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36
아이반은 인벤토리에서 잡동사니를 꺼내 그것을 막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캠핑용 장작더미가 순식간에 박살 나고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정말 지독한 독기. 웬만한 독에는 내성이 있는 아이반의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였다. 그저 독연이 살짝 스친 것뿐인데. 화아아- 일렁이는 불꽃 같은 형태의 악마가 검붉은 불길을 쏟아냈다.
타락한 화염 정령이 저주에 물들었기에 그 불길은 무척이나 뜨거우면서 서늘했다. 영혼에 스며들어 그것을 불태우려 했다.
“어림없는 일이다!”
사나운 이빨이 자신의 방패를 앞세우고 막아섰다. 용의 가죽에 아다만트가 얇게 코팅이 되어있는 용맹의 방패는 화염 악마의 불길을 멈춰 세웠다.
그것이 불쾌한 듯 화염 악마가 다시 불을 내뿜었다. 타락한 화염 정령에게 불은 자신의 신체와 같았다.
용맹의 방패를 타고 넘어가듯 움직여 사나운 이빨을 덮쳤다. 그러나 태초의 불꽃에서 태어난 화염 드래곤의 심장을 지닌 사나운 이빨이 타락한 화염 정령의 불꽃에 쉽게 상처 입을 리가 없었다. 그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용의 마력이 뜨겁게 타올라 화염 악마의 불꽃에 대항했다.
그동안 기사와 성기사, 레인저들은 이를 악물고 언데드와 싸우고 있었다. 거인의 시체로 만든 목이 없는 자, 듀라한이 몇이나 나타났으며, 와이번보다 더욱 용족에 가까운 드레이크가 그들을 덮쳤다.
거인족 듀라한이 몽둥이를 내리치자 방어 자세를 하고 있던 기사가 그대로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언데드 드레이크가 썩은 숨결을 토하자 성기사가 핏물이 되어 사라졌다.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이 거인족 듀라한의 사지를 찢어버리고, 언데드 드레이크의 사령핵을 터트렸으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아군은 너무나 지쳤고, 적은 너무나 많았다.
그때, 빛이 터져 나왔다.
“빛이여! 어둠을 밝히소서!”
화아아- 전투 사제들이 부르짖자 빛의 신 아룬의 힘이 가득 퍼졌다. 빛의 기둥이 솟아오르고 주변으로 나아갔다.
평소보다 약해졌다고는 해도 사제들이 이만큼이나 모여 있었다. 그들이 한마음으로 기도하는데 신이 화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지 선포. 외력을 막고 신력을 가득 채우는 최상위 신성 마법. 화아아- 그들을 압박하고 있던 검은 안개가 단번에 밀려났다. 제멋대로 움직이던 마경의 환경마저 일순간 신의 뜻대로 정렬하고, 이 순간만큼은 신을 위한 장소가 되었다.
마력 흐름이 안정을 찾고, 중간에 방해물이 생긴 듯 흐릿하던 천상의 시선이 선명해진다. 수준 낮은 언데드는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지고, 수준 높은 언데드 역시 온몸이 정화의 빛으로 타들어 갔다.
매섭게 몰아치던 악마들이 움찔 몸을 떨고 행동이 둔해졌다. 크게 괴로운 듯 뒤로 물러나기도 했다.
성지가 점점 넓어지면서 악마의 힘과 격렬하게 반응했다. 선명하던 마계의 문이 점차흐려지고 일그러졌다.
이대로 무너질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마계의 문을 찢듯 손이 튀어나왔다.
뼈다귀만 남은 시체의 손이었다. 아이반은 언젠가 그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썩어가는 손아귀가 넘어온다!”
아이반이 어두운 용의 발톱을 집어 던졌다. 천상에서 그를 지켜보는 오딘의 힘을 빌려 마계의 문을 향해 날렸다.
휘이잉! 거센 폭풍을 휘감은 창이 날아간다. 마치 공간을 뛰어넘듯 쏘아진 어두운 용의 발톱이 마계의 문을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뼈다귀만 남은 시체의 손 앞에 멈춰 섰다.
차마 한 걸음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바닥에 박혔다. 어느새 마계의 문을 열고 완전히 넘어온 썩어가는 손아귀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감정이 없는 언데드가 공포와 환희에 몸을 떨고 악마들의 기세가 크게 올라갔다.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를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충실한 부하이자 스스로 대악마에 한없이 가깝다는 오래된 악마가 전장을 바라보았다.
