소.”
이번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이 은빛 용광로에 들어올 일은 없었다. 이번 기회에 자신의 실력을 가다듬고 노르드로 돌아가려 했다.
“그동안 나는 내가 무기의 주인을 선택하려 했는데, 그건 오만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소. 나는 그저 만들 뿐, 선택은 무기가 하는 것인데.”
피알라르의 시선이 아이반의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래도 피의 검 브리카가 신기로 진화한 모습이 그에게 큰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당신이라는 영웅을 찾았으니 나의 꿈도 이룬 셈이오. 이제 순수하게 나의 본업으로 돌아가고자 하오.”
예전 자신의 꿈을 말할 때처럼 반짝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이전보다 더 단단하고 깊었다. 단순히 현실에 꺾이고 꿈이 닳아버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자의 눈이었다.
“알겠소. 당신의 뜻이 그러하니 부디 이루시길 바라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나 파라스가 완전히 기력을 되찾자 일행은 은빛 용광로를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혹시 마지막으로 소두린이 나타나 무언가 언질을 주지는 않을까 기대했으나, 그는 은빛 용광로의 최상층에 틀어박혀 계속해서 망치를 두드리고 있다고 했다. 근육도 빠져나가 왜소한 육신에도 불구하고 한 번 망치를 내려칠 때마다 탑 전체가 울릴 정도로 우렁찬 소리가 들린다며 어느 드워프가 말하자 파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들리고 있네. 이게 그분의 망치 소리였구먼.”
단순한 망치질이 아니라 영혼의 울림이었다. 소두린은 정말로 한 번, 한 번의 망치질에 혼을 담아서 내려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영락한 자였지만 한때는 드워프의 종족신이 될 수도 있었던 존재였다. 그가 영혼을 불태워 진심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으니, 드워프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소두린이 길었던 삶을 스스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의 망치질이 멈추는 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최고의 작품이 나타나리라. 적어도 몇 달, 길어도 몇 년. 소두린의 길고 긴 생에서는 찰나와 같은 순간이었으나, 어쩌면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될 터였다.
“···그분의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군.”
파라스는 아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남겠다고 하지 않았다. 무언가 미리 언질을 들었던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는 가슴에 조그마한 방패 모양의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소두린의 전령이라며 찾아온 자가 건네준 물건이었다.
대지의 방패 팔그로인의 권능이 들어 있어서 단 한 번이라면 그 어떤 공격이라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귀한 것을 줄 정도면 파라스와 소두린이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다고 여겼으나 정작 파라스는 아이반이 거절했기에 자신이 받았을 뿐이라며 허허 웃었다.
깡, 깡! 파라스는 브로치를 빤히 보다가 입을 다물고 앞서 걸었다. 영혼을 울리는 망치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을 때까지 계속. 그러나 그 소리가 결코 지워지지는 않았다.
팍! 꾸이이익! 아이반이 발로 후려 차니 칼날 뿔 멧돼지가 긴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을 굴렀다. 이 정도면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깨닫고 그냥 도망칠 법도 한데 눈이 새빨갛게 변해서 또다시 달려들었다.
이래서 다른 놈들보다 멧돼지가 더 귀찮았다. 이놈들은 한 번 덤비면 자기가 죽든 말든 끝까지 공격하니까. 스걱! 아이반이 창을 휘두르니 칼날 뿔 멧돼지의 두꺼운 목이 쩍하고 갈라졌다. 그렇게 머리와 몸통을 분리하고 나서야 녀석은 난동을 멈췄다.
“쯧, 식량은 충분한데 이런 녀석들이 계속 덤비는군. 차라리 베는 맛이라도 있는 녀석이 나올 것이지.”
칼날 뿔 멧돼지는 무척이나 흔한 종류의 몬스터였다. 죽여 봐야 큰돈이 되지도 않는다는 소리다.
이걸 해체해서 인벤토리에 넣어야 할까? 아니면 귀찮은데 그냥 지나갈까? 아이반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품에서 불쑥 조그마한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브리카였다.
최근에는 녀석이 워낙 자주 나타났기 때문에 일행은 드래곤의 모습을 한 영체를 브리카, 검의 모습을 한 본체를 그냥 피의 검으로 나눠 부르고는 했다.브리카는 칼날 뿔 멧돼지의 사체 위에 올라가 아이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녀석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떨떠름한 눈빛으로 녀석을 보던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이자 브리카가 쩍 입을 벌렸다.
아직 뜨끈뜨끈한 핏물이 브리카의 입으로 빨려들었다. 칼날 뿔 멧돼지의 사체는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졌다.
퉤, 퉤! 브리카가 고개를 흔들면서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 칼날 뿔 멧돼지가 어지간히 맛이 없었던 모양이다.
드래곤의 피를 마시던 놈이 멧돼지를 빨아먹고 만족스러울 리가 없었다. 델피노는 브리카를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피를 빨아먹는 모습은 좀 그렇지만, 귀엽군요.”
그 말에 아이반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적어도 수백 년간 수만 명의 목숨을 끊은 숙련된 살인 병기요. 인간을 사육하며 잡아먹던 흡혈귀의 검이었고. 불의 신 쿤다라의 신성력으로 정화하지 않았다면 희대의 마검이 되었을 거요.”
