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40
포르니는 몹시 불편한 기색으로 그리 말했다.
“알겠소.”
아이반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레긴, 배신을 거듭한 신화 속의 사악한 난쟁이라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애초에 성인군자일 거라 기대하지 않았으니까.원래 노르드 신화에 나오는 놈들은 죄다 인성이 쓰레기였다. 자신이 알고 있던 것에 비해 포르니는 무척이나 신사적인 편이었다.
“두렵지는 않아?”
포르니의 물음에 아이반은 어깨를 으쓱했다.
“개수작을 부리면 대가리를 부수면 되오. 그게 아니라면 적대할 필요가 없고. 두려울 이유가 없군.”
거친 말이었다. 그러나 아이반의 그런 태도가 포르니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훌륭한 전사로군.”
아이반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노르드의 기준으로 훌륭한 전사란 최고로 싸움에 미친 놈을 의미하니 그에게는 욕이나 다름없었다.포르니가 아련한 듯, 고통스러운 듯 떨리는 미간으로 먼 과거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야.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시구르드 녀석도 썩 괜찮은 놈이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포르니의 마음속에서 분노의 불길이 솟아오르다가 다시 잦아들었다.난쟁이, 그러니까 검은 알프는 최고의 장인이었다. 최초의 거인, 이미르의 시체에서 태어났으니 혈통으로 따지면 신들과 그리 큰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아무렴 태초의 암소 아우둠라가 소금 섞인 얼음을 핥아서 태어났다는 신들의 기원보다는 훨씬 그럴듯하지.난쟁이는 제 손으로 온갖 보물을 만들어내고, 또 황금을 장난감처럼 다루었다. 그런 난쟁이의 왕과 그 아들들이 아무리 보물이 많다고 해도 욕심에 눈이 멀어서 서로를 죽였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애초에 오딘이 저주가 걸린 보물을 배상금이라고 넘겨준 것부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오딘의 팔찌는 드라우프니르가 아닌가. 아흐레마다 아홉 배로 불어난다는 황금 팔찌.황금이 썩어 넘칠 정도로 많은 오딘이 굳이 안드바리의 보물을 뺏어서, 그의 저주가 깃든 황금을 대가로 내놓았다고?포르니는 그 모든 일이 결국 신들의 음모라 여겼다. 그래서 신들을 경멸하고 미워했다. 스스로 신이 될 수 있음에도 거부할 만큼.어쩌면 다 착각인지도 몰랐다. 추악한 욕망 때문에 파멸한 자신을 위로하려고 그럴듯한 변명을 만든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빌어먹을 신, 망할 오딘.’
포르니는 지금도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오딘을 욕하며 이를 갈았다.신을 증오하는 그는 신에게 농락당하는 아이반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비록 신이 원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갈 길이 멀다. 이만 끝내자.”
포르니는 파라스를 데리고 공방 가장 깊숙한 곳에 틀어박혔다. 나지막하게 쇠를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를 한참이고 듣던 아이반이 자리에 누웠다.
“오늘은 이쯤에서 자야겠군.”
언제 어디서든 그를 편안히 재워주던 수면 스킬이 있었음에도 어째 그날은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어색하게 움직이던 마력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마치 껍질이라도 씌운 듯 갑갑하던 감각이 활짝 개방되고 천상에서 지켜보는 신들의 시선이 선명하게 느껴진다.마경의 끝이었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자신도 모르게 덮치는 안도감에 누군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보름이 넘는 시간을 마경을 헤치고 움직였다. 처음 진입했을 때부터 따지면 거의 두 달 만에 다시 돌아온 셈이다.아주 지독했다. 살아 돌아온 것이 기적이라고 느낄 만큼. 그냥 마경에서 두 달을 버티는 것도 미친 짓일 텐데 거기서 대악마를 마주하고도 죽지 않았다니.너무나 많은 동료가 목숨을 잃었다. 그들과 자신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욱 용감하지 못했기에 살아남았을 뿐이다.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죄스러움과 한편으로 찬란히 빛나는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모두 자신이 모시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사제나 다름없었다.그 신앙심 넘치는 현장에서 홀로 멀뚱히 서 있던 아이반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날려 보낸 두 마리 까마귀 정령이 알려주는 정보를 심각하게 여겼다.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을. 바쁘게 도망을 간 듯 이리저리 물건이 널려있고 군데군데 불에 타서 재가 되어있었다.재마저 한참 되어서 싸늘하게 식어있는 것을 보면 제법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그 사실을 알리니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경과 가까운 마을이다. 멀쩡하기를 바랄 수는 없겠지. 설령 악마가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고 해도 소식을 들었다면 급히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지독하게 부패한 시체들과 무너진 마을의 모습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흔적을 살피던 레인저와 기사들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악마의 흔적은 없군. 그냥 마경에서 밀려 나온 몬스터가 덮쳤을 뿐이야.”