피와 죽음, 절망과 공포가 가득했다. 모두 그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 역겨운 신의 힘만 제외하면. 우우웅- 썩어가는 손아귀가 힘을 내뿜자 성지가 흔들린다. 신의 힘이 급격하게 멀어지고 사악한 기운이 사방에 차올랐다.
신성한 빛에 타들어 가던 언데드가 다시 일어났다. 목숨을 잃은 기사와 레인저의 시체마저 들썩들썩 움직이려고 했다.
“우리의 죽음을 모욕하지 마라!”
델피노가 그리 소리치며 신성력을 내뿜었다. 완전히 무너지려던 성지가 다시 자리를 잡고 하늘이 열렸다.
마계의 문과 닮은, 그러나 너무나 다른 천상의 문이 열리고 빛의 천사가 나타났다. 언데드는 다시 시체로 돌아갔다.
기사와 레인저의 죽음은 모욕당하지 않았다. 아군의 상처가 치유되고 바닥난 체력이 차올랐다.
– 천상의 적을 멸하라. 마치 감정이 없는 듯 딱딱하던 빛의 천사들이 악마를 보고 적의를 불태웠다.
결코 같이 있을 수 없다는 듯 바로 달려들었다. 거인 악마가 피를 뿌리며 뒤로 밀려났다.
간신히 재생한 거미 악마의 다리가 다시 잘려 나가고, 타락한 화염 정령의 불길이 약해졌다. 썩어가는 손아귀도 뒤집어쓰고 있던 검은 로브가 잘려 나갔다.
뼛가루가 튀고 사악한 마력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녀석이 거대한 낫을 휘두르자 빛의 천사 하나가 그대로 반 토막이 나서 사라졌다. – 죽음에 대항하지 마라, 하찮은 자들아. 썩어가는 손아귀의 그림자에서부터 사악한 마물들이 기어 올라왔다.
분명히 죽었으나, 아직도 움직이는 시체들. 썩어가는 손아귀가 직접 소환할 정도니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괴물들이었다. 으드득! 아이반은 이를 악물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피의 검 브리카를 손에 쥐고 썩어가는 손아귀를 노려보았다. 대악마에 한없이 가깝지만, 대악마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기지 못할 것도 없었다.
브리카, 녀석의 마력을 빨아먹어라. 다가오는 놈들을 부수고 힘을 빼앗아라.
아이반이 그리 중얼거리자 피의 검에서 자그마한 드래곤이 몸을 일으켰다. 신기의 영혼 브리카가 크게 몸을 부풀렸다.
슈우욱! 피의 검에 저장된 막대한 힘을 연료로 삼아 브리카가 현신했다. 단순히 영체 상태에서 벗어나 실체를 가지게 된 것이다.
진짜 드래곤에 비하면 아직도 작았으나,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언데드 드레이크와 비교해도 덩치가 밀리지 않았다.
그것을 본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는 크게 놀라워하면서도 준비하고 있던 마법을 흩뿌렸다. 뼈가 시린 바람이 불었다.
언데드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늘을 날던 새조차 그대로 꽁꽁 얼어서 바닥에 떨어져 가루가 되었다.
오비도가 아군을 피해서 쏘았음에도 몸이 덜덜 떨렸다. 초인들마저 피가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시간을 멈춘 것만 같은 극저온의 세계를 달리며 아이반이 검을 휘둘렀다.
땅을 밀어내고, 허공을 밟아, 하늘을 날았다. 천둥걸음, 번개를 닮은 움직임으로 얼어붙은 세계를 뚫고 썩어가는 손아귀를 향해 달렸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퍼져나가는 충격파에 얼음 동상이 되어 있던 몬스터들이 갈라지고 깨졌다. 흩날리는 얼음이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치솟고, 그 사이로 검을 휘둘렀다.
폭풍을 담아, 번개를 담아. 휘이잉! 치지직! 썩어가는 손아귀를 둘러싸고 몇 겹의 방어막이 만들어진다. 아이반의 검은 그것을 베어내면서 점차 녀석에게 가까워졌다.
스스슥! 하나는 쉬웠다. 둘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셋은 만만치 않았고, 넷은 버거웠다.
