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142
누가 뭐라 해도 현시대의 주류 종족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남부 제국 마리난은 그중에서도 인간 중심 사상이 가장 강력한 곳이었다. 인간이 아닌 것은 모두 가축이며 몬스터였다.가장 피해를 많이 본 것이 트롤이었다. 트롤은 무척이나 유용했다. 그 힘도, 생명력도. 노예로 삼아 부리기도 좋았고, 피를 뽑아 가공하면 제법 훌륭한 마법 재료가 되었다.그렇게 트롤은 들에서 산으로, 산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로, 동굴로 숨어들었다. 인간을 피해서.
“우리의 악마는 인간이다.”
부우웅!트롤 전사가 도끼를 휘둘렀다. 검붉은 불길이 그 궤적을 따라서 타올랐다. 그것은 지독한 원한이었다. 악마의 마력으로 가공된 저주의 불길이었다.쾅!아이반이 녀석의 도끼를 맞받아쳤다. 녀석의 커다란 덩치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피를 토한 것은 아이반의 뒤에 있던 기사와 사제였다. 인간에 대한 지독한 악의가 그들에게 물리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다.원시 주술, 결계, 트롤들의 죽음, 악마의 술법까지. 모두 이것을 위한 것이었다.
“이 땅에서 인간을 몰아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 육신과 영혼을 바치겠다!”
검붉은 투기에 타오르며 트롤 전사가 다시금 덤벼들었다. 말 그대로 생명력과 영혼을 불태워 힘을 뽑아내고 있었기에 아이반도 가벼이 볼 수가 없었다.쾅!아이반이 뒤로 밀려났다. 힘에서 밀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체중의 차이로 버틸 수가 없었다.휘익!아이반이 밀려나는 기세 그대로 땅을 박차고 몸을 뒤집었다. 단검 몇 개가 날아가 트롤 전사의 몸에 박혔다.그러나 마치 시간을 되감는 것처럼 트롤 전사의 몸에서 단검이 밀려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력한 재생력이 단검을 밀어낸 것이다. 흘러내리던 핏방울마저 그대로 흡수되어 흔적조차 없었다.
‘이 정도로는 흠집도 안 나네. 조금 더 틈을 만들어야 하나.’
아이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트롤 전사가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아주 재빨랐다. 긴 보폭 덕분에 두어 걸음이면 충분했다.스걱!아이반이 끝까지 몸을 비틀었으나 트롤 전사의 도끼가 그의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피가 퍼지고 팔이 뚝 떨어졌다.그러나 트롤 전사는 즐거워하기보다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쉽게 처리할 상대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푸슉!어느새 트롤 전사의 뒤로 돌아온 아이반이 창을 내질렀다. 어두운 용의 발톱은 두꺼운 가죽을 뚫고 트롤 전사의 심장을 찔렀다.그와 동시에 팔이 잘려 나갔던 아이반의 모습은 바람에 휘날려 사라졌다. 코끝을 스치던 피 냄새와 바닥을 뒹굴던 한쪽 팔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흩어졌다.휘이잉!악마의 힘을 받아들인 트롤의 괴물 같은 생명력을 경험한 아이반은 심장에 창을 박아 넣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마력을 내뿜었다. 아예 반쪽을 갈아버릴 듯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쿵! 트롤 전사의 몸이 뒤로 쓰러진다. 말 그대로 용이 쥐어뜯은 듯 커다란 구멍이 난 몸에서 피가 철철 쏟아졌다. 그러다가 다시 모여들었다. 심장과 폐를 포함해서 상반신의 절반이 날아갔음에도 회복할 수가 있는 모양이다.아무리 트롤의 재생력이 대단하고, 악마의 힘을 받았다고는 해도 이게 가능한 일일까. 아이반은 헛웃음을 흘리면서 주먹을 쥐었다.
“언제까지 버티는가 보자.”
쾅! 콰쾅!아이반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강력한 충격파가 번졌다. 천둥신의 권능이 녀석의 몸을 불태우고 악마의 기운을 밀어냈다.그런데도 녀석은 몇 번이나 버텼다. 온몸이 숯덩이가 되고, 또 갈기갈기 찢어져도 재생했다. 그러나 횟수가 다섯이 넘어가자 그 지독한 재생력도 바닥난 것인지 움직이지 않았다.빠르게 부패해서 언데드로 부활하려는 것을 짓밟아 터트린 아이반이 허리를 펴고 주먹을 털었다. 트롤의 피가 흩어졌다.