그게 다행스러운 일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마을이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은 똑같았으니까.그래도 아들을 지키던 어미가 자식의 목을 물어뜯고, 도망가라 소리치던 아비가 부인의 심장을 꿰뚫는 것보다는 나았으리라.악마들이 향한 곳은 그런 일이 비일비재할 터였다. 보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쉬고 움직이지.”
그 시체 냄새 가득한 곳에서 일행은 건량을 물어뜯었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답답한 목이 편안해지지는 않았다.그 후로 불탄 마을을 다섯 정도 더 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살아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창칼로 무장한 병사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피곤한 표정과 더럽혀진 옷을 보면 몇 번쯤 전투를 벌이곤 난 후인 것 같았다.주변을 경계하며 돌아다니던 병사들은 멀리서 일행을 발견하고 움찔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몬스터나 언데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쪽은 이미 폐허가 된 것으로 아는데······.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다들 말끔한 외형은 아니지만, 기사와 사제, 마법사였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자들이니 병사의 물음에는 썩 공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러면서도 힐끔 사나운 이빨을 바라보았다. 마경에서 튀어나온 몬스터와 싸우다 보니 이종족에 대한 적대심이 더욱 강해진 모양이었다.마경의 몬스터와 리자드맨은 전혀 다른 존재였지만 원래 마리난 제국은 그런 걸 구분하지 않았다.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이다. 지휘부가 어디냐? 안내하라.”
“예, 예?”
딱 다섯 명이 있다는 제국 기사단장이 나타나니 병사가 화들짝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해도 이건 너무나 거물이었기 때문이다.남부 기사단장쯤 되면 못해도 자작 수준의 귀족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웬만한 지방 영주보다 대접받는 몸이다.
“나, 남부 기사단장님이십니까?”
병사는 무심코 그리 되물었다가 정신을 번쩍 차리고 안내했다. 이건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쪽입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은 움직이는 동안 병사를 붙잡고 이것저것 캐물었다.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마리난 제국 남쪽은 그의 임지였다.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마경의 경계가 무너지고 악마가 튀어나왔다고 합니다. 벌써 영지 몇 개가 무너지고 완전히 지옥이 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악마와 함께 몬스터들도 뛰쳐나와서 마경을 접하고 있던 영지는 죄다 휩쓸려 나가고, 간신히 방어선을 세우고 있습니다.”
병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최대한 성실히 답했다. 그러나 브라움이 느끼기에는 썩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아무래도 병사가 알고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정확히 어디쯤에서 방어선이 만들어졌는지, 지금 전력은 얼마나 되는지, 악마들의 공세는 어떤 수준인지.그건 일개 병사가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결국은 지휘부에 가야만 알 수 있으리라.병사에서 기사로, 기사에서 영주로 안내를 받았다. 시베린 영지의 영주성은 분위기가 무척이나 어두웠다.성벽이 죄다 긁혀있고, 무너진 해자가 아직 완벽히 복구되지 않았다. 시체는 치워뒀으나 흔적은 선명했다.
“어서 오시오. 그대들을 환영하오.”
시베린 영지의 영주는 무척이나 피곤한 표정이었지만 짐짓 당당한 어조로 일행을 맞이했다. 자기 성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남부 기사단과 백색 마탑의 마법사, 아룬 교단의 사제들이 마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은 들었소. 그걸 안타깝게 여겼는데, 이리 만나다니 놀랍구려.”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나타나 제국 남부를 완전히 휩쓸고 있었다. 그를 저지하러 마경으로 들어간 자들이 이렇게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이 시베린 영주에게는 의아하기만 했다.마경에서, 대악마를 마주하고도 이리도 많은 수가 살아남을 수가 있단 말인가? 지금 대악마가 보여주는 힘을 생각하면 믿을 수가 없었다.과연 남부 기사단과 백색 마탑, 아룬 신전의 성기사와 전투 사제. 대단한 자들이었다.시베린 영주가 감탄하면서 말했다.
“그대들이 이리 돌아온 것을 세상이 알면 모두 손뼉을 칠 것이오.”
