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34
“성흔이 있고, 기적을 증명했지. 따지고 보면 성자로 임명될 조건은 갖춘 셈인데.”
기적이라 하면 신의 힘을 빌려서 세상에 펼치는 행위였다.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위대한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예를 들어 지금은 생명의 한 조각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난 지팡이의 원래 주인인 오래된 성자의 경우, 오백 년 전에 인간과 엘프를 중재하고 신앙을 바로 세웠다는 기적을 인정받았고, 피의 성자는 육백 년쯤 전에 대륙 서쪽을 휩쓸었던 지독한 역병을 잠재웠다는 기적을 인정받았다. 델피노 역시 범상치 않은 모험을 겪고 있으니 그것이 곧 그가 펼친 기적으로 인정받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악마의 소환을 방해하고, 원시 거인의 앞을 가로막고, 옛 신의 개입을 저지했다. 비록 그것이 델피노가 혼자 이룬 업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 받을 일은 아니지 않은가. 역대 성자의 기적과 비교해서도 몹시 놀라운 업적이었다.
“흠흠, 그 이야기는 그만하죠. 그것보다 지금 당장 닥친 일이 중요하니까요.”
델피노가 민망한 듯 볼을 붉히는 모습은 흔치 않기에 조금 더 놀리고 싶었으나, 그의 말대로 더 위급한 일이 있었기에 다들 자세를 고쳐 앉았다.”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여기까지 달려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도착했어요.”
“성문에서 천사를 소환하고 들어왔으니 자격 증명도 괜찮게 된 셈이지. 성자가 어쩌고 하는 소문이 부담스러워도 어쨌든 우리의 말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리게 될 거요.”
까놓고 말해서 성황청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동안 일행이 이룬 성과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으니까. 같이 악마의 의식을 저지하기도 했고, 거인의 군세와 싸우기도 했다. 증거가 없더라도 일행의 말을 마냥 무시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마리난 제국을 설득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일행이 이룬 업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그들의 힘을 끌어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등장으로 관심을 모았으니 나쁜 시작은 아니었다.
“이제 만날 사람들을 잘 설득해봐야지.”
아이반은 그리 말하며 문밖을 보았다. 여러 사람의 기척이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꽤 강렬한 기운. 그동안 왔다 간 자잘한 자들이 아니라 요새 도시 코넬의 핵심이 그들을 찾아온 것이다. 단단한 육신, 안정적인 발걸음,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하고 팔뚝과 얼굴에는 지워지지 않은 상처가 남아있었다. 기사보다는 거친 용병에 가까운 야성적인 남자가 델피노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반갑소. 내가 이곳을 다스리는 움베르토 코넬이오.”
요새 도시 코넬의 주인, 움베르토 코넬은 날카로운 눈으로 델피노를 바라보았다. 지금 도시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주인공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반갑습니다, 델피노입니다. 찾으셨으면 저희가 갔을 텐데 이렇게 직접 오시다니, 놀랍군요.”
“내가 기다리는 것은 익숙하지 않아서. 무례는 아니었을 거요. 내 부하들에게 악마 숭배자가 아니냐고 윽박지르신 분이니.”
“그만큼 위급한 일이란 뜻이었습니다.”
“위급한 일이라, 정말로 악마가 나타난다는 말이오? 마경에 시커먼 안개가 생기긴 했지만 그게 악마의 힘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는데?”
“악마의 힘이 아니라 마계의 힘이죠. 마계의 문이 열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마계의 일부를 그대로 소환할 정도로 거대한 문이.”
움베르토 코넬이 거칠게 몰아붙였지만 델피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안이 심각한 만큼 차분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 여러 영지에서 악마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제가 직접 확인하니 그건 좌표를 확인하기 위한 의식이더군요. 그렇게 넓은 범위에서 좌표를 확인한다는 말은 소환하고자 하는 것이 보통 수준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침 검은 안개마저 나타났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죠.”
“그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이 조사하고 있소.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데 그대는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오? 정말로 자신이 신에게 선택받은 성자라도 된다고 말하는 것인가!”
“저는 성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번 일에 대해 모르지도 않죠. 모두 이번 일에 대해서 알아야만 합니다.”
움베르토 코넬은 델피노를 빤히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그리 시급한 일이라면 따라오시오. 다른 이들 앞에서 당당히 주장하고 본인의 말을 증명하시오.”