다섯에 이르러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 하나. 썩어가는 손아귀의 목을 코앞에 두고 아이반의 검이 멈춰 섰다.
검을 들고 있는 아이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방어막 하나하나가 지독한 저주로 가득해서 아이반의 막강한 저항력을 뚫고 스며들었다.
짧은 시간에 온갖 쇠약과 질병의 저주가 깃들고 생명력을 갈취했다. 아이반의 튼튼한 근육이 홀쭉하게 변하고, 팽팽한 피부가 쭈글쭈글해졌다.
– 또 너로구나, 하찮은 자야. 느릿하게, 아주 여유로운 태도로 썩어가는 손아귀가 손을 뻗어 아이반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 차갑고 딱딱한 손에서 죽음이 흘러들어왔다.
– 너의 영혼을 뽑아 나의 노예로 삼고, 너의 육신을 나의 병사로 만들겠다. 아득한 영력, 사악한 마력. 궁극에 이른 사령술사의 손짓에 아이반의 영혼이 울렁거렸다.
금방이라도 영혼과 육신이 분리될 것만 같았다. 그 상태에서, 그런 상황에서 아이반이 웃었다.
“너로는 부족하다.”
크와아아아아! 브리카가 용의 앞발로 언데드 드레이크를 내리찍고 위협적인 소리를 질렀다. 거인족 좀비의 목을 물어뜯고 죽음의 기사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주변에 가득한 죽음의 기운과 사악한 저주를 들이마시고 그걸 씹어 삼켜 자신의 힘으로 바꾸었다. 그 힘이 아이반에게 넘어왔다.
으드득! 아이반은 자신의 목을 틀어쥔 썩어가는 손아귀의 팔을 붙잡았다. 뼈만 남은 녀석의 손이 비틀리고 금이 갔다.
저주를 내리고 생명력을 갈취하는 썩어가는 손아귀에게 대항해 아이반 역시 녀석의 힘을 빼앗았다. 브리카가 그 탁하고 사악한 기운을 게걸스럽게 들이켰다. 그렇게 녀석을 묶어두고 있는 사이, 사나운 이빨이 달려왔다.
심장이 터질 듯이 토해내는 용의 마력을 가득 담아서 검을 휘둘렀다.
“뱀신께 이 죽음을 바친다!”
사방에 가득하던 얼음이 녹다 못해 끓어올랐다. 가장 뜨거운 용의 불꽃이 퍼지고 썩어가는 손아귀의 몸을 휘감았다.
– 불완전한 용인 따위가 감히···! 썩어가는 손아귀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아이반을 내팽개치고 거대한 낫을 빙글 돌렸다. 사나운 이빨이 쏘아 보낸 화염의 검기가 녀석의 낫에 튕겨 근처에 있던 절벽을 무너뜨렸다.
타다닥! 뼈만 남은 손들이 바닥에서 솟아나 사나운 이빨을 붙잡았다. 그리고 썩어가는 손아귀가 크게 낫을 휘둘러 그를 베려고 했다. 쾅! 사나운 이빨은 가까스로 용맹의 방패를 들어 올려 썩어가는 손아귀의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자세가 흐트러져 두 번은 막지 못했다.
썩어가는 손아귀의 낫이 그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챙!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이 끼어들어 낫을 튕겨냈다.
그는 사나운 이빨을 힐끔 보고는 그대로 썩어가는 손아귀에게 달려들었다. 끼야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원혼들이 생명에 대한 저주를 토해내며 앞을 막았다.
브라움이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러 원혼의 벽을 잘라냈으나, 진득한 저주가 그의 몸을 갉아 먹었다.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소서.”
델피노가 피를 토하면서 생명의 한 조각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찬란한 빛이 이 땅에 내리쬐고 삿된 자들이 움츠러들었다.
저주가 깨끗이 사라지고, 악마에게 노예로 부려지던 원혼들이 정화되어 흩어진다. 썩어가는 손아귀조차 빛의 사슬에 몸이 묶였다.
빛의 천사들이 천상의 힘을 끌어와 녀석을 붙잡은 것이다. – 이따위 것으로 날 붙잡으려 하다니! 녀석이 거칠게 몸을 흔들었지만, 빛의 사슬은 끊어지지 않았다.
천상의 힘은 그리 나약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기사와 사제들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성지 선포에 이어서 천사 소환까지. 막대한 신성력이 소모되었다.