“패배자들이 무슨, 정말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도망쳤소.”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이 허전한 소매를 가리키며 다소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썩어가는 손아귀에게 잘려 나간 곳이었다.사지 하나가 잘려 나가도 회복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신성력을 가진 사제들이 여럿 있었지만, 썩어가는 손아귀는 한없이 대악마에 가깝다는 고위 악마였다. 그 사악한 마력이 상처에 스며들었기에 팔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 복귀하고자 하니 정보가 필요하오.”
브라움과 오비도가 정보를 얻는 동안 아이반은 휴식을 위해 얻은 방에서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었다.마경에서 빠져나온 직후에는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조금 지나니 신들의 시선이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졌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저 멀리 떨어져 있던 신의 존재가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능이 예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전해지는 듯했다.이건 썩어가는 손아귀의 가슴을 꿰뚫을 때, 오딘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궁니르를 소환할 수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까?우웅-아이반의 몸에 신력이 차오르고 정신이 깨어난다. 아이반의 영혼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무지갯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다리 너머, 저 멀고 먼 곳의 풍경이 보였다.끊임없이 서로에게 무기를 휘두르며 싸우고, 그러다가 또 어깨동무한 채로 껄껄 웃으며 고기를 뜯고 술잔을 기울이는 위대한 전사들이 있었다.위대한 전사의 고향이자 목표. 아이반이 몹시 증오하고 혐오스러워하면서도 내심 언젠가는 그곳으로 끌려가리라 여기고 있던 장소.고대 노르드어로 발홀(Valh?ll), 뜻은 살해당한 자의 전당.발할라에서 먹고 마시던 전사들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아이반을 마주 보았다.벌떡 일어나며 기쁘게 무기를 뽑아 들던 전사들이 김이 빠진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망치를 톡톡 가리켰다.그게 무슨 뜻인지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데, 이내 무지갯빛 다리가 일그러지며 발할라의 모습이 멀어졌다.
“후우, 후우······.”
아이반은 거친 숨소리를 자신의 귀로 듣고서야 호흡이 거칠어졌음을 깨달았다.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온몸에 가득하던 기운이 훌쩍 줄어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빠르게 달려온 델피노가 벌컥 문을 열었다가 몹시 지친 표정의 아이반을 바라보고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방금 거대한 기운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는데······.”
델피노의 뒤로 이레인과 사나운 이빨의 모습이 보였다. 잔뜩 무장을 한 걸 보니 갑자기 습격이라도 당한 줄 알았던 모양이다.
“아무것도 아니오. 잠시 명상을 했소.”
“단순히 명상이라기엔 너무나 커다란 기운이었는데······.”
이레인이 의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다가 흐릿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에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본질을 꿰뚫어 보는 요정의 눈이 누군가 허공에서 지켜보고 있음을 깨달았다.신력에 익숙한 델피노와 용의 심장을 가지게 된 이후로 아주 예민한 감각을 가지게 된 사나운 이빨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아차렸다.흐릿한 존재감, 아주 미약한 기운의 흐름. 눈에 보이지도 않았고,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그들이 최대한 감각을 퍼트리고, 극도로 경계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무척이나 은밀했다.
“저건, 뭐지?”
사나운 이빨이 무기를 쥐면서 묻자 아이반이 불편한 듯이 대답했다.
“발키리. 전사의 목숨을 수확하는 사신이자 오딘을 모시는 시녀이기도 하지.”
그 말에 델피노의 표정이 굳었다. 신학적인 공부를 깊게 한 그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기 때문이다.노르드 신화에서 발키리가 전사의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은 그 전사의 목숨을 수확하기 위한 의도였다.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위험한 것 아닙니까?”
델피노의 물음에 아이반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언제는 위험하지 않았던 적이 있소?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소.”
아이반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일단 그렇게 일행을 안심시켰다. 발키리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이 그저 목숨을 수확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뤼안 교단의 전투 사제들이 물의 천사를 소환하듯, 당신과 아룬 교단의 전투 사제들이 빛의 천사를 소환하듯, 나도 전투 천사를 소환했을 뿐이오. 딱히 전투에 도움을 주진 않겠지만, 그리 꺼릴 것도 없소.”
자신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대든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발키리는 아이반의 머리 위에 떠서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앞으로는 뒤통수를 조금 더 조심해야겠어.’
아이반이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땡땡땡땡-일행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밖으로 나오니 성기사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여기 계셨군요! 지금 바로 서쪽 성문으로 가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오?”
“서쪽 영지가 무너지고 악마가 언데드를 이끌고 쳐들어오고 있답니다. 벌써 코앞이랍니다!”
“코앞이라고? 대체 방비를 어찌했기에?”