아마 쥐는 사람의 정신을 빼앗아서 닥치는 대로 살육을 벌이고, 다른 숙주를 찾아서 그걸 영원히 반복했겠지.
“그리 비난할 것은 없지 않나? 이 녀석의 의도도 아니었는데.”
파라스가 그리 말하자 아이반이 고개를 저었다.
“비난하는 것이 아니오. 쓰는 사람이 잘못되었을 뿐, 무기로는 제 할 일을 했으니 칭찬이지. 다만, 뽑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방만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오. 검집에 들어가지 않는 검이라니.”
아이반이 무겁게 바라보자 브리카가 고개를 떨구고 바닥을 긁었다. 그러니 왠지 아이반이 잘못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망하기는. 다 놀았으면 돌아와라.”
브리카가 그대로 날아올라 아이반의 가슴팍으로 들어갔다. 충격은 없었다. 스며들 듯 사라졌을 뿐이다.”신기로 각성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녀석도 어린아이나 다름없어. 그렇게 차갑게 대할 필요는 없지 않나? 무기와 교감하지 않으면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파라스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아이반은 어깨를 으쓱였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믿지 마시오. 이 녀석은 용의 피를 빨고 그 영향을 받았소. 이 녀석의 모습이 왜 용의 모습인지 이해한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거요.”
태초의 드래곤이 이 땅에 남기고 간 분신. 드래곤은 학습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깊은 지혜와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가 스스로 불완전해졌다고 표현한 것은 그녀의 일부가 브리카에게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다. 용의 완전성을 빼앗아 신기로 진화하였으니 브리카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존재일 거란 생각이 잘못되었다.
브리카는 이미 충분히 성숙한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지금의 미숙한 행동이 호감을 얻기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행동할 뿐이다.
“내 검은 내 방식대로 다루오.”
단호한 아이반의 말에 파라스가 난감한 듯이 이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브리카의 영혼은 아주 단단해. 저게 아이반의 방식이라면, 결국 브리카가 적응을 해야지.”
그러면서 이레인은 잠시 벗어뒀던 마법 아이템을 다시 착용했다. 뾰족했던 귀가 둥글게 변하고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이 변한다. 이목구비도 조금씩 변해서 누구나 감탄할 절세미녀에서 그럭저럭 예쁜 용병의 모습이 되었다. 아이반 역시 마력을 끌어올려 옛 노르드의 주문을 읊었다.
“론둥그(L?ndungr:덥수룩한 망토를 걸친 자).”
딱 벌어진 아이반의 어깨가 좁아지고 온몸에 가득 찬 근육이 줄어든다. 키마저 줄어들고 피부에 탄력이 사라졌다.
관리하지 않아도 생기가 넘치던 금발이 푸석푸석한 은색으로 변하니 완벽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아이반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자신의 손등을 흘깃 바라보고는 이번에 은빛 용광로에서 제작한 창, 어두운 용의 발톱을 꺼내 들었다.
어두운 용의 발톱을 적당한 길이로 만들어 바닥에 쿵 찍으니, 나무줄기가 솟아나 창을 휘감았다. 그렇게 나무로 감싸고 나니 창의 외형은 보이지 않고 그럴듯한 나무 지팡이 하나가 완성되었다. 아이반이 로브 하나를 꺼내서 몸에 두르고, 챙이 넓은 모자까지 뒤집어쓰니 누가 보더라도 늙은 마법사의 행색이었다.
“파라스는 이대로 괜찮을 것 같지만, 사나운 이빨은······.”
“괜찮다. 미리 계획했던 대로 하겠다.”
“정말 괜찮겠소?”
“물론이다!”
아이반이 한숨을 한 번 내쉬고 고개를 끄덕이자 파라스가 그에게 다가갔다. 짤랑짤랑 소리를 내는 쇠사슬을 그의 목과 팔다리, 꼬리에 묶었다. 쇠사슬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무늬가 빛을 뿌렸다가 사라졌다.
“불편하지는 않소?”
“문제없다.”
“그러면 다시 한번 말하겠소. 나는 몰락한 마탑에서 연구하던 마법사, 사나운 이빨은 나의 노예, 이레인과 파라스는 내가 고용한 용병이오. 델피노는 뭐, 아룬의 사제로 충분하겠지.”
남부 제국 마리난은 이종족에게 그리 따뜻한 곳이 아니었다. 지극히 인간 중심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온갖 종족이 섞여 사는 서부 연합 왕국이나, 껄끄러운 눈으로 보기는 해도 대놓고 핍박하지는 않던 동쪽의 로만 왕국과는 달리 마리난은 이종족을 크게 탄압했다. 그들 기준으로는 드워프나 엘프 정도를 제외하면 죄다 몬스터나 다름없었다.
사나운 이빨이 그냥 나타나면 병사들이 공격할지도 몰랐다. 졸지에 괴짜 마법사의 노예가 된 사나운 이빨을 흘깃 바라보던 아이반이 한숨처럼 말했다.
“혹시 못 견디겠으면 말씀하시오. 까짓것 그냥 싸우면서 지나갈 테니까. 그것도 제법 재미가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