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41
“언데드가 아닌데?”
숙련된 기사의 날카로운 눈은 어둠을 꿰뚫고 그들을 보았다. 저들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죽은 자에게 호흡은 불필요했으니 살아있는 자들이란 뜻이다.긴가민가하던 기사와 병사들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잘 무장한 기사와 성기사, 사제들이라니. 혹시 중앙에서 내려온 지원군이 아닐까?그들이 무슨 기대를 하든, 아이반은 터벅터벅 걸어와 담담하게 소리쳤다.
“시원한 물, 따뜻한 잠자리, 가능하다면 씻을 공간을 주시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창에 꽂혀있던 악마의 머리를 털어냈다.
“적어도 오늘은 습격이 없을 테니까.”
끔뻑끔뻑.눈을 뜬 아이반은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시에도 제법 폭신한 침대와 부드러운 이불이었다.쉬지도 못하고 몇 날 며칠을 달려서 겨우 한숨 자고 일어났다. 그동안 베어 넘긴 언데드가 몇이나 되는지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잠들기 전 몸을 빡빡 문질러 씻었는데도 어째 썩은 시체 냄새가 몸에 밴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이겠지. 델피노가 직접 정화까지 걸어줬는데.’
빠르게 잠에서 깬 아이반이 갑옷과 무기를 착용하고 방을 나섰다.하늘을 힐끗 살피니 대충 점심때였다. 해가 이제 막 떴을 때 잠들기 시작했으니 얼추 여섯 시간 가까이 잠든 셈이다. 원래 수면 시간이 길지 않은 아이반으로서는 제법 오래 잤다.하긴, 사흘 전에 두 시간 깔짝 눈을 붙인 게 끝이었으니 그리 과한 것도 아니었다.아이반이 멍하니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곧 일행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몇 시간 침대에 누워 쉬었다고 피곤이 가득하던 얼굴이 제법 좋아졌다.
“이제 회의를 시작한답니다, 아이반.”
델피노의 말에 엉덩이를 탁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반이 회의실로 향했다. 이미 그곳에는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각자 자신이 누구라 소개했지만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귀로 흘려보냈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늦었나?”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를 마지막으로 모든 인원이 모이자 커다란 유리구슬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회의실의 모습이 이곳에 겹쳐지듯 나타났다. 일종의 화상 회의였다.- 브라움, 잘 들리나?
“물론이오.”
– 마경에서 소식이 끊겼다고 했을 때는 절망적이었는데 이리 얼굴을 보니 좋군. 팔은, 아쉽게 되었네만.
“한쪽 팔로도 그럭저럭 괜찮소. 오른팔이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 후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이 지도를 가리켰다.
“우리는 이곳에서 시작해 이렇게 움직였소. 그동안 꽤 많은 언데드를 처리했지만,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악마는 그다지 처리하지 못했지.”
그건 생각보다 악마가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언데드는 사방으로 퍼졌으나 악마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이미 영지가 몇이나 파괴된 상태에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악마가 제대로 움직였다면 지금쯤 마리난 제국 남부는 전부 불타서 사라졌어야 했다. 아무렴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있지 않은가.애초에 마리난 제국은 남쪽으로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도 없기에 병력이 변변찮았다. 마경을 지키는 요새 도시야 정예 중의 정예지만 숫자가 부족하고.북동쪽으로는 피의 동맹과 전투 중이라 함부로 병사를 뺄 수도 없으니 그저 난감하기만 할 수밖에.성황청에서 지원 병력이 왔다고 해도 악마의 진격 속도가 너무 늦었다. 녀석들은 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걸까?
“일단 곡창지대를 지키면서 단단히 방어선을 구축해야 하오.”
– 그러면 너무 늦어! 대악마의 위치를 찾아서 먼저 공격해야만 해!”
“대악마는 쉽지 않은 적이오. 마주하고도 살아 돌아온 것이 기적이지. 다섯 제국 기사단이 모두 모이고 세 개의 메이저 마탑이 모두 참전한다고 해도 장담할 수가 없소.”
– 하지만 내버려 둬도 결국 적만 늘어날 뿐이야. 언데드가 더 불어나기 전에 치고 들어가야만 해.
“그만한 전력이 준비된다면. 그래서 병력은 얼마나 모였소?”