그 부담을 나눠서 짊어지고 있었으나, 점차 한계가 찾아왔다. 하나둘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정신을 잃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자 성지가 무너지고 빛의 천사가 사라졌다. 썩어가는 손아귀를 묶고 있던 사슬마저 없어졌다.
쾅! 사슬을 끊어낸 썩어가는 손아귀가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힘겹게 사제들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방패째로 몸이 잘려서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들은 숨이 끊어지자마자 급속하게 부패하여 사기가 깃들었다.
죽은 자들이 그 자리에서 죽음의 기사가 되어 한때 동료였던 자들을 적대했다. 캬아아악! 죽음의 기사는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언데드로 변이하는 것을 막지 못할 만큼 신성력이 바닥을 보인다는 뜻이었다.
썩어가는 손아귀는 궁극에 도달한 사령술사였다. 마계의 문이 열려있어서 끊임없이 힘이 흘러들어오고 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저 불리하기만 했다.
녀석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제대로 찌르면 녀석을 쓰러뜨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마력은 간당간당하고, 체력도 바닥났다.
아군은 한계에 도달하여 밀리기만 했다. 사제들이 힘을 모아 완성한 성지도 무너지고 신의 시선이 멀어졌다.
원하기만 하면 무한정 쏟아지던 신의 힘마저 가늘게 이어졌다.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떻게 하면?’ 아이반은 덤벼드는 뼈다귀와 썩은 시체들을 베어 넘기면서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분명 방법은 있었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우웅- 쥐고 있던 피의 검에서부터 마력이 흘러들어왔다.
바닥났던 체력도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활이 부러진 이레인은 검을 뽑아 들고 좀비의 머리를 날리고 있었다. 그녀 주변을 휘감고 도는 정령들마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사나운 이빨의 질긴 가죽은 상처가 가득했다. 용의 것과 비슷해지면서 웬만한 창칼에도 멀쩡하던 그가 피를 잔뜩 흘리고 있었다.
신성력을 바닥까지 긁어 쓴 델피노는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계속해서 입으로 피를 토하면서도 언데드로 변이하려는 아군을 보호하고 있었다.
파라스의 거친 수염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스스로 만든 방패와 갑옷은 여기저기 찌그러졌고, 도끼는 이가 빠져있었다.
아이반은 다시 고개를 돌려 썩어가는 손아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스스로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나는, 한다!”
아이반은 피의 검을 바닥에 박아 넣고 주변에 가득한 사기와 저주를 순수한 힘으로 변환해 받아들였다. 브리카가 가지고 있던 용의 일부와 흡혈공 아키우스가 모아온 피 웅덩이의 힘이 아이반의 몸에 가득 들어찼다.
스윽! 아이반이 손을 뻗자 어두운 용의 발톱이 날아와 잡혔다. 그는 자신의 몸에 가득한 힘을 모두 털어 넣어 자세를 잡았다.
휘이잉! 막대한 마력이 휘몰아친다. 거대한 마력이 쉴 새 없이 충돌하는 이 전설적인 전장에서도 시선을 빼앗길 만큼 강력한 힘이 아이반의 창으로 모여들었다.
그곳에 있던 모두는 깨달았다. 이번 공격이 핵심이다.
그를 위해 길을 열어야만 한다. 제일 먼저 사나운 이빨이 나섰다.
그는 용의 마력을 끌어올려 석화의 마안으로 썩어가는 손아귀를 노려보았다. 녀석의 주변에 있던 언데드 몇의 몸이 느릿하게 굳어졌으나 썩어가는 손아귀는 큰 영향이 없었다. 다만 잠시 움찔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움찔한 틈으로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의 마법이 날아들었다.
우웅- 복잡하게 공간이 일그러지며 썩어가는 손아귀를 붙잡았다. 주변에 있던 언데드는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과 동시에 몸이 부서져 사라졌으나, 썩어가는 손아귀는 그 복잡하게 엮인 공간 감옥을 스스로 찢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쯤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이 방패로 밀어붙였다.쾅! 막대한 충격파가 썩어가는 손아귀의 몸을 뒤흔들었다.
녀석의 낫에 찔리고 베이면서도 브라움이 끝까지 밀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비록 방패는 여기저기 부서지고 일그러졌지만, 허벅지가 찢어지고, 옆구리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음에도 그는 적을 뒤흔들어놓는 데 성공했다.