움베르토 코넬은 일행을 데리고 회의실로 향했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로 보이는 자들이 한 무리, 마법사가 한 무리, 사제가 또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슬쩍 면면을 살펴보던 아이반이 한쪽 눈썹을 밀어 올렸다. 생각보다 거물이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추기경이 있다니, 델피노가 미리 보냈던 편지 때문인가?’ 자리 배치를 보면 기사와 마법사 역시 그에 밀리지 않는 신분인 것 같았다. 외성 경비대장에 종군 마법사나 앉아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인 셈이다. 아이반이 그들을 살피는 것처럼 그들도 일행을 살폈다. 진중하고 날카롭고 부드러운 나름의 눈빛으로 일행을 바라보던 이들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팔짱을 끼고 있던 기사가 슬며시 허리춤에 손을 대고, 비스듬히 누워있던 마법사가 지팡이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기경 역시 몹시 놀랍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천사를 소환한 사제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도 만만치 않군. 과연 악마의 준동을 경고할 수준은 된다는 말인가.”
기사가 낮게 중얼거리자 다른 이들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러나 마법사는 일행이 여전히 못 미덥다는 듯 노려보았다.
“악마의 대규모 소환, 침공 준비. 뭐,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요즘 대륙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아예 못 믿을 이야기는 아니지. 하지만 정체도 모르는 자의 말을 듣고 어찌 행동하겠나? 신전이 난리를 쳐서 오기는 왔지만 나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그 말에 추기경이 반박했다.
“그는 정식으로 교단에서 임명받은 구마사제입니다. 또한 북부에서 원시 거인과 싸우고, 서쪽 바다에서는 영락한 옛 신의 화신을 물리치고, 여러 곳에서 악마와 싸웠지요. 결코 헛된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원시 거인에 옛 신의 화신이라. 우습지도 않은 말이군.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의심스러워.”
마법사,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숨어있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 거짓된 모습으로 진실을 말하려 하느냐!”
오비도의 눈이 하얀색 안광을 뿌렸다. 진실을 꿰뚫는 현자의 눈이 일행을 바라보았다. 뒤쪽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아이반이 지팡이를 내리찍으며 앞으로 나섰다. 쿵! 굽어있던 아이반의 허리가 펴졌다. 어깨가 벌어지고 쭈글쭈글하던 피부가 팽팽하게 차오른다. 왜소하던 덩치가 순식간에 건장하게 변하고 새하얗던 머리칼이 검어졌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챙이 큰 모자를 벗는 그 짧은 사이, 마법사 노인은 전장한 전사가 되어 있었다. “북부 야만인?”누군가 그리 중얼거리자 아이반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 무시하니 내 모습을 감추었소. 원래 모습대로라면 아무도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니.”
옆에서는 이레인이 변신 마법을 풀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엘프의 모습을 되찾았다. 사나운 이빨은 자신의 몸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가볍게 끊어버리고 거칠게 웃었다.
“북부 야만인, 엘프, 드워프에 리자드맨이라.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작자들이군.”
백색 마탑의 주인이 그리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어딘가 비웃는 듯한 태도였으나 아이반이 모습을 감춘 이유에 대해서는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그래, 당신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조금 더 자세히 말하라.”
“지금도 마계의 문이 열리고 있소. 악마 몇몇은 이미 소환되었겠지. 어쩌면 대악마도 반쯤 건너왔을지도 모르고. 완전히 문이 열리기 전에 마경으로 들어가 마계의 문을 파괴해야만 하오. 그렇지 않으면 대륙이 엉망이 되오.”
그 말에 움베르토 코넬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코넬은 지난 수백 년간 단 한 번도 마경의 침입을 허락한 적이 없다!”
“대악마가 나타난 적은 없었으니까. 과연 대악마를 앞에 두고도 그 말을 할 수 있겠소?”
제대로 마계의 문이 열리면 마리난 제국의 절반은 족히 날아갈 것이다. 아이반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지만 차마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지나치게 겁을 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대악마가 완벽하게 소환된다면 얼마나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 잘 알 것이오. 지금의 전력으로는 결코 막을 수가 없소.”
움베르토 코넬과 기사들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법사와 사제들은 심각했다. 그들은 대악마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의 대표, 마리난 제국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이 오비도를 바라보았다. 백색 마탑의 주인은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완전히 소환된 대악마는 하위 신격이나 다름없어. 특히 위험하고 폭력적인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드래곤보다도 훨씬 까다로운 상대지.”
“그러니까 얼마나 강하다는 말이오?”
“저 말이 진짜라면 남부 기사단과 백색 마탑, 근처에 있는 모든 병사와 사제를 다 끌어모아도 장담할 수가 없어. 대악마가 소환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해.”