“지독하군. 모두 이런 생명력을 가졌다면 이미 옛날에 트롤이 대륙을 통일했겠어.”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트롤 전사의 지독한 재생력은 다른 트롤들에게서 가져온 것이었으니까.이들은 원시 주술과 악마의 힘으로 서로의 생명력을 묶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트롤 전사가 재생할 때마다 다른 트롤들이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원시 주술로 만들어진 결계와 지독하던 저주마저 흐려졌다.
“악마들이 진군을 늦추고 뭘 하나 했더니 다른 종족을 끌어들이고 있었나 보오.”
“그러게 말이야. 전혀 예상치 못했는걸.”
남부 제국 마리난에는 지독한 박해를 피해 숨어 사는 이종족이 상당히 많았다. 그들 중 몇이나 악마와 손을 잡을지는 모르겠으나, 만만히 볼 사태는 아니었다.마리난 제국이 그동안 쌓은 업이 좀 많아야지. 망할 놈들.
“···이렇게 찝찝한 싸움은 싫은데.”
씨부럴, 악마를 때려잡는 일에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거지.아이반과 이레인, 사나운 이빨은 아주 복잡한 눈빛으로 트롤들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요새로 향했다. 오늘따라 핏물이 무거워서 발걸음이 느렸다.
마리난 제국 영토 곳곳에서 이종족이 봉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트롤은 물론이고 오크, 고블린, 리자드맨, 사티로스, 오거, 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족이 악마의 문양을 몸에 새기고 인간과 싸우기 시작했다는 거다.이는 인간이 쌓은 업의 결과였고, 악마의 간교한 술책이었다.
“상황이 참 엿같이 돌아가는군.”
저 멀리서 독침을 날려대던 고블린에게 도끼를 집어 던져 마무리한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식이라면 막을 수가 없소.”
악마와 언데드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 적이었다. 거기에 이종족이 대거 합류했으니 마리난 제국은 계속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도대체 이 빌어먹을 제국은 뭔 짓을 했기에 적이 이렇게나 많은 걸까.일단 악마가 상대니 성황청에서야 긴급 지원군을 보내서 도와주고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미적거리고 있었다. 당장 자국에서 일어난 일도 처리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나라의 동쪽이 피의 동맹에 점령당한 로만 왕국은 다른 곳을 도와줄 여유가 없었다. 지금도 전쟁을 이어가고 있는 피의 동맹은 이 기회에 공세를 강화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서부 연합 왕국은 뒷짐을 지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인간 중심 문화를 가지고 있는 마리난 제국과 다종족 다문화 국가인 서부 연합 왕국은 원래부터 사이가 썩 원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래도 그냥 악마와 언데드가 상대였다면 거국적인 의미에서 도왔을 텐데, 이종족이 봉기하면서 상황이 이상해졌다. 서부 연합 왕국이 끼어들기가 영 껄끄러워진 것이다.애초에 그런 이유로 서부 연합 왕국은 피의 동맹에 대항해서 만들어진 신뢰의 연합에도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국경선에 군대를 대기시키고 있을 뿐 직접적으로 개입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결론적으로 마리난 제국은 주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저 멀리 있는 스페니안 왕국에서 원군을 받을 수도 없었고.
“실로 악마다운 술수입니다. 다른 종족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병력을 충원할 뿐만 아니라 혼란을 증가시키고 외부의 개입까지 막았군요.”
델피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고도로 정치적인 일이었다. 그에게는 영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죽음의 인도자가 그런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는데. 어쩌면 그런 간교한 지혜가 있기에 대악마의 자리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소.”
하긴, 숨 쉬듯이 하는 일이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상대를 괴롭힐 수가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힘으로 찍어 누르기만 하는 놈들이라면 악마가 그렇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리가 없었다.
“이대로는 그저 소모전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는 너무나 불리하군요.”
델피노의 말에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죽은 자들조차 언데드로 부릴 수가 있는 놈들이 적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아군은 줄어들고 적군은 많아졌다.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악마가 소환될 겁니다. 어쩌면 또 다른 대악마가 나타날지도 모르죠.”
델피노의 경고를 들은 이레인은 아이반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우리는 악마와 싸우려고 여기에 있는 거야. 오크나 트롤, 고블린이 아니라.”