–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지. 빌어먹을 놈들! 자기 배에 기름이나 불릴 줄 알지, 이럴 때 병사를 내놓을 줄은 모르는군.북동쪽에서는 피의 동맹, 남쪽에서는 악마의 진격. 대륙 전역에서 던전이 튀어나오고 온갖 이상 현상이 벌어졌다.병사를 쥐고 있는 귀족들은 이런 때 병사를 내놓기를 꺼렸다. 나라를 위해 병사를 보내면 자신에게 위험이 닥쳤을 때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남부가 무너지면 곧 자신들의 일일 텐데, 대악마가 우습게 보이는 건가?”
– 모르지, 멍청한 놈들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놓지 않으니까. 그렇게 병사를 쥐고 있다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그렇게 아끼다가 남부가 완전히 무너지면 알량한 병사 몇이 있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없으면 불안한 모양이다. – 방어선을 당겨서 협곡에서 막아야 해.
“그러면 피해가 너무 큰데.”
– 그래도 전선을 좁혀야만 해. 지금은 지켜야 할 곳이 너무 많아. 이래서는 한 쪽에 대악마가 나타나면 끝장이야.이런저런 의견으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가만히 앉아있던 이레인이 회의실을 벗어나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연초를 태우기 위해서겠지.세계수와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그녀는 몹시 불안해서 끊임없이 연초를 달고 살았다. 연초에 있는 진정 효과가 아니면 버틸 수가 없는 모양이다.
‘악마 새끼들이 지금 세계수를 공격하고 있는 걸까?’
아이반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이고 고민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회의가 끝났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군. 결론은 어떻소?”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가 지도에 줄을 죽죽 그었다. 여기저기 엑스를 그리고 장벽을 따라 붉은 선을 만들었다.
“버릴 곳은 버리고, 막을 곳은 막는다. 우리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길목을 틀어막아야만 해.”
그러니까 가장 위험한 곳에서 뒈지게 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몹시 익숙한 일이다.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하고.
“출발은?”
“내일 해가 뜨면.”
그 말에 아이반이 웃었다.
“하룻밤이나 시간을 주다니, 여유롭군.”
험한 돌산을 따라 움직였다. 길도 없는 가파른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이 험한 곳에 과연 요새가 있을까 의심스러웠지만 한참을 가다 보니 제법 잘 지어진 성벽이 나타났다.예전 제국이 생기기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쓰이지 않아 수백 년은 족히 방치되었지만, 아예 처음부터 진지를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미리 도착한 병사들이 대충 치워뒀기에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나름 깊은 우물도 있고 썩 마음에 들었다.
“마법진이라도 그려 넣어야겠어. 요새라면 최소한의 방어마법은 있어야지.”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가 마법사들을 이끌고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델피노와 사제들도 아룬의 제단을 쌓아 간이 성소를 만들었다. 이렇게 준비를 해둬야 더욱 효율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이 근처에는 특별한 것이 있나?”
기사의 질문에 병사가 대답했다.
“야생 트롤이 가끔 보이는데, 그것 말고는 별것 없습니다.”
“트롤?”
“토벌하려고 해도 이리저리 잘 숨어다니는 놈들이라······. 그 커다란 덩치가 막상 찾으려 하면 보이지 않더군요.”
마리난 제국은 지극히 인간 중심의 나라였다. 인간을 제외한 이종족은 엘프나 드워프 정도가 아니라면 죄다 몬스터 취급을 받았다.그러나 워낙 땅덩어리가 넓었다. 숨어서 사는 이종족이 제법 되겠지. 험한 산속이나 동굴에 있으면 찾기도 어려우니까.
“그러면 잠깐 둘러보지. 트롤 놈들이 괜히 어슬렁거리면 신경 쓰이니.”
아이반과 사나운 이빨, 이레인은 기사 몇 명과 함께 주변 정찰에 나섰다.게리와 프레키, 두 마리 늑대 정령을 땅에 풀고 후긴과 무닌, 두 마리 까마귀 정령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았다.언데드 특유의 음습한 사기나 썩은 시체 냄새는 나지 않았다. 만약 근처에 있었다면 냄새에 예민한 늑대 정령이 알아차렸으리라.대신 게리와 프레키는 다른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벌렁거리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아이반은 창을 빼 들고 그 뒤를 따르다가 표정을 굳혔다. 왠지 감이 좋지 않았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아주 미묘한 위화감이 그를 덮쳤다.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황금색으로 변했다. 마력이 사방으로 퍼지고 주변을 탐색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마력의 흐름, 그러나 아이반의 오른쪽 눈은 그것이 의도된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극도로 은밀하게 만들어진 진법. 투박하고 원시적인 주술이었으나, 그만큼 알아차리기 어려운 힘이었다.휘익!아이반이 재빨리 후퇴를 지시했으나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 빨랐다. 아이반은 자신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화살을 맨손으로 붙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원시 주술에 화살?”