썩어가는 손아귀는 방어막을 만들어낼 틈이 없었고, 피할 여유도 없었다. 겨우 낫이나 한 번 휘둘렀을 뿐이다.
스걱!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은 팔 한쪽이 날아가고 있었음에도 웃었다. 시간을 벌었다.
꽈아악! 아이반은 창을 쥐고 한껏 허리를 젖혔다. 땅을 단단히 딛고 있는 두 다리에서부터 허리와 어깨를 지나 손끝, 아니 창끝까지. 모든 힘을 한 점에 모아 집어 던졌다.
마지막에 손을 놓는 그 순간, 아이반은 자신이 무엇을 던졌는지 깨달았다. 궁니르(Gungnir). 반드시 명중하는 마법의 창, 주신 오딘을 상징하는 위대한 무기. 아이반은 자신이 오딘의 이름을 부르짖지 않았음에도, 그가 자신에게 힘을 내려주지 않았음에도 궁니르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위대한 황금 옥좌 흘리드스캴프에 앉아서 세상을 지켜보고 있을 오딘의 궁니르가, 그가 건네주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미 성지는 무너졌다.
마경의 특이성에 마계의 문에서 흘러나오는 이계의 에너지까지 겹쳐서 신의 시선은 아득히 멀어졌다. 그런데도 이곳에 궁니르가 있었다. 어두운 용의 발톱을 매개체로 삼아 궁니르가 나타났다.
‘이건 대체 무슨 의미지?’ 아이반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궁니르는 공간을 뛰어넘어 썩어가는 손아귀의 가슴에 박혔다. 손에서 놓는 순간, 이미 도착해있었다.
궁니르에 담긴 위대한 신력이 사악한 악마를 꿰뚫고 그 하찮은 몸을 찢어발겼다. 휘이잉! 폭풍이 몰아친다.
죽음을 다루는 악마보다 더욱 죽음에 가까운 신의 힘이 녀석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렸다. 스스슥- 주변에 가득하던 언데드가 풀썩 쓰러져 흙이 되었다.
썩어가는 손아귀의 사령핵이 깨져서 녀석이 소환한 다른 놈들까지 무너진 것이다.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이반을 노려보았다.
– 네놈이 어찌 이런 힘을···! 한없이 대악마에 가깝다던 썩어가는 손아귀의 몸이 몇 개의 뼛조각으로 변해 떨어져 나간다. 기세 좋게 물질계로 넘어오자마자 퇴치되어 다시 마계로 돌아가는 셈이다.
화신체를 넘어서 본신의 영혼마저 뒤흔드는, 극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기에 회복하려면 아득히 긴 세월이 걸리겠지. 아쉬운 일이었다. 세계를 죽음으로 물들이고 파멸로 이끄는 순간을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러나 썩어가는 손아귀는 이쯤에서 만족했다.
그 또한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으니까.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이반만이 아니었다. – 죽음을, 숭배하라! 썩어가는 손아귀의 몸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과 동시에 마계의 문이 폭발하듯 크게 팽창했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의식을 치르던 흑마법사들의 몸이 빠른 속도로 썩어 내리고 해골만 남아 무릎을 꿇고 경배했다.
가장 앞에 있던 리치가 자신의 사령핵을 뽑아서 위대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사사삿- 순식간에 땅이 말라붙고 퍼석해졌다.
마계의 마력에 오염되어 촉수처럼 꿈틀거리던 식물들마저 그대로 재가 되어 흩어졌다. 주변의 모든 생명이 죽음을 받아들였다.
아득히 깊은 어둠이 눈을 떴다. 시커먼 연기를 몸에 두르고 생명의 모래시계를 농락하며 한 발을 내디뎠다.
– 보라, 죽음이 찾아왔다.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결국 이 땅에 나타났다.
생명을 들이마시고, 죽음을 내뱉는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푸르던 나무가 바스러지고, 날아가던 새가 스스로 땅에 머리를 박아서 목숨을 끊었다.
그가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한 걸음만큼 죽음이 번졌다. 세상이 그의 존재에 경악하고 몸을 떨었다.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나타나자 세상이 고요해졌다. 항거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그저 압도당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으드득! 아이반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절망스럽게 속으로 외쳤다. ‘못 이긴다.