웬만하면 아이반의 의견을 존중해서 따르는 그녀가 드물게도 강한 어조로 결정을 재촉했다. 이레인 입장에서는 세계수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리난 제국이 스스로 쌓은 업을 우리가 대신 짊어질 수는 없어.”
이레인이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아이반도 받아들였다. 여기서 계속 묶여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좋소. 그러면 브라움을 찾아가 말을 해보겠소.”
아이반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브라움을 찾아갔다.조금 전까지 전투를 벌이고 돌아왔기 때문에 남부 기사단장 브라움의 갑옷에도 적의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비록 그가 팔 한쪽을 잃어버렸다고는 해도, 그는 다섯 제국 기사단장 중의 하나였다. 여전히 단단하고 강인한 사내였다.브라움은 젖은 천으로 피를 닦아내다가 아이반을 바라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리라고 느낀 것이다.
“실없는 농담은 아닐 테고,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오셨나?”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소. 우리는 마리난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마를 죽이기 위해서 싸우겠소.”
“···요새를 지키는 것은 중요해. 이건 전쟁이야. 어린애 소꿉장난도 아니고, 괴물 몇 마리 때려잡아서 용맹을 과시하는 것도 아니란 말이지.”
“솔직히 말씀하시오. 금방이라도 대악마의 목을 딸 듯이 외치다가 결국 요새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귀족들의 빌어먹을 욕심 때문이 아니오?”
병사가 넉넉했다면 이미 길을 열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전선이 계속 밀리는 것은 모두 귀족들이 자신의 병사를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금방이라도 온다던 지원군은 세월아 네월아 늦어지고, 그나마 도착한 것도 그 수가 크게 적었다. 무장이 빈약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썩어도 제국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이럴 정도는 아니었다.성황청의 루트를 통해 슬쩍 듣기로는 아주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지금도 중앙에서는 서로 편을 갈라서 미친 듯이 언쟁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중앙집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지방 영주들의 힘이 컸다. 중앙군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은 지방 영주의 사병이었으며, 또한 상비군은 극히 적었고 대부분은 예비군이었다. 일 년에 며칠 정도 훈련을 받았을 뿐인 농민들.상황이 그러니 누가 얼마나 병력을 보낼 건가, 누가 지휘를 맡을 건가, 병참은 누가 담당하고 보급은 어떻게 할 건지와 같은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북동쪽 피의 동맹과 전쟁 중인 것은 어떻게 할 건가, 휴전할 건가, 한다면 저들이 받아들일 건가, 조건은 어떻게 할 건가, 과연 믿을 수는 있는가, 주변국 반응은 어떤가, 정말로 지원은 없는가, 국가적 위신은 어떤가에 이르기까지 논의해야 할 것이 산더미같이 많았는데 진도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이미 악마에게 영지를 빼앗기고 가까스로 도망쳐 나온 귀족들이, 코앞에 언데드를 맞이한 영주들이 아무리 재촉을 해도 굼뜨기만 했다.악마와 언데드, 이종족 봉기에 이르러 제국의 남부를 거의 빼앗기고 겁을 집어먹었다고 해도 좋았다.
“마리난 제국이 스스로 악마를 막아낼 의지가 없다면, 우리도 이곳에 있을 수는 없소.”
같이 마경에 들어가 악마와 싸웠던 브라움을 다그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확답을 들어야만 했다. 과연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를 처리할 계획이 있는지.
“북부 기사단과 그린 스킨을 견제할 최소한의 병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제국 기사단과 중앙군이 모두 내려올 예정이다. 백색 마탑을 포함해 세 개의 메이저 마탑은 이미 참전했고, 라인하르츠 공작과 황금 사자 기사단 역시 악마 여럿의 목을 잘랐다. 상황이 아주 최악은 아니야.”
남부를 모두 잃고도 최악은 아니라니, 브라움은 자신이 그리 말하면서도 헛웃음을 흘렸다. 얼마나 의미 없는 말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한참을 고민하던 브라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지금 중앙에서 떠들어대고 있는 정치 귀족들은 대부분이 쓰레기 같은 작자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야. 하나 작전을 가다듬고 있어.”
이대로 시간을 끌면 불리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았다. 전선이 넓어질수록 힘들다는 것도 당연한 소리였다.그러니 일순간, 여기저기 퍼져있는 강자들을 모아 단번에 찌르고 들어간다.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의 목을 베고 돌아온다.