주변 사람들의 분위기가 크게 무거워졌다. 대악마라니, 뜬금없이 신화적인 적을 상대해야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 분명하오! 대악마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나도 믿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내 눈은 이것이 진실이라고 하는군. 저들이 자신을 속일 만큼 대단하거나, 내 눈이 썩어버렸다는 뜻이지.”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의 눈이 아까부터 계속 하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진실을 꿰뚫는 현자의 눈이 발동 중이란 의미였다. 오비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경에 들어간다. 그리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하고, 마계의 문을 닫거나 후퇴한다. 그게 최선이군.”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겨온다. 실체가 없었으나,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마경 탐험대는 매우 빠르게 만들어졌다. 현재 상황이 그만큼 시급했기 때문이다.
이게 악마의 수작이 아니라고 해도 마경의 변화는 확인할 가치가 있었다. 그곳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이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아룬 신전의 성전기사단과 전투 사제들, 마리난 제국 남부 기사단과 백색 마탑이 함께 했다. 머릿수만 채우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죄다 자기 밥값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길잡이는 코넬의 정예 레인저 부대가 맡았다.
밤낮으로 마경을 드나들며 순찰을 하는 자들이니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었다. 레인저 부대의 대장은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 남자였다.
낡은 듯한 초록색 의상에 이런저런 장비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는데, 그것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레인저 부대장은 남부 기사단장과 백색 마탑의 주인, 성전기사단장을 모아두고 경고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마경은 아주 지독한 곳이니 지시를 잘 따라주셔야만 합니다.”
신분이나 계급으로 따지면 그보다 높은 자들이 많았다. 전투력으로 따져도 한참이나 차이가 났다. 그러나 마경은 그가 가장 잘 알았다.
“실력이 목숨을 장담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명심하십시오.”
감히 백색 마탑의 주인과 남부 기사단장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 말이 불쾌한지 몇몇 기사와 마법사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정작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와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묘한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출발하겠습니다.”
부대장이 신호를 내리자 레인저들이 빠르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들이 척후를맡아 위험을 감지하고 병력을 인도할 것이다.
이제 늙은 마법사 코스프레는 집어치운 아이반이 한 손에 어두운 용의 발톱을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겨우 어린아이 팔뚝만 한 짧은 창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흘깃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주로 위쪽에서, 그것도 인간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활동하다 보니 아직 이곳에까지 아이반의 명성이 퍼지지는 않았다. 그저 전투에 미친 북부 야만인이 수상한 무기를 들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이곳이 마경인가, 참 기묘한 곳이네.”
이레인이 주변을 살피면서 그리 중얼거리자 아이반이 물었다.
“마리난 제국에 온 적이 있다면서 마경은 처음이시오?”
“근처까지는 왔어도 직접 들어간 적은 없어. 그냥 호기심으로 들어갈 장소는 아니니까.”
그러면서 이레인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숲처럼 보이지만 엘프의 눈에는 영 이상한 흐름이 가득했다.
“거대한 던전 같아. 이계의 숲처럼 느껴져.”
대륙 남부의 마경은 아주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어찌 보면 신화시대에 존재하던 숲의 원형을 잘 보존한 곳이었고, 어찌 보면 마계나 정령계와 같은 이질적인 세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기묘한 곳이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곳이 대륙에서 가장 불안정하고 험난한 장소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남부 회색갈기숲이라는 정식 명칭이 있음에도 모두가 마경이라 부를까. ‘훈련도가 대단하군.’ 사방으로 퍼져있는 레인저는 물론이고 그들이 보내는 신호를 받아 길을 인도하는 레인저 부대장까지 움직임이 몹시 은밀하고 재빨랐다.
숲 바닥에 가득 쌓여있는 낙엽과 나뭇가지를 밟고 지나가면서도 작은 소음 하나 나지 않고, 몸에서는 인위적인 냄새 하나 배어있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최대한 몸을 숨길 수 있는 사각지대, 적당히 은폐엄폐가 가능하면서 도주로가 다양한 곳으로.아이반 역시 레인저의 능력이 있기에 그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
과연 마경을 수색하는 최정예 레인저 부대다웠다. 익숙한 숲속에서라면 기본 무력이 두 단계 정도 차이가 나더라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할 것 같았다.