어느 쪽이든 언데드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악마의 것도 아닐 테고.
‘트롤? 야생 트롤이라기에 진짜 별것 아닌 놈들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수준이 높은데?’
마리난 제국의 탄압으로 힘들었을 텐데 이 정도 기술을 보전하다니,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대들을 위협할 생각은 없다! 악마의 흔적을 찾고 있을 뿐이다!”
아이반이 동부 트롤어로 그리 소리쳤다. 남부 트롤어는 잘 모르지만, 어차피 서로 비슷하니 알아듣기는 했으리라.그러나 다시 한번 화살이 날아왔다. 트롤은 원체 힘이 좋은 놈들이라 화살이 아니라 창처럼 보이기도 했다.탁!아이반은 인간이 쓰기에는 지나치게 큼지막한 화살을 쳐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인간에 대한 불신이 가득할 테니 순순히 믿을 리가 없지.’
전에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한 말도 있고 해서 한 번은 넘어가려 했던 아이반이 창을 쥐고 뛰어들었다.그의 성격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인간 불신에 걸린 트롤만큼이나 그 역시 트롤을 믿지 않았다. 자신을 위협했다면 더욱.쉬이익!땅을 박차고 달려간 아이반은 고개를 옆으로 눕히고 허리를 꺾으며 화살 두어 대를 피하고 창을 내질렀다.어정쩡한 자세로 있던 트롤의 가슴에 창이 박히고 울컥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검은 피?’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트롤이 자신의 가슴에 박힌 창을 붙잡고 씨익 웃으며 트롤어로 욕설을 내뱉었다.
“더러운 인간 새끼.”
안 그래도 커다란 트롤의 덩치가 커진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뼈가 굵어졌다. 회색빛이 도는 녹색 피부 위로 검붉은 문신이 사악한 마력을 토해냈다.악마의 힘.
“우어어어어!”
악마의 손을 잡은 트롤이 소리쳤다. 그것을 신호로 숨죽이고 있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큼지막한 주먹이 날아왔다. 근육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데 주술의 힘까지 가득해 퍽 위협적이었다.아무리 트롤이 터프하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가슴에 창이 박힌 녀석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기세가 좋았다.휘이익!바위도 때려 부술 주먹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이반은 아래로 파고들면서 창에 힘을 더했다. 새하얀 번개가 창을 타고 녀석의 내장을 지졌다.치지직!
“윽!”
살이 타는 냄새와 함께 트롤이 피를 왈칵 뱉어냈다. 녀석의 가슴에서 창을 뽑아낸 아이반이 마무리를 하려는 순간, 그를 노리고 굵은 화살이 쏟아졌다.피우웅!쾅!아이반이 창을 휘둘러 화살을 걷어내는데, 화살이 허공에서 폭발하며 그를 밀어냈다. 역시 원시 주술이 깃든 화살이었다.마력을 내뿜어 폭발을 막아낸 아이반이 낮게 중얼거렸다.
“펭그(Fengr:사로잡는 자).”
바닥에서 넝쿨이 솟아올라 트롤의 팔다리를 붙잡았다. 어느새 가슴의 상처를 회복한 녀석이 날뛰었다.
“우워어어어!”