“말은 그럴듯한데, 어떻게 다가가겠다는 말이오? 다른 전선을 오래 비우면 위험할 텐데.”
“이건 원래 황실과 제국 기사단장들만이 아는 기밀이지만, 제국 곳곳에 장거리 공간이동이 가능한 게이트가 있어. 옛 시대의 흔적이지. 대악마의 위치가 특정되면 게이트를 통해 단번에 날아갈 거야.”
녀석들이 제국 남부를 휩쓸면서 전선이 넓어진 것은 결국 아군에게만 불리한 요소가 아니었다. 죽음의 인도자 주변에 있던 악마와 언데드 군대가 적당히 퍼졌으니 대악마를 암살하겠다는 소리다.
“대악마의 위치를 거의 찾았으니 조금만 기다려. 그러면 기회가 올 테니.”
남부 기사단장, 제국을 수호하는 다섯 기사단 중 하나를 이끄는 남자가 선언했다.
“악마가 날뛰는 것도 잠시뿐, 인간은 지지 않는다.”
브라움에게 작전에 대해 언질을 받은 것이 벌써 일주일, 침묵하며 기다리고 있던 아이반에게 그가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작전 시작은 아침, 동이 트는 무렵. 죽음의 기운이 가장 약해지는 시점을 노려서 게이트를 넘어간다.작전에 참여하는 인원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성황청의 아홉 교단에서 각각 한 명의 추기경이 나섰고, 성전기사단과 전투수녀단은 물론이고 구마사제와 이단심문관까지 죄다 움직였다.피의 동맹을 견제할 북부 기사단과 그동안 너무 큰 피해를 본 남부 기사단을 제외한 제국 기사단이 모두 나섰고, 제국 최강의 기사라는 라인하르츠 공작과 그를 따르는 황금 사자 기사단, 그 외에도 이름난 몇몇 기사와 무인들이 함께했다.제국 마법사단, 삼대 메이저 마탑까지 놓고 보면 그야말로 나라 하나를 통째로 불태울 수준의 전력이었다.다른 전선을 방어할 병력, 피의 동맹을 견제할 병력, 이런저런 이유로 움직이지 못하는 병력을 제외하면 전국에서 제국 황실의 말이 먹히는 강자는 죄다 긁어모은 셈이다.
“최대한 빠르게 대악마를 처치하고 돌아온다. 녀석을 처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선이 무너지기 전에 돌아오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명심해.”
마지막으로 게이트를 점검하던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가 그리 말했다.다른 이들은 몰라도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를 보았기에 마음에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흥, 이 정도 전력이면 대악마는커녕 마왕도 때려잡을 수 있을 거야. 모두 긴장 풀라고. 그러다 이상한 잡졸에게 당하지 말고.”
우웅-오비도가 손짓하니 막대한 마력이 움직였다. 오래된 돌기둥에 새겨진 마법 문자가 빛을 뿜어내고 공간을 일그러뜨렸다.푸른색 게이트 너머의 공간을 본 아이반이 제일 먼저 몸을 날렸다. 그가 출발했던 곳과 비슷한 형태의 지하 공동. 두 배쯤 커다란 돌기둥 주위로 몇 개나 되는 푸른 게이트가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었다.검고, 푸르고, 붉은색의 갑옷을 입고 있는 여러 기사와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 따로 무기가 없이 양손에 건틀릿을 끼고 있는 무투가.하나같이 훌륭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다. 개중에 몇몇은 아이반에게도 꽤 익숙한 외형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네임드일 터였다.치이익-모든 이들이 게이트를 넘어오자 커다란 돌기둥에 금이 가고 마법 문자들이 시커멓게 타올랐다.오비도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혀를 찼다.
“한 번에 지나치게 많은 게이트를 움직였어. 다시 쓰기는 어렵겠어.”
안타깝기는 했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오비도는 고개를 돌렸다.
“올 사람은 다 왔으니 이제 출발하지. 다른 쪽과 시간을 맞추려면 어서 움직여야 할 거야.”
그 말에 마리난 제국 서부 기사단장 타이런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사나운 이빨을 발견하고는 잠시 멈칫했으나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크게 내색하지 않고 앞을 향했다.