’ 그동안 수많은 적을 쓰러뜨렸던 전사의 감이 말했다. 결코 싸워서는 안 된다.
절대 이길 수가 없다. 최상의 컨디션이라고 해도 승산이 전혀 없었다. 하물며 썩어가는 손아귀를 상대로 온 힘을 다 토해낸 지금은 죽음의 인도자에게 한 칼이나 먹일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탁! 아이반이 손을 뻗자 어두운 용의 발톱이 날아와 잡혔다. 썩어가는 손아귀를 꿰뚫고, 녀석을 마계로 쫓아 보낸 창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영 무거웠다.
그저 후들거리는 다리를 숨긴 채 간신히 죽음의 인도자를 노려볼 뿐이다. 아이반이 그렇게 전투 자세를 잡으니 다른 이들도 하나둘씩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명백히 이전보다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힘이 없었다.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저 너무나 압도적인 적의 모습을 보고 허탈해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아군이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죽음의 인도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죽음의 인도자는 그저 세계를 바라보았다.
마계가 아닌, 새로운 땅을 즐기듯 살펴보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 이 땅에 다시 오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 날카로운 정신파가 퍼지고 몇몇 레인저와 기사들이 피를 울컥 뿜었다.
심각한 상처를 입어 나약해진 몸으로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죽음의 인도자가 내뱉는 말에는 사악한 마력이 잔뜩 들어있었다.
건강한 자라도 순식간에 쇠약해지고, 결국은 숨이 끊어지는 지독한 힘이었다.
“빛이여!”
델피노가 소리치고 사제들이 힘을 모았다. 저 멀리 멀어진 신의 시선을 붙잡아 간신히 신성력을 내뿜었다. 그러나 그 미약한 신성력은 금방 무너져 내렸다.
죽음의 인도자가 무심히 바라보자 부들부들 몸을 떨다 바닥에 쓰러졌다. 델피노는 생명력을 대가로 신성력을 불러오고자 했으나, 그조차 불가능했다.
빛의 신 아룬이 너무나 멀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악마가 대단하다고 해도 신앙의 연결을 완전히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남아있는 힘이 없었다.
썩어가는 손아귀를 상대하며 바닥까지 긁어냈더니 더는 신을 부르지 못했다. 피우웅- 이레인이 쏘아 보낸 화살이 죽음의 인도자에 닿기도 전에 흩어진다.
강력한 죽음의 기운이 정령을 멀리 쫓아 보내고, 화살을 썩게 했다. 금속으로 만든 촉이 순식간에 녹슬어 사라지고, 나무로 만든 대와 새의 깃털로 만든 깃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삭아서 없어졌다.
휘이익! 사나운 이빨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용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불꽃이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와 죽음의 인도자를 덮쳤다. 그러나 그것 역시 중간에 사그라져 녀석에게 닿지 못했다.
용의 마력은 그것이 못마땅한 듯 더욱 거친 마력을 내뿜었으나, 사나운 이빨이 버티지 못했다. 그의 마력 회로가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회복되기를 반복했다.
아이반은 마력을 번개로 바꿔 어두운 용의 발톱에 담았다. 그리고 앞으로 내지르며 그것을 뿜어냈다. 치지직! 번개가 응축되어 한 점으로 뻗어나갔다.
번개는 제멋대로 움직이기에 제어하기가 어려운 힘이었는데, 지금은 스스로 깜짝 놀랄 만큼 완벽하게 한 점으로 모여 쏘아졌다. 그러나 절대적인 힘의 크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죽음의 인도자 주변을 둘러싼 마력장을 출렁이게 했으나, 뚫지는 못하고 튕겨 나갔다.
“죽어라, 이 악마야!”
용감한 기사 하나가 달려들었으나 그는 녀석을 휘감고 있는 마력에 닿자마자 줄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숨이 끊어진 그는 순식간에 언데드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신호로 삼아 새로운 언데드들이 주변에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까지 싸운 것이 꿈인 것처럼 사방에 적이 가득했다.
– 마침내 죽음이 이곳에 당도하였노라. 죽음의 인도자가 그리 선언하자 메마른 죽음의 마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미약한 신성력을 부수고,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이곳에 있는 모두는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부여잡고 이를 악물었다.
“허, 망했군. 대악마가 소환되기 전에 데몬 게이트를 파괴해야만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