하나하나가 베테랑 기사급 실력자라는 뜻이다. ‘하긴, 수백 년간 마경의 위협을 막아냈다면 저 정도는 되어야겠지.’ 아이반은 그들 사이에 지나가는 수신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것과 조금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인 원리가 비슷해서 계속 살펴보다 보니 대충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 3-4, 이상 무. – 3-5, 소형 몬스터 흔적 발견. – 3-6, 지형 난해, 우회 필요. – 3-7, 중형 몬스터 접근 중. 바쁘게 수신호를 확인하던 레인저 부대장이 휙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우측에서 중형급 몬스터가 접근 중입니다. 빠르게 처리하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설명하던 레인저 부대장이 기묘한 눈으로 아이반을 보았다.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감이 무척이나 좋거나 레인저의 수신호를 읽었다는 의미. 그것을 기억하면서 레인저 부대장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수신호를 날렸다. – 3-7, 지원, 사살 후 원위치. 그렇게 명령을 내리자마자 아이반이 창을 내렸다.
레인저 부대장은 단순히 감이 좋은 것이 아님을 알았다. 중형 몬스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으나 큰 소음도 없이 녀석의 목숨이 끊어졌다.
숲에서 괜히 큰 소리를 내는 것은 몹시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것도 은밀하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레인저라 불릴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순탄하게 움직이는 것도 거기까지였다.
인간의 냄새를 맡은 몬스터들이 점차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숲에서 이만한 인원이 움직이는데 들키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모두가 레인저라면 모를까, 그런 훈련이 전혀 되어있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지옥 들개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모두 전투를 준비하십시오!”
컹컹컹! 레인저 부대장이 경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게 혀를 빼문 지옥 들개 수십 마리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몸에서 지독한 유황 냄새가 나고, 군데군데 털 대신 비늘이 나 있으며, 산성 침을 흘리는 것만 빼면 제법 개와 비슷하게 생긴 놈들이었다.
컹! 두꺼운 나무도 한입에 씹어서 부러뜨릴 수 있는 억센 턱을 쩍 벌리고 녀석이 달려들었다. 백색 마탑의 마법사 몇이 지팡이를 들어서 얼음 화살을 날려 보냈으나, 놈들은 살이 찢어지고 배에 구멍이 나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덤볐다.
탕! 기사들의 방패에 튕겨 나가고 다리가 잘려 나갔다. 그 상태에서도 한번 고기를 씹어보겠다고 이빨을 들이미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지독한 놈들이었다.
스걱! 지옥 들개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재빠른 녀석들이기는 했으나 기사가 반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가죽이 질겨서 칼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수월하게 처리하기는 했지만, 마지막까지 날뛰는 그 지독한 모습에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이곳이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걸 모두 한 번에 깨달은 것이다.
단순히 강한 적보다 치열하고 지독한 적이 더욱 까다로웠다. 막상 들어와 보니 마경도 별것 없다고 긴장이 풀어지려 했는데, 모두 정신을 바짝 조였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서 손바닥만 한 벌이 날아왔다.
궁수말벌이라고,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짧은 독침을 쏘아 보내는 놈들이라고 했다. 왜애애앵- 녀석의 독침은 갑옷을 뚫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그 곳으로 독침을 날려서 기어이 한방을 꽂아 넣었다.
독성이 아주 강한 녀석은 아니었으나, 제법 크게 부풀었다. 하나하나 검으로 베기는 까다로웠기에 방패로 후려치거나 밀어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다 못한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가 약한 전격마법으로 온 사방을 뒤덮어서 궁수말벌을 다 태워버렸다.
치지직! 시커멓게 타서 후드득 떨어지는 궁수말벌을 보면서 오비도가 불쾌한 듯이 중얼거렸다.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다른 놈들이 덤벼들다니, 정말 짜증 나는 숲이야.”
몬스터도 몬스터지만 오비도는 이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불쾌한 일이었다. 숲 자체가 마력이 불안정하고 공간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똑같은 마법을 사용해도 평소보다 위력이 약하고 컨트롤이 쉽지 않았다. 평소에는 가볍기만 하던 마력이 지금은 물을 머금은 솜처럼 무거웠다.
마력에 예민할수록 그 미묘한 차이를 더욱 잘 느꼈기에 마법사들은 모두가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그렇게 몬스터와 싸우며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슬며시 떨어지고 있었다. 워낙 나무가 풍성해서 원래부터 밝지 않았기에 보통 사람은 언제 밤이 되었는지도 모른 채 어둠을 맞이했을 것이다.
레인저 부대장은 적당히 어두워지자마자 칼같이 멈춰 섰다. 여기서 야영을 하겠다는 것이다.
“어두운 밤에 마경을 돌아다니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낮보다 위험이 열 배는 더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