“그러면 이제 출발한다. 무기를 들고 긴장을 늦추지 마라. 상대는 대악마다.”
숨겨진 문을 열고 지상으로 나오자 저 멀리서 악마와 언데드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고대 유물의 힘으로 장거리 공간이동을 했으나, 그 기척까지 숨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악마의 근처까지 단번에 날아왔으니 이 정도는 각오해야지.차르륵!기사가 각자 무기를 뽑아 언데드의 머리를 쪼개놓았다. 악마가 토해내는 불길을 마법사들이 걷어내고 녀석의 날개를 꺾었다.그 너머로 거대한 성벽과 높은 성문이 보였다. 마리난 제국 남부의 대도시 스트라븐.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자리 잡은 곳이다.스걱!악마의 목을 베고 타이런이 외쳤다.
“뒤에 남겨진 자를 구할 시간은 없으니 각자 알아서 따라오도록!”
악마의 피와 언데드의 썩은 살점을 붉은 융단처럼 밟으며 앞으로 향했다. 영웅들의 행진이었다.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창을 내질렀다. 어두운 용의 발톱이 길게 늘어나면서 좀비의 머리를 꿰뚫었다.팅!아이반이 손목에 회전을 넣으며 밀어내자 썩은 살점이 튀었다. 폭풍이 그의 창을 타고 날아가 길을 열었다. 앞을 막고 있던 언데드들의 몸이 쩍 갈라졌다.슈우욱!창을 회수할 것도 없이 어린 아이 팔뚝만큼 줄어들었다가 다시 길어졌다. 어두운 용의 발톱이 길이와 굵기를 제멋대로 바꾸며 주변을 휩쓸었다.피우웅!성벽 위에 있는 하얀 뼈다귀들이 화살을 쏘아 날렸다. 한때 괴물들에게서 인간을 지키던 병사들이 악마의 앞에서 인간을 공격했다.탕!제국 서부 기사단이 일제히 방패를 들어 올렸다. 마력을 머금고 허공을 후려치듯 밀어내자 날아오던 화살들이 방향을 잃고 흩어졌다.우웅-가장 열정적인 불꽃, 흔히 적색 마탑이라 불리는 곳의 마법사들이 마법의 언어를 읊조렸다. 세상의 법칙이 왜곡되고 커다란 불덩어리가 수없이 떠올랐다.콰과광!전쟁에서 가장 파괴적인 위력을 보인다는 화염 마법사들의 마법이 성벽을 후려쳤다. 두꺼운 성벽이 시커멓게 타오르고 돌가루가 떨어졌다.
“쯧, 제법 잘 버티는군.”
적색 마탑의 주인 리카르도가 혀를 찼다.백발을 곱게 빗어 넘긴 그는 아주 신사적이고 차분한 인상이었으나, 실상 자신이 다루는 불꽃만큼이나 뜨거운 남자였다.
“스트라븐이면 제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니, 성벽이 튼튼한 거야 당연한 일이지.”
대도시 스트라븐의 성벽은 마법 방어를 위한 술식이 새겨져 있었다. 제대로 사용한다면 대마법사의 마법도 능히 막아낼 수 있을 정도. 비록 얼마 전에 악마에게 뚫려서 성이 점령되었으나, 결코 만만히 볼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 방어 술식이 제대로 복구되지는 않았군.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럴 가치가 없다고 여긴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행이야.”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가 그리 말하자 리카르도가 코웃음을 흘렸다.
“흥, 그리 튼튼한 성벽을 가지고 어찌 악마는 못 막았을꼬?”
리카르도가 지팡이를 쥐고 마력을 집중하자 순식간에 공기가 달아올랐다. 뭣 모르고 그에게 달려들던 좀비가 그대로 타올라 재가 될 정도였다.화르륵!그를 둘러싸듯 생겨난 화염 때문에 새하얀 머리카락이 붉게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부르길 적발의 리카르도. 본인은 유치하다고 여겼으나, 전장에서 불리는 별명이야 원래 그런 법이었다.쉬이이- 쾅!리카르도의 손짓에 따라 화염 기둥이 솟아올랐다. 화염 기둥은 그대로 전장을 휩쓸고 성벽을 갉아냈다.약간의 저항이 느껴지다가 이내 마법 방어가 무너졌다. 불길이 성벽을 타고 휘몰아쳤다. 성벽 위에 있던 언데드 병사들이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후끈한 열풍이 밀려왔다. 그 강렬한 바람에 중심을 잃고 쓰러진 좀비를 베고 서부 기사단장 타이런이 소리를 질렀다.