뚜두둑! 웬만한 중대형 몬스터조차 붙잡을 수 있는 넝쿨이 끊어진다. 트롤이 가진 육체적 능력도 물론 강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악마의 힘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일까.스걱!아이반의 창이 트롤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재생력이 좋다고는 해도 머리가 잘리고도 회복할 수는 없겠지.녀석의 목숨을 거두고 다른 놈들을 향해 움직이려던 아이반은 급하게 몸을 뒤틀었다. 분명히 죽였던 트롤이 다시 일어나 그를 후려쳤기 때문이다.탕!창을 세워서 트롤의 공격을 막아낸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노려보았다.머리를 잃은 트롤의 육신이 똑바로 섰다. 온몸에 가득하던 생명력은 그대로 죽음의 마력이 되어 사령핵을 만들었다. 갓 죽은 시체에서 벌써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언데드, 듀라한.아이반은 강하게 발을 구르고 날아올랐다. 번개를 불러 온몸을 휘감고 천둥을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치지직! 쾅!천둥걸음에 이어서 창을 휘둘렀다. 듀라한이 되어 가죽이 조금 더 질겨졌으나 그렇다 해도 아이반의 창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듀라한의 썩은 피가 바닥에 쏟아졌다. 갈라진 가슴에서 내장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트롤의 재생력은 그 심각한 상처마저 회복했다. 이미 목숨이 끊어졌기에 회복이 더 쉬운 모양이다. 어차피 이제는 내장이 없어도 상관없으니까.꽈아악!아이반은 창을 쥐고 비틀면서 내질렀다. 폭풍이 휘감기고 칼날 같은 바람이 듀라한의 육신을 갈아버렸다. 척추를 끊어버리고 상반신과 하반신을 나눴다. 사령핵을 부수고 그 파편을 흩어버렸다.그렇게 트롤 하나를 처치한 아이반이 힐끔 눈을 돌려 아군을 살폈다. 사방에서 나타난 트롤들을 상대로 맹렬히 싸우고 있었다.사나운 이빨은 트롤 이상으로 강력한 힘으로 아예 찍어 눌렀고, 이레인은 숨어있는 트롤 궁수들을 역으로 저격하고 있었다.기사들도 그 지옥 같던 마경에서 살아 돌아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악마의 힘을 받은 트롤에게 그리 밀리지 않았다.그러나 그렇게 트롤이 하나둘 쓰러질 때마다 그 목숨을 제물로 삼아 저주가 스며들었다.원시 주술은 아주 단순한 작동 원리만큼이나 그 결과도 단순했다. 그 단순함은 어느 순간 지독함이 되어 달라붙었다.원한의 대가로 원한을, 목숨의 대가로 목숨을.
“우어어어어!”
사방에서 우리는 비명과 같은 외침에 몸이 점차 무거워진다. 온갖 내성을 가득 쌓은 아이반은 그다지 영향이 없었으나, 기사들의 움직임이 크게 둔해졌다.아이반, 사나운 이빨, 이레인은 모두 자신이 버티는 것이라면 모를까 다른 이들의 저주를 풀어줄 능력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델피노와 같이 움직이는 건데.’
델피노와 사제들은 요새에서 제단을 쌓고 있었다. 물론 성기사와 사제 한둘 정도가 따라오기는 했지만 해주를 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빛이여, 우리의 앞을 가리는 어둠을 밝히소서.”
전투 사제가 재빨리 기도를 올리며 신성력을 내뿜었다. 그를 노리고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사나운 이빨이 들어 올린 방패에 막혔다.이제는 사나운 이빨의 방패술도 제법이었다. 짧지만 그동안 실전을 거듭하며 조금씩 몸에 익었기 때문이다.홀로 백 번을 연습하는 것보다 한 번의 실전이 더 나았다. 매일같이 싸우고 있으니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휘리릭! 아이반은 한 손으로 도끼를 집어 던지고는 다른 쪽 손으로 창을 휘둘러 트롤의 공격을 막아냈다.아이반 역시 평범한 인간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근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인과 힘겨루기를 할 정도였으니 트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는 않았다.그때 북소리와 함께 마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둥! 둥둥!미리 준비되어 있던 원시 주술 결계가 활성화되었다. 시야를 가리고 감각을 현혹하는 환영 결계. 아주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싸움 와중에 잠깐씩 시선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모두가 잘 알았다.다만 아이반은 현자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진리와 진실을 꿰뚫는 황금색 눈이 환상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을 마주 보았다.환영 결계 너머에서 걸어오는 노련한 트롤 전사의 모습에 아이반이 창을 고쳐 잡았다.온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재생력이 대단한 트롤이 저렇게나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격렬한 싸움을 겪어왔다는 뜻이다. 얕볼 수는 없었다.아이반은 그의 몸에도 검은 문신이 새겨져 있음을 보았다. 악마의 상징. 역시 얼마 전에 새겨 넣은 듯했다.
‘결계를 유지하는 핵은 어디지?’
아이반은 동부 트롤어로 질문을 던졌다.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고, 그냥 잠시 주변을 살필 시간을 벌려는 의도였다.
“트롤은 자연령과 조상신을 모시지. 그런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말인가?”
뜻밖에도 그 질문에 대답이 돌아왔다. 트롤 전사는 유창한 인간의 언어로 답했다.
“악마? 누가 악마란 말인가?”
“누구긴. 마계에서 기어 나온 빌어먹을 놈들이지. 살아있는 것이라면 모두 죽여 버리고 시체조차 일으켜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놈들과 함께하다니, 조상신을 보기 부끄럽지 않은가?”
“그렇다면 너희들은 무엇이란 말이냐!”
트롤 전사는 차갑게 분노를 터트리며 소리쳤다.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두 죽여 버리고, 우리의 재생력이 탐난다는 이유로 피를 뽑아가는 너희들은 악마가 아니란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