일행이 서둘러 서쪽 성문을 향해 달렸다. 이미 병사들이 이리저리 달리며 전투준비가 한창이었다.그 와중에 남부 기사단과 백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성문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반이 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느냐 물으니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너머는 마리난 제국 최대의 곡창지역이야. 적어도 가을걷이가 끝날 때까지는 버텨야 해. 거기가 밀리면 악마들에게 죽기 전에 모두 굶어 죽을 거야.”
이곳 영주는 같이 싸워주기를 원했지만 냉정하게 자르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어차피 악마의 주력도 아니고 통제를 벗어나 흘러들어오는 언데드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곳에 묶여있기에는 너무 고급 인력이었다.
“우리는 언데드를 뚫고 지나갈 생각이야.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나?”
그 말에 아이반은 흘깃 이레인의 표정을 살피다가 대답했다.
“우리도 따라가겠소.”
“그래, 대악마의 목을 베려면 결국 서쪽으로 움직여야 하니까.”
성문을 지키는 기사와 약간의 실랑이 끝에 일행은 성 밖으로 나왔다. 제대로 쉬지도 못했지만, 그것을 아쉬워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언데드를 쓰러뜨리고 악마의 목숨을 끊어낸다. 그것을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몸이 으스러지더라도 웃으며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밖으로 나오자마자 멀리서 스멀스멀 다가오는 언데드 무리가 보였다.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움직이는 농민의 시체, 피에 젖은 검과 창을 들고 있는 병사의 시체.사나운 이빨이 뒤를 돌아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리자드맨이라고 불쾌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자들.그는 자신의 목걸이에서 정령마를 불러왔다. 푸른 털이 탐스러운 바람의 정령.사나운 이빨은 그동안 연습한 대로 능숙하게 정령마에 올라타고는 소리쳤다.
“썩은 시체를 나의 신에게 바친다!”
바람을 타고 달리며 언데드에게 뛰어들었다. 그의 거대한 검이 움직일 때마다 시체가 쩍쩍 갈라지고 검고 진득한 피가 바닥으로 쏟아졌다.용의 심장은 뜨거운 불길을 토해냈고, 정령마가 내뿜는 바람을 타고 언데드의 몸을 불태웠다.그에 뒤를 따라 남부 기사단이 달려 나갔다. 아직 말을 구하지 못해 두 다리로 뛰고 있음에도 속도는 말과 비교해도 결코 느리지 않았다.그들이 앞세운 방패에 썩은 시체가 갈려 나갔다. 마경의 억센 놈들과 썩어가는 손아귀가 직접 소환했던 언데드와 비교하면 연약하기 짝이 없었다.성기사와 사제들이 빛을 뿜을 때마다 언데드가 재가 되어 흩어졌다. 수백이 넘던 언데드 무리가 단번에 사라졌다.차악!아이반은 창을 빙글 돌리며 피를 털었다. 이름 모를 악마 하나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으나, 이미 목이 잘려버린 녀석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서쪽으로!”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녘, 태양은 보이지 않고 빛만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시각.밤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침도 아닌 경계에 병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숲을 노려보고 있었다.지난 며칠간 썩어가는 시체들이 몰려들었다. 몸에 화살이 박히고 팔다리가 잘려도 기어 오는 놈들을 보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싸웠다. 죽은 동료가 움직이는 시체가 되어 덤벼드는 것을 보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발악했다.저녁에, 또는 새벽녘. 녀석들은 어둠이 사라지기 전이라면 언제든 덤벼들었다. 사실 낮이라고 해서 그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휘이잉-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제 겨우 늦여름, 초가을에 불과했다. 아직 추울 때가 아님에도 병사들은 몸을 떨었다. 바람에 섞인 썩은 시체 냄새가, 흔들리는 숲의 가지들이 섬뜩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으르르르르낮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이 짐승의 것이 아님을 병사들은 모두 알았다. 언데드가 한가득 돌아다니는 곳에 짐승이라고 해서 멀쩡하지는 않았다.스스스스스무언가 질질 끄는 듯한 소음, 고요하던 숲이 깨어나는 소리.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숲이 움직였다. 흙 속에 묻혀있어야 할 자들이 성으로 몰려들었다.땡땡땡땡-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병사들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며칠, 너무나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젠장, 오늘은 무사히 넘어가나 싶었는데······.”
누군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어쩌면 그건 다른 이가 아니라 자신이 무심코 중얼거린 말일지도 몰랐다.병사들이 무기를 들었다. 기사들이 성벽 위로 올라오고 마법사가 마력을 가다듬었다. 그때 눈을 가늘게 뜨고 숲을 살피던 기사 하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