“성문을 열어라!”
도개교는 내려와 있지 않고, 해자는 시체 썩은 물로 가득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물에 둥실둥실 떠 있던 불어터지고 썩은 시체들이 언데드가 되어 해자를 기어올랐다.
“썩은 물에 생명을!”
물의 신 뤼안을 모시는 사제들이 기도를 올리자 썩은 물이 깨끗이 정화되어 솟아올랐다. 지속성은 없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성수와 비슷한 성질을 지닐 만큼 신성력이 가득했기에 사기가 흩어지고 언데드가 평범한 시체로 돌아왔다.그그긍!도개교를 내릴 필요도 없이 마법사들이 땅을 들어 올려 길을 만들자 기사들이 달려가서 성문을 후려쳤다.쿵!완전 무장한 기사가 마력을 듬뿍 머금고 몸을 날려서 후려치면 그건 이미 공성 병기나 다름없었다. 몇 번 그렇게 부딪치니 두꺼운 나무로 만들어진 성문이 휘청거리다가 뒤로 넘어졌다.재수 없는 언데드 몇이 성문 뒤에 있다가 넘어지는 성문에 깔려서 으스러졌다. 성전기사단과 서부 기사단이 빠르게 성문을 통과해 밀고 들어갔다.타다닷!성문 너머에는 수없이 많은 좀비와 스켈레톤이 기다리고 있었다. 듀라한도 적지는 않았고, 죽음의 기사도 제법 많았다.스트라븐이라고 하면 마리난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대도시였다. 원래 이곳에 살던 인구가 십만 명이 넘었으니, 많은 수가 전쟁을 피해 피난을 갔다고 해도 남아있던 사람이 적지 않았을 거다.마침내 성벽이 뚫리고 스트라븐이 악마에게 점령당했으니 만약 그들이 모두 죽어서 언데드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당장 눈에 보이는 수보다 훨씬 수가 많을 터였다.
“밖으로 많이 빼낼 만큼 빼냈음에도 이 모양이군.”
서부 기사단장 타이런이 미간을 찌푸리며 검을 휘둘렀다. 듀라한의 몸이 쩍 갈라지고, 그 너머에서 죽음의 기사가 시커먼 마력을 흩뿌리며 달려들었다.
“이 어두운 땅을 밝히는 횃불이 되기를!”
불의 신 쿤다라 교단의 성기사들이 신성한 불꽃을 몸에 두르고 언데드들을 밀어냈다.비록 악마가 점령한 땅이었으나, 그 오염되고 더러워진 땅에도 횃불은 타올랐다. 순수한 신앙은 어려움 속에서 더욱 격렬해지는 법이다.화아아-신성한 불길이 일렁일 때마다 언데드가 뒤로 물러났다. 썩은 몸을 집어삼키고 타락한 영혼을 불태워 불의 신 쿤다라의 앞으로 이끌었다.쿤다라 교단의 성기사들이 앞에서 이끌자 다른 교단의 성기사들이 각자의 신을 부르며 함께했다.이들은 각 교단의 정예 중의 정예였다. 웬만한 언데드는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그대로 정화되어 사라졌다. 나름 강력하다는 놈들조차 제대로 무기를 휘두르지 못했다.하나만 나타나도 마을이 발칵 뒤집어지는 강력한 언데드들이 빗자루로 먼지 쓸 듯이 쓸려나갔다.마리난 제국이 자랑하는 제국 기사단과 메이저 마탑, 성황청의 최정예 성기사와 사제들이었다. 당연한 일이다.그러나 대로를 따라 내성으로 향하는 아군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수가 너무 많았다. 아직 진짜는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힘의 소비가 너무나 컸다.체력과 마력이 급격하게 소모되었다. 아직은 괜찮았지만, 최종 목표가 대악마라는 것을 생각하면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으르르르!짐승 소리를 내며 썩은 살점 골렘이 나타났다. 인간의 시체를 몇이나 붙여서 만든 외형은 몹시 역겨웠으나 힘은 대단했다. 주먹질 한 방에 벽을 부수고 그 파편을 날렸다.휘이익!하늘에서 떨어지는 돌덩이를 걷어내면서 아이반이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새끼들!”